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1.27.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의 Framework - '교육과정'과 문화예술교육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의 명암

김선아 (한양대 교수)


1. 들어가며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무엇을 담고 있을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이 있다. 반면에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현실 속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떤 파급 효과를 가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교육과정이 문화예술교육에서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마술적 힘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점검해야 할 것은 공식적 교육과정이 문화예술교육에 가져올 수 있는 불행과 희망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에 과연 교육과정이 필요한가?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수립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을 수립함으로써 혜택을 받는 것은 누구인가? 누가 문화예술교육의 교육과정을 원하는가? 혹은 원하지 않는가?

본 연구는 비판교육학과 예술교육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토대로 교육과정의 성격과 예술교육의 역할을 살펴보고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가지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문화예술교육에 있어 단일화된 혹은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과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나름대로의 필요성과 가치를 지닌다는 대립된 입장을 가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각들을 탐구하여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2.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무용론


명제 1. 다양성과 맥락성을 가지는 문화예술교육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보편성, 합리성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의 수립은 가능하지 않다.


문화예술교육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맥락적인 차원에서 개별적인 경험에 기초하는 반면, 교육과정은 보편성, 합리성,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문화예술에서 문화와 예술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이것이 단순히 문화와 예술의 병렬된 개념인지, 교집합인지, 아니면 온전하게 통합되어 문화교육 혹은 예술교육과 구별되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 용어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에 관한 교육과정을 수립한다는 것이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1) 공식적 지식


교육과정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논의하다보면, 사람들 간에 서로 다른 교육과정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분명한 교육적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위한 교육의 내용을 구성하여 명시한 것이 공식적 교육과정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르쳐질 때에는 의도하지 않는 것이 학습되기도 하며, 교육과정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신념, 가치, 태도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공식적 교육과정은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명료한 내용 체계를 중심으로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합리주의적 논리에 따른 교육과정은 단순하고 명료해 보일지라도, 현장에서 적용될 때에는 괴리감과 모호함이 나타난다.

잠재적 교육과정은 교육 문화 혹은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를 통하여 경험적으로 체득되는 사회화, 가치, 문화적 관습, 권위에 대한 복종, 계층구분의 강화 등에 관심을 둔다. 교육과정은 그것 자체로 전달되고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들 즉 교육의 주체들에 의해 선택되며 해석되고 내재화되는 것으로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특히 교육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학습자 자신의 신념, 가치, 경험에 비추어 주관적으로 표현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문화예술교육의 특성상 잠재적 교육과정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 목표를 미리 선정하고 이에 따른 지식을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이에 반해 예술교육은 비구조적인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연성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식 구성이 필요하다. 

문화예술을 구성하는 지식 영역들은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에 목표지향적인 교육과정이 얼마나 의미 있는 방식으로 문화예술의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존재론적 측면에서 문화예술교육은 현 시대와 역사의 지평에서 “지역 공동체와 세계와 소통하며, 개인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고 구현하는 전 과정 자체를 교육의 과정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신승환, 2007: 105). 이와 같은 삶의 역동성을 담은 문화예술교육을 몇 가지의 핵심 요소로 추출된 공식적 교육과정으로 박제화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2) 합리성의 함정


공식적 교육과정은 사실과 합리적 방식에 기초함으로 ‘권위’를 가지게 되며, 분명한 사회적, 개인적 목적을 통하여 정당화된다. 교육과정의 합리주의적 절차는 다양성과 맥락성을 상실한 교육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기능한다. 공식적 교육과정의 문제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이 합리적인 교육과정의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표지향적으로 만들어지고 제안된 교육과정과 교수학습 자료들이 전제하고 있는 합리성엔 함정이 있다. 교육과정의 패키지 속에 녹아 있는 효과성과 통제의 언어는 명백히 비판보다는 복종을 부추긴다.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 창의적 인재, 배려와 나눔의 인성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으나 이러한 인간상이 구현되는 방법이나 사회문화적 맥락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학교와 사회의 구조 속에서 예술을 통하여 가치의 문제를 고민하고자 하는 문화예술교육에서 교육과정은 만들어진다고 해도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정한 지식을 공식적 교육과정으로 조직하는 것은 중립적일 수 없다. 교육과정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지식이 가치가 있는지를 선별하고 분류하여 체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지식의 경중과 위계를 구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문화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규범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을 수립한다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성격과 모순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정책적 노력과 담론이 확산된 배경에는 형식주의와 심미주의에 제한된 예술의 개념을 확장하고 사회ㆍ문화적 관점에서 확대하고자 한 지속적인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동연(2007)은 문화예술교육의 실천과제가 경제적, 정치적 지배 논리에 의하여 위상이 위축된 예술교육의 상황을 비판하고 예술의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이 형식주의에 머무르거나 사회 모순을 예술로 형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이 교육적 활동을 통해서 사회와 직접 소통하며 모든 사람이 예술을 통하여 자기성취를 이루도록 하는 문화교육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합리성으로 무장한 공식적 교육과정의 역할이 지식과 교육적 경험을 파편화하고 계층화하였음을 고려할 때, 문화예술교육을 공식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으로 구조화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접근되어야 한다.


3.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당위론


명제 2. 문화예술교육은 현 시대에 교육적(pedagogical) 목적을 가진 사회적 노력으로서 이를 공유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교육과정은 마땅히 수립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그것이 교육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방식 혹은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교육과정의 본질적인 목적을 구현하는 데 생기는 다양한 장애와 한계점들이 교육과정 자체를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1) 도구적 차원


Eisner(2007)는 교육적 문제에 있어 완전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의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시도하면 이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적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문제에 대하여 관심과 집중을 기울여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방향이나 비전 없이 아무 것이나 즉흥적으로 해 보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교육적 지향점에 따른 비전을 세우고 이를 실체로 만들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교육과정은 그 자체로 완벽한 학문적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비전과 이념을 구체화하고 이것이 교육적으로 실천되도록 하는 도구로 보아야 한다. 또한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성격과 내용을 구상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가는 과정에서 교육과정은 유용한 담론 형성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문화와 예술이 아직 내적으로 통합되지 못하였고, 예술 장르의 경계 안에서 교육과정이 다루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문화예술을 아우르는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는 문화예술교육의 인문학적 기반에 대한 사고를 심화한다.

Eisner(2007: 191)는 교육과정을 “마음을 변화시키는 장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교육과정 개발은 예술교육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 지향점, 열망 등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것들을 실제화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이 정형화된 사고를 주입하는 학교 교육에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신념,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삶을 충족시킬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있다는 믿음이 실제로 그러한지 탐구하고 검증하는 도구로서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기능할 수 있다.


2) 실천적 차원


공식적 지식을 토대로 한 교육과정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Apple(2004: 85)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 교육과정은 저항적이고 억압당한 집단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진보적인 교육 운동이 분열되고, 교육 운동가들이 지역이나 주 단위의 차원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학교의 재정상태와 관리체제 속에서, 국가 교육과정은 이 집단들을 연합할 공통 의제가 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은 무엇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규정하는 체계가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대하여 공동의 목적을 구성해가는 의사소통을 위한 공식적 제도가 되어야 한다.

