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사진2007. 7. 11. 11:00

현 대 사 진 의 길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 영역: John E. Bowlt | 영문중역: 양현미



보리스 쿠쉬너(Boris Kushiner)의 “공개 편지”에 대한 답변인 이 논문은 로드첸코가 사진을 통해 시각적 사유방식을 “혁신”시킬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매우 정교하게 진술해 놓은 것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관이 지각상의 습관들과 회화형식의 관례들로 인해 어쩔 수없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뒤흔들어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줄 시각적 충격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사진이 회화로부터 물려받은 시각적 전통들은 도시화된 기술적인 세계를 묘사하는데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카메라만이 동시대의 삶을 반영할 수 있다”라고 로드첸코는 주장한다. 로드첸코는 그의 목표가 개인적인 사진예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신문사진의 변혁을 고무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광범위한 관중에게 새로운 시각적이고 지각적인 습관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쿠쉬너에게

당신은 “상향시점(from below up)과 하향시점(from above down)”에 관하여 흥미로운 문제를 지적했으며, 이러한 사진의 시점들이 나에게 “전가되어온” 만큼(만약 Sovetskoe foto지의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해도 좋다면), 이에 응수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실 나는 다른 모든 시점들보다 이러한 시점들의 사용을 지지하는 바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모든 나라의 미술사나 회화사를 보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회화들이, 약간의 극히 작은 예외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배꼽 높이나 눈 높이에서 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화와 원시 회화들에서 외관상 받은 인상을 새의 시점으로 간주하지 말아라. 많은 인물들을 담을 수 있도록 수평선을 올려놓은 데 불과하며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눈 높이에서 제시되어 있다. 함께 보면 전체는 현실에도 새의 시점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위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각각의 인물은 정확하게 정면 시점과 측면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그들은 인물 위에 인물이 놓여있지 사실주의 회화들에서처럼 인물 뒤에 인물이 놓여있지 않다.
중국 미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그들은 한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어떤 대상의 가능한 모든 사선들(declivities)은 운동의 순간(단축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관찰의 시점은 언제나 중간 높이이다.
사진이 실린 오래된 잡지들을 살펴보라─그러면 당신은 똑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가끔 다른 관점들을 접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에 불과하다. 가끔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새로운 시점들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 잡지들을 많이 사며 사진을 모으지만, 이런 종류의 사진은 전부 합쳐서 약 36점 모았을 뿐이다.
이런 위험한 스테레오타입 뒤에는 인간의 시각적 지각을 교육시키는 편향되고 인습적인 관례, 시각적 이성의 과정을 왜곡하는 일방적인 접근방식이 놓여있다.
회화적 창안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Vereshchagin의 회화1나 Denner의 초상화들2처럼 처음에는 어떤 것을 “실물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욕망이 있었다─그들은 프레임 밖으로 막 기어 나올 것 같았으며 피부 구멍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화가들은 칭찬 받기는 커녕 “사진가” 같다고 비난받았다.
회화적 창안의 두 번째 길이 세계에 대한 개인주의적이며 심리학적인 관념의 뒤를 이었다. 정확하게 동일한 유형의 변형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벤스 등의 회화들에 묘사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사용했고, 루벤스는 자신의 아내를 사용했다.
세 번째 길은 양식화, 회화를 위한 회화였다: 반 고호, 세잔,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그리고 마지막 길은 추상, 비대상성이었다: 그때 사실상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관심은 과학적인 것이었다. 구성, 질감, 공간, 무게 등.
그러나 새로운 시점, 원근법, 그리고 단축방법을 탐색하는 길들은 전혀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회화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AKhRR3의 견해대로라면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아직 어느 누구도 시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사진─새롭고, 신속하며, 구체적인 세계의 반영체─은 반드시 세계를 모든 관점에서 보여주고 모든 방면에서 볼 수 있는 국민의 능력을 계발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사진은 이것을 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때에 “회화적 배꼽”의 심리학이 시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현대의 사진가를 꾸짖고 있다.
