* 출처: 웹진 땡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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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박신의 선생님
박신의: 어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벨기에 현대만화전을 위해 내한한 벨기에 만화작가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제 명함만 보고는 어떻게 만화 자리에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저보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일단 그들에게 저는 만화를 예술로서 접근한다고 했고, 그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 비디오아트,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영역까지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모든 예술적 성과를 함께 나눠 갖기 위해 효율적인 예술제도와 매개장치를 연구하고, 문화정책을 고민한다고 하였더니 금방 이해하더군요. 문제는 장르나 전공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문화적 관심의 확장과 사회적 연속성을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다면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전문성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고 봅니다. 지난 해 문예진흥원 지원 심사를 할 때 어떤 분이 저를 80년대 방식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구분하면서 색깔론 비슷하게 몰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저는 ‘다모폐인이다’라고 대답했어요. 당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문화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 아니겠어요? 저는 직업상으로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예술경영을 가르치고 미술평론과 전시 기획을 하고, 문화정책과 문화기획 전반을 다루는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미술평론가’라는 지위를 택하고 싶어요. 미술의 확장과 문화적 힘을 믿는 사람, 늘 당대적 담론에 반응하며 현장감을 가지고 문화적 실천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의 ‘미술평론가’ 말입니다. 또 겸손하고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직함이기도 하잖아요?
전효관: 미술평론가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계시잖아요?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신 건가요?
박신의 : 물론 미술평론이라는 활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저로서는 평론 작업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의식과 쟁점을 풍부하게 살려주는 작업이라고 봐요. 그리고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사회적 지위, 그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실천력을 살려주고, 이를 많은 사람들이 나눠갖도록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러니 미술평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예술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되고, 또 사회적 실천도 고민하게 되죠. 그런 과정이 결국 예술작품을 매개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살피는 일이 되면서 사회적 개입이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요.
전효관: 제가 책이나 글로 보면서 아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관심 영역과 관심의 확장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신의: 정말 그래요. 저는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여러 영역의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치지요. 경희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학과를 맡다보니, 또 제가 경영대학원 소속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된 것도 있어요. 최근 저는 문화예술기반시설에서의 인력문제를 다룬 연구를 하면서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하신 분들과 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노동의 문제와 경영의 문제에서 문화 영역을 덧붙여 냈지요. 또 도시계획 연구자들이 새로운 도시계획 개념으로 문화기획(Cultural Planning)을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쟁점이 드러나게 되면서 제가 그 부분에 합류하게 된 것도 같은 경우지요. 이런 식으로 문화예술 외부의 영역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제가 여러 일을 하는 것이 된 셈인데, 사실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문화부분이 고려되지 않다가 이제야 문화가 들어오는 시점이 된 것이라는 변화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미술사를 통해 그런 간학문적인(interdisciplinary) 측면을 훈련받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저는 미술사를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입장인데, 예술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적 구조를 보고, 욕망을 읽으며, 모순을 관찰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겐 미술사가 단순히 지식체계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사유 모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을 해석하고 해체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박신의: 요즘에는 ‘미술’이 너무 위축되어, 미술교과모임의 미술 선생님들도 미술이라는 이름 대신 ‘시각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시각문화’는 저 역시 80년대 말부터 미술이 시시각각 변하는 시각문화 혹은 영상문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하게 제안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미술을 대체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시각문화 관점에서 ‘새로운 미술교육’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만일 미술의 위기를 말한다면, 저는 미술교육을 실행하는 ‘제도의 위기’이지 그 자체의 위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술이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보수적인 제도적 틀에 안주하는 것 역시 미술제도의 위기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지요. 저는 미술을 제대로 교육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틀로 미술을 갱신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판단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전효관: 선생님께서 미술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시대 환경 변화에서 미술의 대응이 약했다고 봅니다. 한국, 외국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미술은 쇠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역별로 넓혀가려는 자체 노력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박신의: 지난 해 11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문화정책회의에 참석하면서, 저는 프랑스 미술대학 교육 프로그램 혁신을 주제로 미술학교 방문을 신청해서 간 적이 있어요. 이미 프랑스에서는 변화하는 매체 현상에 대응하면서 미술교육을 시각문화 중심으로 바꿔가고 있었어요. 5년 기간의 미술학교 기간 중 1학년과 2학년의 기초과정을 마치면 3년 차부터는 사진과 비디오, 3-D 디자인 및 영상, 음향작업 등을 배울 수 있게 해요. 다시 말하면 그리고, 만들고, 표현한다는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바탕으로 기술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미술교육의 범주로 포괄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하면 한국의 미술교육은 여전히 낡은 미술개념을 고수하는 입장이지요. 저로서는 새로운 세대들이 게임과 디지털 카메라에 익숙한데, 이들에게 여전히 그리고 만드는 작업만을 교육한다면, 미술교육 자체가 억압이 된다고 봐요. 게다가 뉴미디어라는 것이 여전히 예술적 표현과 생각의 기록과 질문을 던지기 위한 ‘도구’인 한, 결코 미술을 대체하는 요소가 아니겠지요. 오히려 뉴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교육적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전효관: 미술사에서 그런 선례가 있을까요?