교육과정이 다양한 교육 주체들 간의 의사소통을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이론과 실제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의 개발은 현장을 수정하고 바로잡기 위한 이론적 처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론화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때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은 실천을 성찰, 개선할 수 있는 기본 구조로서 기능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이론가와 실천가의 연합이 요구된다. 문화예술교육의 교육과정은 사회와 교육을 변혁하는 기제(agency)로 기능할 수 있으며, 이는 실천에 대한 반성과 함께 행위에 대한 이론화 과정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4. 나가며


문화예술교육이 가지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사회, 문화, 정치, 교육, 예술, 철학의 인문학 전반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성격일 것이다. 이는 곧 시각과 가치의 충돌과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며,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간편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희망을 생각하는 것은 문화예술교육과 그 주체들이 가진 ‘교육적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교육과정에 대한 Eisner(1983)의 책은 세 가지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어디쯤 와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문화예술교육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이와 같은 성찰이 문화예술교육의 틀을 마련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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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0.2.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에서의 인간 이해 - '인간'과 문화예술교육


!느낌과 ?물음의 과정
- 예술교육에서의 인간 이해

김성희 (서울대 교수)


1. 들어가며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삶을 표현하고 삶을 넘어서기도 하는 예술은 그 예술이 형성된 각각의 문화를 대변한다. 문화는 지속성과 상황성을 포함하며, 지역성과 시대성을 반영한다. 결국 문화는 포괄적인 인간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를 식물로 본다면, 예술은 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꽃의 총체적인 아름다움에 이 지상의 생명체들이 모두 감응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결국 모든 생명체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내포한다. 그것이 없이도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지만 단지 ‘생존’의 수준이고 더 ‘상향上向’된 개체를 생성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도태된 상태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꽃에서 ‘아름다움’은 생존을 위한, 그것도 상향된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건인 것이다.
인간의 오감을 감응시키며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은 문화의 총체적인 DNA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이 없이도 생존은 가능하다. 단지 인간 삶의 상향된 생존이 불가능할 뿐이며, 거시적으로 보면 소멸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의 각박한 삶에서 예술은 항상 경제논리에 밀려나며 여유가 있으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일 뿐이다. 그러나 식물들을 보라. 그들이 척박한 땅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 기름진 땅이라면 보다 크고 화사한 꽃을 피우겠지만, 척박하다고 하여 아름다운 꽃을 생략하지는 않는다.
인류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오늘날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린 때는 역사상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풍요만큼 생존의 위협도 커지고 있다. 생존을 위한 경제성만을 적용시켜 나간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경제성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화학적 변화가 필요하고, 이러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분야가 언뜻 가장 비경제적이라고 인식되는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추구되고 있는 ‘창의성’으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에 내포된 ‘근본적 변화’는 오감과 연결되는 ‘아름다움’의 겉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겉옷인 동시에 인류가 추구하는 방향을 지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육에서도 예술은 여타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오늘날은 더욱 비중 있게 추구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이 글에서는 예술과 예술교육의 특성을 느낌과 물음의 과정으로 집약하였다.


2. !느낌의 과정


느낌은 생명체의 살아있는 감각이자 모든 창의적 가능성들과 예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의 과정은 생명체로서의 인간 삶의 과정이자 예술 실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 느낌을 갖는 인간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느낌을 가지며 살아간다. 느낌의 상태에서는 몸 감각들이 하나하나 열려 활성화되고, 통합적으로 작용하며 직관적 성향을 드러낸다. 느낌은 일차적으로 감각기관과 관련되므로 나의 외부적 환경에서 촉발되는 경우와 내적인 작용으로 스스로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모두 ‘관념성’에 매이지 않아야 만날 수 있는 세계임에는 분명하다. 즉, 느낌의 세계는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적 체험이 중요하다.

예술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 ‘느낌’에서 시작된다. 동아시아의 걸출한 화가 스타오(석도石濤, 17세기)는 감수성(感受性:받아들여 느낌)이 분별의식(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의식적 작용) 보다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창의적 사고에 대한 연구자 팀 허슨Tim Hurson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성적 성향의 창의적 사고는 비판적 사고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존의 분별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틀’ 즉, 관념성으로 느낌에 접근한다면 창의성과 결부된 진정한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물리학자인 파인만 Richard Phillips Feynman은 문제를 풀지 않고 ‘느꼈으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수단
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느낌의 시작은 나의 관념성을 거부한다. 바로 이는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추구해온 ‘무아無我’, ‘허심虛心’, ‘좌망坐忘’, ‘물아일체(物我一體:대상과 내가 하나가 됨)’의 상태와 같은 맥락이다. 나를 형성해 온 기존의 틀을 벗어나 세상 속에 나를 투
여한다. 이러한 투여는 관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관이 생생하게 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체험’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라고 인식되어온 모든 사고의 틀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상태에서 비로소 한 생명체의 특성이 온전히 발현되기 시작한다. 느낌에 진입하는 순간,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창작도 시작된다.
창의성은 과거의 기억과 함께 상상과 미래로 향한 추론을 한순간에 강력하게 통합하여 방대한 정보량을 처리하는 능력이다. 창의성 연구로 유명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ly Csikszentmihalyi는 “일반인의 상태와 달리 창의적인 사람들은 매우 예민한 감정을 느낀다”라고 언급한다. 이 예민한 감정이 느낌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은 생명체가 살아있는 생생한 실존의 감각이며, 창의력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면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지점이자 예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뇌로 느끼는 인간


일반적으로 좌뇌는 몸의 오른쪽을 통제하고 분석적 ․ 순차적 기능과 함께 논리 ․ 연산․ 시간감각 ․ 언어능력에 관련된다. 반면, 우뇌는 몸의 왼쪽을 통제하고 종합적․ 동시적 기능과 함께 감정표현 ․ 문맥 ․ 공간감각 ․ 예술적 감각 ․ 큰그림 ․ 창의성에 관련된다. 이처럼 좌뇌와 우뇌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므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양 쪽 뇌의 균형 있는 활용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뇌는 좌뇌라고 생각해 왔다. 즉, 우뇌는 메이저 뇌인 좌뇌를 보조하는 마이너 뇌로서의 역할에 불과하다고 믿어온 것이다. 이러한 좌뇌 중심적인 사고는 서구에서는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뿌리 깊다. 현재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사회적 지각변동에 힘입어, 수천년 지속되어 왔던 좌뇌 중심의 역사도 바뀌고 있다.
뇌의 역할과 중요성은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우뇌가 가장 활성화되는 영역으로는 예술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우뇌의 중요성에 대한 인지와 함께 예술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루트번스타인 Root-Bernstein 부부는 ‘느낌’과 좌․우뇌 통합적 역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창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첫째, ‘느낀다’는 것이다. 이해하려는 욕구는 반드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느낌과 한데 어우러져야 하고 지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상력 넘치는 통찰을 낳을 수 있다.


3. ?물음의 과정


예술적 실행은 흔히 일순간에 번뜩이는 영감의 소산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느낌의 세계로만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느낌들은 그 이전의 축적된 느낌들과 함께 수많은 ?물음들의 소산이기도 하다. 느낌은 오랜 축적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서의 느낌은 오랜 축적의 상태를 0(無)로 돌리는 ?물음의 과정을 겪으며 만나게 된다.


1) 성찰하는 인간


관찰은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파악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현대화가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은 “내 작업은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그 관계와 자신의 형성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일상의 당연함 속에 매몰될 것이다.
무언가를 관찰한다는 것은 우연히 마주친 사건일 수도 있고, 나의 의도가 작용하는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적 사건에서 ‘내가 주목한다’라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속에 나의 오랜 ‘추구함’이 숨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관심을 끈다는 것은 이미 내 속에 그와 연관된 씨앗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음을 던지며, 바로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과정이 없다면, 그 문맥을 연결하여 행위의 필연성을 찾을 수 없다면 진정한 창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창출이기도 하다. 지식은 무언가를 깨닫는 행위에서 창출된다. 무언가를 깨닫고 이해하는 행위와 예술행위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에릭 부스는 “나는 예술행위가 무언가를 깨닫고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했다. 예술행위는 학습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학습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지름길의 하나일 수 있다.