그것은 Sovetskoe foto의 “사진-문화의 경로들”과 같은 사진잡지의 무수한 논문들을 통해 성모와 백작부인들을 그린 유화 같은 모델들을 제공하면서 그를 가르치고 있다.
만약 대천사, 그리스도, 그리고 군주들의 구성에 능한 세계의 권위자들이 제시한 사례들로 인해 시각적 이성이 방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소비에트 사진가 또는 기자를 갖게 될 것인가?
내가 회화를 버리고 사진을 시작했을 때, 나는 회화가 자신의 무거운 손으로 사진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당신은 현대 사진의 가장 흥미로운 시점들이 하향시점과 상향시점이며 배꼽 높이가 아닌 다른 것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사진가는 회화로부터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기가 힘들다. 나의 사고과정은 시각적이며, 단편적인 아이디어들만 떠오른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에 관해 쓴 적이 없었으며, 사진, 그것의 임무와 성공에 관한 논문은 하나도 없다. 모홀리 나기(Moholy-Nagy) 같은 좌파 사진가들 조차 “내가 작업하는 방식”, “나의 길” 등과 같은 개인적인 논문을 쓴다. 사진잡지의 편집자들은 화가들을 초빙해서 사진의 발전에 관해 글을 쓰게 하고 있으며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신문사진가들을 다룰 때도 아둔하고 관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문사진가들은 그들의 사진을 사진잡지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으며 사진잡지 스스로 일종의 미술계(Mir iskusstva, The World of Art)4로 변화하고 있다.
Sovetskoe foto에 실린 나에 대한 편지는 우스꽝스러운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사진에 투하된 일종의 폭탄이다. 나를 깎아내리면서, 그것은 또한 새로운 시점들을 사용하고 있는 사진가들을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다.
Mikulin이 대표로 있는 Sovetskoe foto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너희들은 “로드첸코처럼” 작업하고 있으며 따라서 너희의 사진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문화화되어 있는가 보여주기 위해, 잡지들은 현대 외국 사진가들의 사진 한 두점을 싣고 있다─미술가의 사인도 없고 출처도 명시하지 않고 말이다.
이제 본래 문제로 되돌아가자.
다층건물들로 이루어진 현대도시, 특수하게 디자인된 공장들과 설비들, 2층이나 3층 규모의 상점 창문들, 전차들, 자동차들, 조명장치가 된 표지판과 간판들, 쾌속선들과 비행기들─당신이 자신의 『서구에서의 103일(On Hundred and Three Days in the West)』5에서 그토록 멋있게 묘사했던 그 모든 것들이─시지각의 평균적인 심리학을 바꾸어놓았다(약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카메라만이 동시대의 삶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적 합리성이라는 구시대적인 법칙들은 사진을 그들과 동일한 복고적 원근법을 지닌 일종의 낮은 등급의 회화, 에칭, 또는 판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 힘 때문에 미국에서 68층 건물 사진을 배꼽 높이에서 찍게 된다. 그러나 이 배꼽 높이는 34층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접해 있는 건물 안으로 기어올라가 34층에서 68층짜리 거인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만약 인접한 건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동일한 정면의 부분적인 광경을 얻게 된다.
길을 걸어갈 때 당신은 건물들을 위로 쳐다본다. 위층에서는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들과 보행자들을 내려다본다.
당신이 전차 창문이나 자동차에서 힐끗 바라보는 모든 것, 당신이 극장의 청중석에 앉아 내려다 볼 때 얻게 되는 광경─모든 것이 고전주의적인 “배꼽” 시점으로 변형되거나 정돈되어 버린다.
그가 맨 위층 관람석에서 『Uncle Vanya』를 내려다 볼 때, 관객은 그가 보는 것을 변형시킨다. 그의 마음 속의 중간-시점(mid-view)에 따라 『Uncle Vanya』는 실제의 삶처럼 전개된다.
내가 파리에 있으면서 에펠탑을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6 그러나 버스를 타고 매우 가까이 지나갔을 때 나는 창문을 통해 철근으로 된 저 선들이 좌우로 위로 뻗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시점은 나에게 그것의 규모와 구조에 대한 감동을 주었다. 배꼽 시점은 당신이 본 모든 엽서에 지겹게 찍혀있는 달콤한 얼룩같은 것을 제시해 줄 뿐이다.