박신의: 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 구성주의와 생산주의 예술, 그리고 그 흐름을 서구의 바우하우스에서 받아들인 라즐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의 예술 개념을 모델로 두고 있어요. 생소하실지 모르겠는데, 모홀리-나기는 우리가 잘 아는 파카 만년필을 디자인 한 사람이에요. 그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 바우하우스를 운영하는 데 보탰다고 하지요. 그는 회화에서 조각, 사진, 영화, 건축, 디자인 분야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이어서 오늘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컴퓨터를 가지고 많은 작업을 했을 겁니다. 또한 독일 바우하우스와 미국의 바우하우스를 이끌기도 한 훌륭한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요. 그는 바우하우스 총서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1924년에 발표한 사진과 영화 등의 미디어에 대한 예술적 사고는 차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로 남고 있답니다. 제가 이 예술가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큰 의미를 두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다면적 능력을 믿는다는 점이고, 또 예술이 한 사회의 문화생산에 기여함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미디어 발달에 대해 능동적인 대응을 보여준 태도에 있구요. 저는 예술이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까운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미디어 역시 그런 생체리듬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전효관: 이제 문화예술교육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죠.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박신의: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의 생체리듬을 일깨워주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답하고 싶어요. 다시 말하면 생체리듬이란 열려진 것이어서, 이를 통해 인간은 다면적인 활동과 복합적인 자기 개발이 충분히 가능한데, 오히려 학교교육이 그 가능성을 닫아버렸다고 보는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최근 문화예술교육의 실행을 위한 연구작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수혜 개념에 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실제로 어떤 문화예술이고, 어떤 교육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 부분이 아쉽더군요. 저는 예술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편이고, 또 그래서 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갖고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발견’이라는 교육 효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생체리듬을 찾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는 전 과정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예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에서 우월함이 있다고 봐요.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나 계량적인 방식으로 따져보면, 월드컵과 촛불시위로 모인 사람들의 엄청난 공감대와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생체리듬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게 마련이지요. 엄청난 상상력이 수반된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계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는 인간에 대한 신뢰의 기초를 예술가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란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가 없이도 사회가 돌아갈 법도 한데, 왜 그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갖는 걸까요. 그리고 왜 그 결과물을 나눠 갖자고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그럴까요. 그것은 세계를 바꿔갈 수 있는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일 저보고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라면, 제 모델은 바로 이런 구조를 갖습니다.
전효 관: 선생님 말씀에 재미있는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인간의 이성 능력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내 휴머니즘은 어떤 에너지에 대한 신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박신의: 사회는 설득력 있는 ‘공감대’로 인해 바뀌지, 측량 가능한 ‘수치’로 바뀌지는 않거든요. 아시잖아요. 아주 소수라도 내용의 핵심과 설득력을 가지면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된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앞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어요. 선생이 말하는 에너지를 믿는 휴머니즘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래서라도 문화예술교육의 경우도 어떤 예술인가, 어떤 교육인가를 먼저 논의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예술교육을 단순히 예술 향유의 기회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일테면 국립현대미술관을 무료로 입장하도록 한다거나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어린이 그림대회를 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기회 확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에너지를 찾아가도록 하는 교육말입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말하는 ‘예술과 삶의 결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술가라는 전문집단만의 예술을 거부하는 의미이거든요. 그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찾는다는 행동도 일반 대중의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다는 의미이구요. 저는 예술가와 아마추어의 생체리듬을 찾는 공동의 프로젝트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이 행해지길 바라고, 그런 가운데 진정한 에너지가 사회의 힘으로 쌓이는 과정을 보고 싶은 겁니다.
전효관: 어떤 과정과 사례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부연해서 설명해주세요.