2009년 이후 새로운 체제의 교양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하버드대학교의 교양교육 General education 목표는 다음과 같다. “하버드 교육은 자유교육 Liberal Education 이다....... 자유교육의 목적은 추정을 뒤흔들어 놓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의 저변과 이면에 어떠한 것들이 존재하는지를 규명하고, 젊은이의 감각을 혼란시키며 그들이 스스로 방향감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자유교육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설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자기 성찰을 유발하며,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가르치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역사적 계기와 문화적
구성물들과의 만남에서 낯선 경이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미 설정한 정의들을 뒤흔들고, 낯설게 보며, 원점에서 시작하는 예민한 감각의 상태에서 ?물음을 던지며, 성찰하고, 비판적․분석적 시각을 가지며, 모든 상황성에 대해 낯선 경이감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예술행위와 예술교육이 추구해 온 인성의 방향이자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나이젤 비거 교수는 물질적 유용성과 결부된 실용주의와 공리주의를 중심에 둔 오늘날의 교육방향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과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예술과 인문학이 가져다주는 비할 바 없이 귀한 선물은 그것이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 이러한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얻는 이익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낯선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보고, 사랑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에 대해 성찰하면서 우리는 때때로 그들이 ‘좀 더’ 잘 보고, 사랑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갱신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의 개혁 못지않게 중요하다.”
?물음의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낯설고 모호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술은 이러한 용기를 기꺼이 가질 수 있도록 실제적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2) 정체성을 가진 인간


예술을 실행하는 사람은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그 관계와 자신의 형성에 대한 ?물음과 성찰의 과정에서 예리하게 날을 세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존재론적인 측면을 내포하며, 현전 presence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인지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가장 첨예하게 표현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화상들이 수없이 제작된 것도 이를 반영하는 점이다.

자신을 ‘바로 바라보기’는 솔직한 자세와 물음, 성찰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고 그것을 표현했을 때, 자신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그 표현은 스스로 개성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로 바라보기’에 따른 표현에서는 그 결과물에 대한 ?물음 - 자신의 형성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된다. 그 형성에는 무수한 상황들이 있어왔으며, 그 상황들의 만남이 ‘지금’, ‘여기’로 집약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맥락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뜻하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형성한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찾는 관점이 열리는 것이다.


3) 더불어 사는 인간


우리의 근대 이후는 자신을 솔직하게 ‘바로 바라보기’보다는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타자 바라보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솔직히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타자 바라보기’에서는 자신도, 타자도 진정한 이해와 인정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느끼고, 자신이 속한 문화의 유일무이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타자와 타자가 속한 문화의 유일무이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이러한 조화로운 화합을 위한 삶의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근대기 냉혹한 무력의 세계를 몸소 체험한 가운데 김구 선생이 마침내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이었고, 우리 민족이 이러한 문화의 힘을 스스로 창출하는 민족이 되어 세계의 진정한 화합에 기여하기를 추구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예술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해 나이젤 비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술과 인문학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 낯선 세계를 잘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 겸손함과 부드러움, 관용을
가지고 낯선 개념들과 관행들을 만날 수 있게 하고, 낯선 세계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먼저 그쪽으로 다가서게 한다. 그
것들은 ‘타자’를 잠재적인 예언자로, 즉 무엇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지에 관해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사람으로 존중하는, 정직 한 대화를 실천하게 된다.”
예술을 통해 자신을 만나는 과정은 타자를 만나는 과정으로 연계되며,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그 범위가 확대되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 이는 결국 나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생태적 삶의 공간을 돌아보게 하므로, 근본적으로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한다. 예술의 통로를 통해 우리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나와 전혀 다른 별개의 개체들이 아니라 나와 끊임 없이 교류하고 있고, 나를 형성하는 세계이며, 근원적으로 인간이 돌아가야 할 세계임을 체험하며 !느끼는 과정에 들 수 있다.

4. 열린 마음과 창의적 표현의 인간


!느낌을 갖는 단계에서 이미 자신은 열려있게 된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긴밀한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물음을 갖는 단계에서는 설정된 규정들이 혼란스럽게 흐트러지며 무화 無化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비판적 성향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과 긍정이 함께 작용하며 이마저도 ?표 속에 넣어둔다. 예술은 느낌을 열어주고, 모호함의 세계 속에서 그 느낌을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실행해 보게 한다.
이러한 실행의 과정들 속에서 하나의 개체와 그 개체의 관계망을 인지하게 되고,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력이 형성된다. 즉, !느낌에서 ?물음의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은 하나의 개체가 전체를 향해 원심력과 같이 열려나가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감각이 열릴 뿐만 아니라,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열린 마음의 세계에서는 정체되거나 축소된 상태와 달리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물론, 예술을 체험하면 당연히 지고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을 표현하는 가운데 보다 자
유롭고 자연스러우며, 충만한 상태로 조금씩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은 이러한 표현들을 자유롭고 즐겁게 시도해 보게 한다. 학습해야 할 ‘숙제’나 정답을 맞추어야 할 ‘문제’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내밀한 ‘일기’에 가깝다. 거기에는 규정된 답이 없다. 모든 답은 자신에게 있음을 느낀다. 진솔하게 다가갈수록 모호함의 세계에서 언뜻 드러나는 한줄기 길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개성과 창의성, 조화와 소통능력 등은 바로 이러한 열린 마음과 표현의 상태에서 발현되는 하나의 측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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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0.2.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에서의 인간 이해 - '인간'과 문화예술교육


미학적 인간과 의미론적 인간

_신승환(가톨릭대학교)


1. 머리말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약 2,500년 전쯤 '이해 체계'라는 커다른 전환이 있었다. 세계와 자연, 인간과 다른 인간, 역사화 문화, 사회와 삶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행위. 이것은 지식이나 진리란 이름으로, 때로는 앎과 직관으로, 또는 믿음의 체계와 신념으로 형상화 되었다. 인간이 지닌 앎과 이해의 과정, 스스로의 지성과 스스로에서 이 모두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생물학적 인간을 문화적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지성적 노력 일반을 우리는 철학이라 이름한다. 철학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자기이해 self-understanding 의 과정이다.

철학이 말하는 최종 근거와 근원은 결국 진선미가 일치하는 데 자리하며, 이것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이루어가는 인간의 자기이해 과정이 곧 인간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철학과 윤리, 예술은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본질적 이해 노력의 과정에서 일치하며, 그에 대한 재현의 방식에서 차이를 지닌다.

철학과 예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이해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만 철학은 이 과정에서 어떤 지서적 능력으로 문제의 역사를 추적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과 구별된다. 또한 근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관점에서 객체적 지식을 말하는 과학과 다르지만, 근원에 대한 체험과 재현이란 관점에서는 예술과 같은 지평에서 만나게 된다.

근원에 대한 체험과 그에 대한 존재의 의미론적 재현이란 관점에서 철학과 예술은 같으면서 다르다.(동일성과 차이) 서구의 전통은 철학과 예술의 동일성과 차이를 진리 이해와 인간의 지성적 특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객체적 진리와 존재론적 진리, 이성과 감성의 구별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미美의 현상, '아름다운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구한 미학  Aesthetics은 “감성적 인식의 학문”을 가리킨다. 진선미에 관계하는 인간의 이해체계를 지성과 감성, 의지의 세 분야로 구분하여 다룬 전통은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것처럼 논리학(이성), 윤리학(의지와 행위), 미학(감성의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아름다운 것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미학은 그리스어 아이스테시스, 즉 감성, 감각적인 직관, 그 현상에 관한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학은 지각 aisthesis, 즉 감성적 지각에 관한 학문이다. 

예술교육은 예술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예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 존재에의 이해와 해석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2. 인간의 자기 이해


1)

그 시대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표상은 언제나 그 시대정신과 관련하여 거듭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금 주어진다. 새로운 이해와 사유의 패러다임이 제시될 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인간상을 표상하고, 그로써 그 시대정신을 재현하는 것이다. 시대란 시간이 그때마다 '현재'(지금-여기)로 재현된 모습이다.