당신 은 공장의 모든 것을 자세하게─안에서, 아래로, 위로 조사하는 대신 왜 공장을 멀리서 그리고 중간 시점에서 보려고 애쓰는가?
현실에서 원근법이 왜곡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카메라 자체가 원근법을 왜곡하지 않게 되어 있다.
만약 거리가 좁아서 옆으로 물러날 공간이 없다면, “법칙들”에 따라 당신은 아마도 렌즈가 있는 카메라 앞면을 들어올리고 뒤를 기울일 것이다 등등.
이 모든 것은 “알맞는” 투시원근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들어 비로소 일명 아마추어 카메라들에도 광각 렌즈들이 사용되게 되었다.
수백만장의 스테레오타입 사진들이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들 간의 유일한 차이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좀더 성공적이거나 어떤 것은 에칭을 모방했거나 다른 것들은 일본 판화를 그리고 나머지들은 여전히 “렘브란트” 작품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건들을 담은 사진들은 신문사진이라고 불리는 반면, 풍경, 두상, 나체여인들을 찍은 사진들은 예술사진이라고 불린다.
신문사진은 저급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응용사진, 이런 저급한 종(種)이 사진에 혁명을 일으켰다─잡지와 신문 간의 경쟁을 통해서, 사진에 필수적인 많은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종류의 빛과 모든 시점에서 어떻게 해서든 사진을 찍는 것이 필수적인 순간에 이를 수행함으로써.
이제 새로운 투쟁이 생겨났다: 순수사진과 응용사진 간에, 예술사진과 신문사진 간에.
사진-보도에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역시, 바로 이런 진정한 활동 속에서도, 스테레오타입과 거짓된 리얼리즘이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놓았다. 나는 야유회를 갔다가 기자들이 춤을 각색하고 그림 같은 일군의 사람들을 언덕에 배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림 같은” 무리에 서둘러 끼여든 소녀들이 어떻게 차에 숨어서 그들의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했는지 재미있다.
“자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주제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사진가가 아니라, 카메라에 잡히는 것이 주제이다. 그리고 사진가는 회화의 법칙에 따라 올바른 자세를 그에게 제시한다.
여기에 『Die Koralle』라는 잡지에 실린 사진 몇 장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연대기, 한편의 민족지, 하나의 기록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가가 따라오기 직전까지 이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으며 자기 자리에 있었다.
사진가가 그들을 갑자기, 모르는 사이에 찍었다면 그가 포착했을 장면들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모르는 사이에 사진을 찍는 것은 어렵다. 반면에 포즈를 잡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빠르고 쉽다. 그리고 당신의 고객도 오해를 하지 않게 된다.
잡지들에서 당신은 작은 동물들과 곤충들을 실물 크기보다 더 크게 확대해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를 그들에게 가깝게 들이댄 사람은 사진가가 아니다.
카메라에 등장한 것은 그들이다.
새로운 사진의 주제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의 전통에 따라 찍히고 있다.
모기들은 배꼽 높이에서 레핀의 Zaporoahtsy8의 회화적 법칙에 따라 찍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는(see)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쳐다보는(look at) 관점에 따라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인 대상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플라흐(Flach)의 다리에 대해 쓰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꼽 높이에서 찍힌 것이 아니라 지표면 높이에서 찍힌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당신은 카우프만(Kaufman)과 프리드리앤드(Fridliand)의 슈코프(Shukhov) 라디오 타워 사진들이 나쁘다고, 타워들이 정말 뛰어난 구조물이라기 보다는 빵바구니를 닮았다고 쓰고 있다. 나도 정말 동의한다. 그러나..." 만약 대상이 새롭고 당신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면, 어떤 시점이라도 대상의 진정한 모습을 침해할 수 있다.
프 리들리앤드만이 여기에서 실수를 범하고 있지 카우프만은 아니다. 카우프만의 사진은 다양한 시점에서 타워를 찍은 여러 개의 프레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러한 광경들은 움직인다. 카메라가 돌고 타워 위에서 구름들이 떠다닌다.