박신의: 새로운 예술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네요. 흔히 새로운 예술하면 형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지만, 저로서는 작품 제작의 방법, 작품 감상의 방법, 작품이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법, 작품이 소통하는 경로의 문제에서 새로운 접근을 갖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현대미술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을 감상한다는 개념은 매우 약화되었지요. 현대미술의 혁명은 개념 예술, 즉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예술이 등장하면서 주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어요. 예술가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주고 대중들이 참여하면서 작품을 같이 만들어 가는 개념이 가능하지요. 현재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만날 수 있는 개념미술의 한 사례를 들어볼께요. 공원에 가면 헤드폰이 걸려있고, 누구나 헤드폰을 끼면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와 공원을 산책하도록 가이드를 합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실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헤드폰에서 동일한 바람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립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무심코 지나는 바람소리를 의식적으로 듣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목소리는 오른편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 멈춰 왼편 아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따라하면 그 아래에서 자그마한 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죠. 이렇듯 예술가는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어떤 ‘주의력’을 제공합니다. 그 주의력이 사회의 모순을 읽는 주의력이 되고, 휴머니즘을 헤아리는 주의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가끔 예술가들을 정의할 때, ‘주의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주의력이 왜 중요한지, 왜 그것을 존중해야 하는지, 한번 같이 생각해 볼까요?
전효관: 현실적인 딜레마가 있을 수 있지요.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버린 공간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해야 하고, 그런 교육을 해줄 예술가의 결합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특히 문화예술교육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말이죠.
박신의: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개념과
철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방안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리라 봅니다. 학교 교육이 바뀌면서 가능할테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예회관, 문화의 집 등의 문화기반 시설을 통한 교육, 공공성을 살린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등이 모두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에는 기획자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봐요. 최근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인력풀을 만든다고 하던데,
인력풀을 직접적인 교육자로서 예술가에 집중하지 말고, 매개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자가 포함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전효관: 문화교육,
예술교육 명명법이 다르고, 그 명명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요. 관객 개발의 입장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부터 교육개혁의 맥락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도 있지요.
박신의: 저는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을 나누는 입장에는 전적으로 반대입니다. 전문인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고, 대중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은 예술
개념을 전통적인, 혹은 모더니즘적 구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예술인을 위한 교육도 매우 중요하지요. 그것은
한 사회의 경쟁력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문인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교육 자체로 전제된다는 것은, 교육 개념에서
대중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이 문제를 새로운 예술에서 풀었지만,
실제로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문화예술교육, 즉 대중을 새로운 예술행동의 주체로 유도하면서 도시문화를 바꾸는 것, 문화환경을 바꾸는
것도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강의식 개념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제 수업은 일종의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고 봐요. 다시 말하면 프로젝트는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협업으로 생각을 바꿔가고 현실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해 가는 것이지요. 문화예술교육의 프로그램을 고민할 때에도
‘프로젝트’ 모델을 고민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에 대해서라면, 뭔가 모험을 하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육의 효과가 엄청난 것임에도, 그것을 통해 전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감히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예 이번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위험한’ 일을 저질러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생체리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이에요.
전효관: 현실적으로 사회적 사실로는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를 접근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언젠가 선생님과 같은 토론회에서도 문화의 민주주의, 예술의 질 문제 이런 것이 쟁점이 되었지요.
박신의: ‘문화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프랑스 문화정책에 기조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도 전문 예술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술이 바탕이 되고, 예술이
사회화되는 것이 문화이며, 그 문화가 사회적, 제도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문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만일 이것이 편의적으로 해석되면 예술의 힘을 배제할 수 있다고 봐요.
직업적으로, 제도적으로 전문가와 아닌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갖는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화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여야 한다고 봅니다.
전효관:
사회 참여를 통해서, 정책 개입을 통해서 느끼시는 점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박신의 : 저는 정책평가위원회에서 정부 업무와 정책에 접하면서 궁극에는 모든
사회문제가 ‘문화적으로’ 밖에는 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카드대란이나 유해식품, 청소년 범죄와 모든
사회문제들이 언제까지 형사처벌 강화로만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외교력과 통일의 문제도 문화적 접근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난 주말에 KBS TV를 통해 일본의 한류 열풍을 르포르타주한 프로를 아주 인상깊게 보았는데, 그런 실질적인
문화현상과 교류가 노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만난 현실 정치적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화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회의 치유를 이루어보자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인식 수준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저는 문화는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기득권자들, 혹은 진정한 좌절감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문화는 여전히 향유할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라도 대중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문화가 마음에 닿아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기대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효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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