현재란 지평에서 형성된 인간의 자기이해, 그 안에는 보편적 인간이해와 함께 현재의 지평에서 다르게 이해되는 인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2)

인간은 일차적으로 '사이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 사이, 출발과 완성 사이에, 공간적으로 우주와 이곳 사이, 육체적으로 욕망과 이상 사이, 감성과 이성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그의 정신과 의식은 생명의 첫 시작에 근거하면서도 또한 신적인 영성을 향해가는, 그 사이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모순된 존재이다. 하늘을 바라보지만 땅 위에 자리한 존재, 욕망에 매여 있지만 그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졸재, 이성의 원리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감성의 움직임에 마음을 기울이는 존재이기에 그는 근원적으로 모순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주어지는 근원적인 중간자적 상황과 모순성을 내적으로 매듭짓고 자신 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이를 넘어서려는 과정에서 자신을 이루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영원히 교육받는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 paideia 개념은 어떤 주어진 원리와 객체적 지식을 주입하고, 외적 목표를 향해가는 훈육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이루어가는 양성으로서의 교육을 의미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지평은 주어진 조건과 역사적 경험이며, 미래를 향하는 초월성인 것이다. 주어진 역사적 경험, 초월성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시간은 '지금, 여기' hiter nunc란 시간적 지평으로서 현재이기에, 인간의 자기이해는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이해와 해석의 행위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그를 위한 존재론적 성찰을 의미한다.


3)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과 한계, 근원적 모순성에 의해 실존적으로 불안하고 허무한 존재이면서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며 이를 구현하는 충만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근원적 의미 추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의미론적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타자, 우주와 역사에 의해 관계지어져 있는 존재이다. 관계 안에서 인간은 타자에 연결되어 자신을 이해하며, 타자의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인간은 궁극적으로 책임의 존재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계와 책임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윤리 ethics라 이름한다. 윤리란 한 사회의 관례적 측면 Ethos과 개인의 실존적 열정 Pathos을 조화시키면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에 있다.


4)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정신을 채현하는 보편적이고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의 인간 이해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자신이 지닌 능력, 특히 이성과 계몽된 정신으로 세계와 자연에 맞서는 진보적 인간상으로 재현되었다. 근대를 극본하고 이를 넘어서 새로움을 향해 가려는 시대적 요구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은 어떻게 재현되는 것일까.


3. 미학적 존재


1)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진리와 선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와 함께 인간은 진선미에 관한 질문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면서,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결정해 간다. 인간의 자신의 이해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결정되는 존재이기에인간은 이해하며 해석하는 존재이다. 생물학적 층위를 넘어 인간을 이해한다면, 그는 이러한 존재론적 의미 지평에 자리한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이러한 존재론은 인간이 지닌 지성적 능력, 이성 logos-nous, rationality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이 근대에 이르러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을 얻는 인식 이성으로 규정됨으로써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은 이성을 넘어서는 존재성이란 사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성과 감성은 물론, 인간이 지닌 초월적 지평에 관계하는 영성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미학적 이성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학적 이성에 의한 인간의 존재성은 심미적 이해를 자신의 존재에서 이끌어내는 존재,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특성, 미학적 존재 homo aestheticus라 이름할 수 있는 특성일 것이다.


3)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독특한 심성이다. 예술은 다만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 의해 표현되고 재현된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예술적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근원에 흐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과 그에 대한 재현, 그 안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같은 근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인간이 그것을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이해하고 재현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아름다움에의 체험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존재 이해이며, 작품은 그것이 재현된 결과이며 형상인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은 다만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 영역, 역사의 경험과 세계와 자연에 대한 이해, 자신의 존재와 초월적이거나 성스러운 것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재현하는 존재이다.

인간을 미학적 존재라 정의하는 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란 의미를 넘어서 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의미체험과 의미구현의 존재성을 재현하는 존재이다. 미학적 존재란 말은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의미성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은 물론,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재현하는 존재란 의미이다.


4. 구원과 해방의 예술


1)

예술은 다만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통해 재현하는 인간의 의미 체험과 의미 구현, 존재성의 재현이란 층위를 넘어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듯이 예술은 스스로 자신을 이루어가는 포이에시스 poiesis적 행위에서 이해된다. 창작 행위를 뜻하는 테크네 techne는 포이에시스적 행위가 인간의 산출적 행위로 구체화된 한 가지 형태이다. 테크네는 자연을 변형하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행위이기도 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감추어져 있다. 진리는 기꺼이 자신을 감춘다. 테크네로서 예술은 이러한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그러한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술은 무의미함과 허무함, 헷갈림과 혼돈을 넘어 의미의 세계를 재현하는 행위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은 그러한 죽음을 예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죽음을 현재화하고 죽음을 내재화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행위가 예술로 드러난다. 예술은 인간의 실존성을 떠나 주어지지 않는다. 예술은 자신의 한계와 모순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예술이 아름다움에 대한 이론이 될 때 미적 체험과 표현은 사라지게 되고, 인간의 실존성은 재현되지 않는다. 이때 예술은 종말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되고,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으로 자리하게 될 때, 예술은 종말에 처해지게 된다.


2)

후기 산업사회를 사는 현대의 위기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예술이 종말에 처해졌다는 데 자리한다. 예술의 근원적 체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만 기술행위만이 흘러넘치게 된다. 예술이 다만 자본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에 충실할 때, 그러한 예술은 죽은 예술이 될 것이다. 인간의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진리 추구와 의미 세계, 초월성을 망각할 때, 그를 채현하는 예술은 위기로 함몰되는 것이다.

존재의 위기가 극대화된 근대의 시대정신은 예술을 다만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서만 이해하려 한다. 그와 함께 예술은 순수 예술로,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 규정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럴 때 예술의 철학은 미학으로 규정되거나, 예술 감상이나 비평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시대는 예술의 삶의 자리를 상실하고 순수예술, 전문가를 위한 예술로 자리한 시대와 일치한다.

미학은 인간의 예술행위를 단순히 미의식의 표현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현재의 위기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진리 추구와 의미 세계, 초월적 지평을 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존재의 위기는 예술과 철학의 위기를 의미한다. 단순히 테크네를 현대 기계문명의 테크닉으로 이해하며, 참된 가치를 상실하고 단지 물질과 기계 문명으로 이 모든 것을 대치시킬 때, 인간과 그의 세계는 본질적인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때 인간의 존재론적 지평은 위에 처해지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구원과 해방은 예술을 떠나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구원과 해방의 예술로 자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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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09.12



발달의 원리


인간의 발달과정을 연구해 온 학자들은 인간 발달에는 특정한 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 발달의 상호작용성 : 발달은 개체의 내부적인 힘인 유전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힘인 환경적인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발달은 성숙과 학습의 소산인 것이다.

- 발달의 분화.통합성 : 발달은 초기의 전체적이고 미분화된 기관, 기능이 점차 부분적이고 특수적인 기관, 기능으로 분화되어가는 동시에, 그 분화된 기관 또는 기능은 전체적으로 종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체제로 통합되는 과정을 밟는다.

- 발달의 순서, 방향성 : 신체 및 운동기능의 발달은 물론이고 언어나 지적인 발달도 일정한 순서와 방향이 있다.

- 발달의 적기성.결정적 시기성 : 기능의 특성에 따라서 가장 적당한 발달시기에 많은 성장과 발달이 이루어진다. 이는 일정한 성장.발달에는 최적의 시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 발달의 연속성.점진성 : 신체적 발달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정서 등의 정신적 발달은 비약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어느 시점에서의 발달이 기초가 되어 그 후의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발달의 개별성 : 모든 인간은 보편적인 순서에 따라 발달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발달을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차가 있다. 발달에는 성차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발달의 상호관계성 : 개인의 신체적, 지적, 사회적, 정서적, 도덕적 영역의 발달 각 측면은 상호간에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특정 영역의 발달에 장애가 나타나게 되면 다른 영역의 발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 발달 초기단계의 중요성 : 생의 초기단계인 영아기, 유아기, 아동기까지의 발달은 비교적 급속한 속도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단계의 성장.발달을 좌우한다.