Sovetskoe foto는 “사진-회화”가 마치 독특하고 영원한 어떤 것인 양 이야기한다.
정반대이다. 우리는 마치 주제를 포위하기라도 하듯이─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여러 개의 다른 시점에서 그리고 다른 사진에서는 다양한 위치에서 주제를 찍어야 한다. 사진-회화를 만들지 말고 기록적 (예술적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사진-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요약하면, 사람들이 새로운 시점에서 보는데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친숙한 주제들을 완전히 예기치 못한 관점에서 그리고 완전히 예기치 못한 위치에서 찍는 것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주제들은 또한 주제의 완전한 인상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찍어야 한다.
끝으로 나는 나의 주장을 예시해줄 수 있는 몇 개의 사진들을 동봉한다.
나는 일부러 같은 건물의 사진들을 골랐다.
첫 번째 것은 미국 앨범 『아메리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진들은 가장 스테레오타입의 방식으로 찍혀져 있다. 그들을 찍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인접한 건물들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정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모두 올바른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 미국을 이런 식으로 보도록 키워졌다.
실제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동일한 건물의 두 번째 세트의 사진들은 독일 좌파 건축가 멘델슨(Mendelsohn)9의 것이다. 그는 거리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직한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 소방수가 있다. 매우 사실적인 시점이다. 만약 당신이 창문을 내다본다면 그를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얼마나 충격적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사물들을 자주 쳐다보지만 그들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쳐다보는(look at) 것을 보지(see)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의 특이한 원근법들, 단축법들, 위치들을 보지 않는다.
평범한 것, 용인된 것을 보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은 시각의 세계를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적 논법을 혁신해야 한다.
“배꼽 시점을 제외한 모든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 전부 수용될 때까지.”
“그리고 오늘날 가장 흥미로운 시점들은 그러한 하향시점과 상향시점 그리고 그들의 대각선들이다.”

8월 18일, 1928년



1 Vasilii Vasilievich Vereshchagin(1842~1904), 사실주의 화가이며 세부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한 전쟁 장면과 민족지적인 구성으로 유명했다.
2 Balthasar Denner(1685~1749)는 정확하기로 유명한 초상화가이자 미니어처 화가였다. 그는 살색을 묘사하기 위해 초상화에 특수한 유약을 사용했으며 이런 이유에서 “Porendenner”라는 별명이 붙었다.
3 AKhRR: The Association of Artists of Revolutionary Russia. 혁명러시아예술가연맹
4 World of Art는 1890년대에 Sergei Diaghilev와 Alexander Benois가 성페테르스부르그에서 이끌던 일군의 미술가들, 미학자들, 작가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은 장식미술에 특별한 관심을 쏟음으로써 러시아 미술의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하려고 하였다. 이 단체는 The World of Art라는 이름으로 잡지(1898~1904)를 발견했고 일련의 전시들(1899~1906)을 조직했다. 1906년에 시작된 분열을 겪은 후에, 동일한 이름을 견지해온 그룹이 1910년~24년 동안 전시 활동을 재개했다.
5 Boris Kushner는 묘사들과 일화들을 담은 이책, Stotri dnia na Zapade을 1928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했다.
6 1925년 3월 19일~6월 10일 까지 이루어졌던 로드첸코의 파리방문은 국제장식미술엑스포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럄oratifs와 같은 시기였다. 그는 소비에트관을 위해 노동자의 독서실을 디자인했다. 파리에서 보낸 그의 편지들은 Novyi lef, no.2(1927)에 실렸다.
7 Die Koralle는 베를린에서 1925년~41년에 출판된 도판이 있는 대중적인 과학잡지였다.
8 The Zaporoahtsy(1878~91)는 사실주의자 Ilia Efimovich Repin(1848~1930)이 그린 화려한 회화로서 Zaporzhe Cossacks가 터키의 Ottoman이 그의 제국과 연합하자고 청하는 것을 거절한 일화를 그린 것이다.
9 Mendelsohn에 대해서는 pp.221(출전)의 상단을 보시오.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51&showPublishNo=4&page=1&whichPage=1&writer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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