※ 발달의 결정적 시기설 및 발달 초기단계의 중요성과 관련하여서는 보다 유동적인 관점이 존재한다. 발달의 연속성의 경우 교육과정 편성에 반영되어 온 발달 단계라는 개념과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피아제나 프로이트 등 발달심리 연구에 큰 영향을 준 초창기 연구자들은 인간의 발달이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며, 특정 시기가 되면 이전의 단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단계로 이동한다고 보았다.)


발달 과정에 대한 이론들


현대의 발달학자들은 인지발달이 일반적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일반적이고 어느 정도 특수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신 피아제 학파는 여전히 일반적인 속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는 발달의 생물학적 영향과 사회문화적 영향이 서로 상호작용을 이루는 관계라는 통합적 관점이 주류를 이루지만 전통적으로 발달 과정에 대한 축을 형성해 온 이론들은 여전히 고려할 여지가 있다.


1) 발달 단계


발달 단계는 일정한 연령기에 도달하면 그 전후 시기와는 구별되며 그 시기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을 기준으로 인간의 생애를 몇 개의 시기로 구분한 것이다.


발달 단계의 개념은 다양하게 정의되고 발전했는데, 특히 인지적, 정서적, 도덕적, 감정적 측면을 주목하는 발달안은 통합적 문화예술교육의 수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참고할 면이 있다.


발달 단계에 대한 연구들은 인간이 발달함에 있어서 특정 시기에 각각의 분야에서 어떤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피아제의 발달 단계에 대한 이론이 오늘날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교육에 있어서도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가운데 하나이다. 미술교육분야의 대표적 발달론자인 로웬펠드는 피아제의 '시각적 경험을 통해 구성된 지식' 개념을 창의력 개념과 연결시켜 시기를 구별하며, 롯친스는 감상능력 발달 단계에 대해 논의하였다. 짐머만은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을 음악교육에 적용시켜 음악 인지적 특징을 연령별로 나열하였으며, 등등등


2) 발달에 있어서 사회문화적인 영향


피아제와 같은 발달 단계 이론은 인간의 발달을 개인적인 성장에서 바라보며, 마음 혹은 정신은 집단이나 사회에 있지 않고 독립적인 개인의 뇌에 있다고 보고 있다. 다른 연구자들은 인간의 사회문화적 관계가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피아제와 동시대 학자인 비고츠키의 연구는 인지 발달에 있어서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현대 발달심리학에서 인문학,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

비고츠키 심리학은 인간의 발달이 하위의 과정에서 상위의 과정으로 단계에 의해 발달한다고 믿지 않으며, 다만 문화에 의해 발달의 자연적인 측면이 재구조화되고 재조직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발달은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비고츠키는 발달의 종착점을 문화적으로 적절한 실제를 향한 사회문화적 학습의 발달로 보았다.


비고츠키는 발달이란 언어 학습에서 추론한 사회적 기호의 획득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의 내면화를 통한 사회적 학습의 결과로 일어나는 인간의 독특한 활동이라고 믿었다. 비고츠키는 발달 단계를 하위 단계와 상위 단계로 나누어 보았으며, 하위 단계는 자연적으로 발달하지만 상위 단계는 문화 도구의 습득을 통해 내면화됨으로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비고츠키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 기능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만 개인의 정신은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의 유산인 문화는 비고츠키 심리학에 있어서 내면화 과정을 통해 개인을 성장시키고 상위의 정신형식을 획득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비고츠치의 이론에서 생물학적 나이와 관련된 발달 단계는 중요하지 않다. 비고츠키에게 있어서 학습은 항상 사회적 맥락에서 일어나고, 지식과 발달 역시 이에 의존한다. 또한 학습은 문화화의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기호학적 매개 역할을 하는 언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


통합적 인지발달을 고려한 문화예술교육



문화예술교육의 수준 설정


- 문화예술교육의 수준 설정에 있어서 생물학적 발달과 사회문화적 과정은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 학습자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인지적 발달과 정서적, 감각적 요소들이 통합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 문화예술교육은 학습자를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해 나가는 발달 주체로 간주하고 문화적이고 개인적인 특수성 및 다양성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 문화예술교육은 각 영역의 세부적인 특성에 따라 결정적 시기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소통을 통한 발달의 측면에서 학습자의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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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제,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 서양철학의 역사를 움직인 주요개념 80

생각정원, 2012


3장. 인식편 : 존재 중심에서 사유 중심으로
코기토 / 자아, 주체 / 실체, 대상/ 관념 / 연상 / 감각 / 개념 / 이성



코기토 cogito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는 생각, 즉 사유의 문제로 집중된다. 코기토는 그 자체로 항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안인가가 의식에 떠올랐을 때 의식에 떠오른 내용을 표상(재현 represent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언가를 의식에 떠올리는 것을 '표상한다(재현한다)'고 한다.
반성을 왜 하느냐? 알든 모르든 뭔가 일이 잘못되면 반성을 수행한다. 그렇게 해서 잘못된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생각을 왜하느냐 하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는 코기토가 삶에 있어서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일러준다. 결국에는 생각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행동에는 감각과 운동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어 삶 자체와 삶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즐겨 향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과 주변 환경이 일치되지 않을 때,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때면 저절로 생각이 솟아오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라면, 그만큼 그 사람이 복합 다층적이라는 뜻이다. 복합 다층적일수록 다양한 의미와 효과를 일구어낼 수 있고, 또 그런 만큼 인생을 훨씬 더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다.

'반성적' 코기토
'비반성적 non-reflexive' 혹은 '선반성적 pre replexif'인 코기토


자아 ego, 주체 subject

자아는 개인으로서 인간 삶의 제반 활동을 떠받치고 있는 바탕이다.
자기 self는 3인칭적인 것이고 자아 ego는 1인칭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는 자아가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 이른바 객관적으로 자성 自性 ipseity을 지니는 데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주체는 활동의 주체다. 활동하지 않을 때 주체는 자아로 가라앉는다고 할 수 있다. 자아가 활동을 하게 되면 주체로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활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자아의 활동 방식에 따라 주체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 철학 이후에는 대표적으로 '경험적인 주체 empirical subject'와 '초월적인 주체 transcendental subject'로 구분한다. 경험적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라고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경험적인 주체는 항상 지금 여기의 상황 속에서 존립하는 대상을 마주한 채 그 대상과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에 몰두하는 실재적인 주체다. 초월적인 주체는 논리적이고 가상적인 주체, 이론적으로 상정되는 주체이다. 칸트는 모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바탕이 바로 이 초월론적인 주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초월론적인 주체의 근거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이른바 반성적인 코기토다.
경험적 주체의 활동을 보면 그 바탕에서 작동하는 자아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자기 동일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자아는 얼마든지 그 속에 타자성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자아로서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형태의 주체들 중 몸 주체가 가장 근원적이라고 여긴 메를로 퐁티는, 각각의 자아가 이미 늘 모든 다른 자아들이 교차되면서 수시로 새롭게 형성된다는 의미노 “각각의 나는 모든 다른 나들의 교차점'이라고 했다. 자아가 무조건 '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서 성립하는 자기 동일성을 지닌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런 '순수 자아'보다 오히려 '분열된 자아'가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인 자아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실체, 대상

실체는 존재 관련 개념이고, 대상은 인식 관련 개념이다.
데카르트 이전에는 오브젝툼이 주체고 수브젝툼이 대상이었다. 존재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 인식 중심의 사유 체계로 바뀌면서 이 둘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존재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는 아래에 놓여있는 것이 존재, 즉 사물의 존재인데 반해, 인식 중심의 수유 체계에서는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 인식 주체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존재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는(아리스토 텔레스) 실체와 대상이 짝이 아니라 실체와 속성이 짝이다. 실체는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은 항상 실체의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파생적인고 이차적인 것이다.
칸트 이후 후설의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실체는 궁극적인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실체를 실체이게 하는 의식을 더 궁극적인 존재로 여기게 된다.
'대상화 objectification'라는 말을 나쁜 뜻으로 쓰는 이유는, 대상은 수동적이고 타율적이고 타성적이고 도구적인 수단에 불과한 반면, 주체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이고 활성적이고 도구를 활용하라는 라는 이분법적인 사유 때문이다. 그런데 'object'라는 말이 '반대한다”라는 뜻을 갖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주체에 대해 반기를 들고 그 나름의 권리를 주장하는 개념이다.

대상, objectum : 앞에 던져진 것
주체, subjectum : 아래에 던져진 것
실체, substance : 아래에 놓여있다.


관념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 관념이다. 근대 철학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은 바로 관념들의 출처 내지는 원천을 둘러싸고 나뉘게 된다. 합리론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 있다고 주장했고, 경험론은 모든 관념이 궁극적으로는 감각적인 경험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타고나는 관념을 본유관념,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생겨나는 관념을 외래관념이라고 했다.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단순 관념은 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성격만을 갖는 것이고, 복합 관념은 단순 관념들이 적어도 둘 이상 결합된 것을 말한다.
경험론자 버클리는 'esse est percipi 사물은 지각된 내용 자체다'라고 했다. 이를 관념에 연결해서 해석하면, 사물은 '관념들의 다발 bundle of ideas'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래서 관념론이라고 한다.
관념들의 체계를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연상 association

'연합작용'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연상'은 바로 관념들이 체계를 이루는 데 기본 바탕이 된다. 관념들은 다른 관념들과 결합되어 복합 관념을 형성함으로써 가치와 효력을 지니게 된다.
흄은 지금 당장 지각을 통해 얻고 있는 관념은 인상이라고 하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나 기억을 통해 다시 떠올리는 희미해진 인상을 관념이라고 한다. 연상이란 바로 관념들 간의 인력이 정신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상이 근본적으로 주체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체도 어찌할 수 없는 정신의 근본적인 힘이 작동한다는 것인데, 그 바탕에 관념들 간의 자발적인 연상이 작동하는 것이다.
나의 정신에서 연상의 힘이 얼마나 넓고 깊게 발휘되는가가 상상력의 위력을 결정한다. 교육에서도 이런 연상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뛰어난 상상력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일을 바탕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가능성을 미리 예상해서 대처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금 여기에서 주어지지 않은 새로운 일을 창안하여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감각 sensation

지성주의 혹은 합리주의는, 이 감각은 참된 인식을 하는 데 중요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근대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일체의 본유관념은 없고 오로지 외래관념인 감각이야말로 모든 인식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감각을 오로지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결국 문제는 감각과 사물의 관계다. 감각적인 성질이 결코 인간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을 벗어난 저쪽 세계에 진짜로 존재한다고 여긴 철학자가 바로 바로 사트르트와 메를로 퐁티다. 이런 입장을 '객관적 감각주의' 내지는 '감각론적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다.
감각을 가장 중시하는 영역은 예술이다. 디자인은 바로 여러 감각적인 내용을 배치하는 것이다.
왜 인간은 감각들이 잘 배치된 상태를 즐기는 것일까? 칸트에 따르면 감각들이 잘 배치된 순수한 형식들을 바탕으로 해서 미감적 판단이 성립한다고 핬다. 우리 인간에게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인식의 욕망과, 가능하면 가치있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도덕의 욕망이 있는가 하면, 이들 욕망을 넘어서서 순수 감각적인 배치를 즐기고자 하는 미감적인 욕망이 있는 것이다.

지성주의 : 합리주의자, 기계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주관적 감각주의 : 영국 경험론자,
객관적 감각주의 :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들뢰즈


개념 concept

철학적으로 볼 때 개념은 일종의 관념이다. 감각적인 관념이 개별적인 관념인 것과 달리 개념은 보편적인 관념이다. 거칠게 말하면 모든 학문은 개념들을 잘 정의하고 그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잘 엮어서 이론화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그 상황에 원리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경험적인 개념은 흔히 보통명사라 불리는 것들로 표기된다. 그리고 범주적인 개념들은 흔히 추상명사라 불리는 것들로 표기된다. 철학의 기초 개념들은 대체로 범주적인 개념들이다. 동일성, 차이, 인식, 존재,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 주체와 대상.
칸트는 “감각적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감각적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한 바 있다.
사유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인 관념들에 대해 개념들을 활용해서 보편적으로 질서를 짓는 것이고, 나아가 주어진 개념들의 복합에 대해 또 다른 개념들을 활용해서 보편적으로 질서를 짓는 것이다. 사유의 대상이 되는 감각적인 관념들을 사유에 제공하는 것이 바로 지각과 상상이다.
데리다는 차연 differance, 즉 차이를 바탕으로 계속 의미가 결정되지 않고 연기된다고 했다. 이 차연 개념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이다. 하나의 낱말을 쓰임새를 벗어나서 뜻을 가질 수 없고, 또 쓰임새에 따라 계속 조금씩 뜻을 달리할 수밖에 없으르로 동일한 본진적인 뜻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이다.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개념은 있을 수 없고, 각자가 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독특하게 만들어간다고 하는 입장이 바로 실존철학적인 입장, 정확하게 말하면 현존철학적인 입장이다. 현존주의는 근본적으로 본질주의와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성 reason

보편적인 개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논리적 이성이다.
선결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그 자체로 참으로 주어지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직관적 이성이다.
직관과 추론의 능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직관과 추론만으로는 인간의 인식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관심이다. 어떤 관심을 갖고서 직관하고 또 추론하는가에 따라 인식되는 내용이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심은 삶의 가치와 직결되어 있다. 관심은 인생 전반의 태도와 직결된다. 이때 관심은 대단히 포괄적이고 기초적인데 이를 일컬어 세계관이라고도 말한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 중 하나는 이성 능력과 감각 능력 및 상상 능력 간의 관계다. 논리적인 이성에 대해 근본적인 재료를 제공하는 것은 직관적인 이성이다. 그런데 직관적인 이성이 직관하는 대상 영역은 결국 감각적인 영역이다. 감각 능력과 상상 능력이 부족하면 도대체 직관하는 이성이 발휘될 근거가 없어진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가 득세하면서 이성은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이때 비판받는 이성은 감각의 근원성을 망각한 이성이요, 그래서 감각이 흐름으로써 자아내는 차이의 근원성을 무시한 이성이요, 개념으로써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이성적인 질서에 따라 피라미드 형태로 위계를 세우는 이성이요, 무엇보다 이런 이성을 악용하여 오로지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사용되는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이다.
'예술 문화적인 혹은 인문 예술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사회적 분배'야말로 우리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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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

*인지학 (人智學;Anthroposophie, Anthrophosophy)




*루돌프 슈타이너:

  사고와 경험은 끊임없이 발달할 수 있는 것
  가시적인 물질세계와 비가시적인 물질세계 연계



*발도르프 교육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창한 교육 사상 및 실천으로 독일에서 시작된 대안교육의 일종


(지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서부터 출발. 개별 아이들은 정신과 감성, 신체의 조화로운 토대 위에 성장.

개별 학생을 고려한 전인교육

신체와 정신적 성장에 맞춘 의지, 감각, 사고의 조화로운 발달


사회적으로 책임을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

- 창의성과 사회성


  인지적, 도덕적, 실용적 재능 발달이 모두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노작교육이나 예술교육 등이 교육내용의 상당 부분 차지

  발도르프 교육에서 예술교육을 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적 자유를 획득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임.

 


-특징: 남녀공학, 에포크수업, 전인교육, 성적이 없는 성적표, 교과서 없는 수업, 외국어수업의 발달, 자치행정


  1. 발달과정에 맞춰진 교육: 영유아기(0-7세) / 아동기(8-14세) / 청소년기(15-21세)의 단계에 따라 물질체, 생명체, 감성체, 자아라는 4가지 구성체를 가지고 있음.



 영유아기(0-7세)

 신체, 영혼, 정신이 통일

신체가 비약적으로 성장

 모방 욕구 - 좋은 본보기(모방할 만한 물리적, 심리적, 도덕적 환경) 제공

 아동기(8-14세)

 신체-영혼, 영혼-정신으로 분리

영혼이 가장 크게 변화

 내적 지각을 통해 권위에 따름 - 8년 담임제

 청소년기(15-21세)

신체, 영혼, 정신이 완전히 분리

자신만의 판단, 추상적인 개념, 논리적 사고 

권위를 느끼지 못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 - 교사는 조언자, 아이드 역할 담당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B%8F%84%EB%A5%B4%ED%94%84_%EA%B5%90%EC%9C%A1


  2. 8년 담임제

  3. 에포크 수업: 주기집중수업, 동일한 과목을 매일 2시간(오전 8시-10시) 정도 3-6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공부(언어와 예술 제외), 맘각도 학습의 한 과정

  4. 오이리트미: 조화로운 리듬, 내면의 소리를 몸으로 나타내는 것, 몸으로 해석된 대화와 노래, 

오이리트미는 일반 무용과 달리 심리적, 영혼적, 정신적 기능을 강조한다. 인간의 정신-영혼-육체 3가지를 조화롭게 결합시키며 인간과 공간, 인간과 우주의 관계까지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오이리트미를 인간의 호흡, 혈액 순환과 연관된 인간의 질적이고 내적인 활동과 관련되어있다고 보았다.


오이리트미는 전 학년의 필수과목이다.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진 단색의 오이리트미 의상과 실내화를 착용하고 연주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오이리트미 또한 학생의 발달과 성장을 고려하여 수준이 점차 복잡해진다. 저학년 학생들은 간단한 움직임으로 구성된 오이리트미를, 고학년 학생들은 시, 드라마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 오이리트미를 표현한다.


  5. 교과서: 교과서를 통한 수업은 학생들의 창의성을 제한하고 교사가 같은 내용일지리도 수업을 새롭게 구성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교과서가 없다. 때로는 수업 때 학생들 개개인이 작성한 노트가 교과서가 되기도 한다.


  6. 성적표: 평가하지 않고, 각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서 성취한 내용을 성적표에 기재한다.  

 

  7. 졸업시험: 고유의 시험, 졸업 이후 학생들의 지향점 제시, 주제 서술(필기), 텍스트 이해와 자기 표현(이해력), (졸업논문), (졸업논문 발표)


  8. 자치행정: 발도르프 학교에는 교장이 없고 교사들의 자치 행정에 의해 학교가 운영된다. 


발도르프 교육 교과과정의 결정적인 원리는 수업내용과 수업형태의 확정이 아이들 배움의 과정과 유년기와 청소년기안에 있는 인간발달의 단계에 그 중심이 있다는 것이다. 수업은 학교시작부터 인간내면의 자유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슈타이너 학교 [Steiner Schule]

1919년 독일의 교육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자유 발도르프 학교'를 세우면서 탄생한 자유학교.

 

슈타이너는 인간이 육체·영혼·정신의 3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탄생에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약 20년 동안 3단계로 나뉘어 성장하고 자아가 독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아가 독립하는 시기까지 각 단계에 맞는 교육을 전개하고, 아이들의 생각과 능력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 교육의 특징으로는, 첫째, 618세의 12년간 시행하는 일관된 교육, 둘째, 34주일 동안 한 교과에 집중하는 에포크(epoch : 근본적인 변화나 특기할 만한 사건 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시대·시기) 수업, 셋째, 18학년은 같은 교사가 담임하는 8년 담임제도, 넷째, 점수를 부여하지 않는 평가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20개국 이상의 나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도 슈타이너의 교육이념이 도입되었지만, 아직 교육현장에는 정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모든 학생들은 12학년을 유급 없이 공부를 하게된다. 모든 발도르프 학교의 교육과정(계획)은 아이들의 정신과 영혼적인 소질과 재능을 중심으로 하고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를 위하여 (그러하기 때문에) 1학년부터 일반적인 과목과 함께 다양한 예술적인 수업들이 시작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각각의 인간들과 사회를 위한 중요한 창조적인 능력과 체험력이 촉진되게된다. 교과과정(계획)의 중요한 부분은 또한 도덕적(윤리적)-종교적인 형성이다. 종교수업은 각기 종파의 또는 그리스도공동체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행하여진다. 자유롭고 기독교적인(초교파적인) 종교수업은 학교의 교사를 통하여 제공된다. 수공수업은 (6학년부터) 자신 의지활동의 세련화와 실제적인 것에 대한 성취를 통하여 인간 삶의 실제적인 방향설정을 위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행하여지도록 한다.

 

6학년 오케스트라

8학년 야외 목공예 : 수공구,

 

 

 

 

 

:

크리스토퍼 클라우더 : 마틴 로슨, 아이들이 꿈꾸는 학교, 양철북

프린스 갈그렌: 아르네 클링보르그, 자유를 향한 교육, 섬돌출판사

루돌프 슈타이너, 발도르프 학교와 그 정신

토린 핀서, 8년간의 교실여행, 과천자유학교출판국

고야스 미치코, 독일의 자존심 발도르프 학교

고야스 미치코, 슈타이너학교의 참교육이야기, 반디

고야스 미치코, 슈타이너학교의 예술로서의 교육, 밝은누리, 2003

 

단체:

한국 발도르프교육협회 http://www.waldorf.or.kr/

*인천발도르프학교 (홈스쿨링?)

201232일 개교

*양평 슈타이너 학교

20092월 개교

전인적인 발달을 중시하는 발도로프 교육을 기반으로 하여 비장애 아동과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장애아동이 함께하는 통합학교

인간발달 7년 주기설, 기질론과 7단계 배움과정, 12감각론과 아동관찰법

*동림자유학교

*사과나무학교: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

*푸른숲발도르프학교

*구름산발도르프학교 (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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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비정규학교

프리스콜레와 애프터스콜레

시미즈 미츠루(일본 그룬트비협회 간사)

@녹색평론 124호(2012년 5-6월)


민중운동을 통해서 만든 학교


  프리스콜레는 19세기 중엽부터 덴마크사회를 변화시킨 민중운동과 더불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교육이라는 행위가 사회로부터 떨어져서 학교라는 공간에서 순수배양하듯이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는 점이다.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 운동은 사회의 비위에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살아갈 수 있는 생산, 소비 그리고 생활의 터전을 만드는 교육운동이다. 프리스콜레로부터 시작하여 애프터스콜레로 이어지고, 호이스콜레에서 배우는 아이들은 자유나 표현, 창조, 삶의 언어로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의 소중함을 배우며, 결코 타인을 제치고 저 혼자 득을 보려고 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프리스콜레, 애프터스콜레, 호이스콜레 운동들과 나란히 68년 세대들이 만든 혁신적인 학교나 그 이전부터 있었던 슈타이너 학교 운동이 개별적으로 전개되면서, 대안적인 교육이 공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 의무교육


  - 취학 의무가 없고, 스스로(학교를 가지 않고) 배울 권리가 있다.

  - 중학교 1학년까지는 시험이 금지되어 있다.

  - 한 반은 28명 이하로 법에서 정하고 있으며, 한 반의 전국 평균은 19명이다.(1994)

  -공립학교의 교육에 불만이 있거나 공립학교가 재정 등의 문제로 폐쇄되었을 경우, 새로운 사립학교를 만들어도 된다.

  - 행정당국은 사립학교의 경비의 75%를 보조해야 한다.

  - 사립학교의 교원은 교사자격이 없어도 되고 아무나 할 수 있다.

  - 전학은 자유롭고 학군제도가 없다.

  - 공립학교, 사립학교 공히 이사회가 운영한다. 공립학교의 경우 통상 12명이 이사회에 2명의 학생대표를 위원으로 참가시킬 의무가 있다.

  - 10학년까지 있고,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의무교육 기간을 10년으로 할 수 있다. 반수 이상의 아이들이 10학년까지 진급한다.

  - 공립, 사립 구분 없이 방과후 초등학교 4학년 이하의 아동들이 모일 수 있는 시설을 가진다. 전임교원이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러 올 때까지 맞는다.


사립학교의 종류


  국민의 20% 이상이 사립학교에 다니는데, 그 학교들 중 대다수가 폴케호이스콜레 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룬트비와 콜의 교육방침에 기초한 프리스콜레이다. 1993년 현재 193개 학교에 1만 3,929명의 학생이 다닌다.

  엘리트교육의 장인 '레알스콜레'는 39개교이지만, 한 학교당 수백 명 규모이기 때문에 학생 수는 프리스콜레보다 많다. 교과교육이 중심이고, 김나지움이나 대학으로 이어지는 학문적인 교육이 특색이다.

  68 세대들이 만든 '리레스콜레'의 특징은 자유, 반권위, 혁신이다. 이 외에도 가톨릭 계통, 독일인 사립학교, 이슬람 계통과 슈타이너학교가 있다.


프리스콜레의 특징


  프리스콜레에는 한 반이 평균 11명의 학생이 있다. 교과과정의 자유도가 높아서 각 학교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창조적인 과목(음악, 미술, 도예, 목공, 금속공예, 염색, 무용, 신체표현, 연극, 덴마크 체조 등)들을 중시한다. 그룬트비와 콜의 '살아있는 말' 사상을 계승하여, 반드시 '말하는 시간'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공립학교도 마찬가지) 교과서는 각 교사가 적절한 것을 골라 정한다. 학교가 책을 소유하고 학생들에게 대여해주는 경우가 많다. 수업시간은 60분, 90분, 30분으로 학교에 따라 다르다. 교사는 처음 10분 정도 설명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그룹끼리 작업하게 하고 각 작업에 대해 조언을 하든지 복습을 시키고, 그 사이에 개인지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는 대학이나 폴케호이스콜레, 혹은 '덴마크 교원 호이스콜레'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다. 세 과목 정도 담당하는 데, 담임을 맞는 반을 가장 많이 담당하고, 덴마크어는 반드시 담당한다.

  담임을 한 번 맡으면 학년이 바뀌어도 계속 그 반의 담임을 맡아서, 교사와 학생은 보통 7년, 중학교 과정까지 있는 곳이면 9년간 같은 반에서 생활하게 된다.

  프리스콜레는 원칙적으로 시험이 없다. 체계를 강요하지 않는 프리스콜레 운동의 자유로운 측면은 여기도 적용이 되는데, 시험을 치는 학교도 늘고 있고, 레알스콜레 수준으로 빡빡한 교과과정을 도입하기도 한다.

  다만 졸업할 때에는 의무교육 과정을 마쳤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국가시험을 치른다. 스스로 공부해온 아이들도 이 시험은 쳐야 한다. 각 지방의 교육담당관의 인가를 받아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시험을 실시한다.


국가가 아니라 부모와 교원들이 만드는 교육


  프리스콜레의 가장 큰 특징은, 부모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의 주체라는 사상이다. 처음 콜에 의해 1851년에 최초의 프리스콜레가 뤼스링에 만들어졌는데, 그때의 슬로건이 '국가로터 아이들을 되찾자'였다. 정부의 간섭 없이 자신들이 스스로 자치적이고 자주적인 교육을 시행한다는 자세로 '프리스콜레'(자유학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부모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학교 일을 직접 하고 있다. 운영은 부모나 지역의 대표로 구성되는 이사회가 맡는다. 교원 대표로는 교장이 참가할 뿐이다. 예산 등은 모두 부모들이 참가하는 총회인 '스쿨서클'에서 결정한다. 이 총회가 최고 결정기관으로 이사는 이 안에서 선출된다.

  재정합리화 등을 이유로 작은 학교가 폐쇄되거나 큰 학교에 통합되는 경우, 학교의 교원과 부모들은 프리스콜레를 만들기 위해 이사회를 조직하고 스태프를 모아서 신청서류를 만든다. 재정적으로 25% 적자 상태로, 또 시설의 확충, 정비 등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등 결코 순탄한 길은 아니지만 넘치는 의욕이 있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 애프터스콜레


  현재 덴마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고, 또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애프터스콜레이다. 애프터스콜레도 콜에 의해서 창설된,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학교이다.  애프터스콜레는 의무교육 단계의 제8학년과 제9학년 그리고 덴마크의 독자적인 제도인 제10학년의 학생들이 다니는 기숙형 중학교로, 의무교육의 마지막 1년을 애프터스콜레에서 보내게 된다.

  애프터스콜레는 반항심과 독립심이 왕성하지만 아직 판단력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은 애매한 시기인 15~16세의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학교이다. 자신의 그때까지의 생활방식이나 부모와의 관계를 상대화하여, 보다 자립심을 기르고 성숙한 젊은이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애프터스콜레는 시험도 없고 성적평가도 중시하지 않는 '삶을 위한 학교'라는 그룬트비-콜의 전통을 따르는 학교이기 때문에, 문제학생들이 다니는 이류학교라는 사회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고도산업사회에서의 청소년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된 것이다.


애프터스콜레에서의 교육과 생활


  애프터스콜레는 1994년 현재 전국에 226개교가 있고, 학생 수는 1만9,200명이다. 학생 수는 평균 85명, 교원은 대략 10명 정도이다.


  대안계열과 예술계열이 인기

  그룬트비-콜 계열, 기독교 계열, 음악.예술계열, 대안파, 양호학교 계열 등이 있는데, 음악.예술계열과 대안계열이 급증하고 있다. 대안계열에는 환경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가 많다.


  수업의 형태

  10명 정도가 한 반이 되어 오전 중에는 덴마크어나 수학, 과학, 어학 등의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5명 정도씩 그룹을 지어 워크숍 형태의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워크숍의 내용은 승마술, 해양스포츠 등 천차만멸이다. 3시 이후에는 수업이 없어 학생들이 각자 활동을 하고, 밤도 비슷한 자유시간이지만, 숙직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나 개인지도 시간을 갖는다.


  이지메가 없고, 체벌이 없는 학교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로 성행위나 흡연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학교 내에서의 성적 행위는 금지되고 흡연구역 이외에서는 담배를 필 수 없다. 철저한 금연교육을 운영방침으로 두고 있는 학교도 있다.

  체벌은 인권침해로 인식되어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아이들은 애프터스콜레의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학생의 자기결정권

  애프터스콜레의 특징은 학생의 자주성에 대한 존중이다. 이는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또 보통 매주 한 번씩 전 교원과 전교생 모두가 모이는 회의가 있다.


  커다란 가족으로서의 학교

  프리스콜레, 애프터스콜레, 호이스콜레에는 매년 한 번씩 졸업생들이 모교를 방문하는 날이 반드시 있다. 이 날은 재학생들과 교원들이 같이 식사와 환영행사를 준비한다.

  애프터스콜레에서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생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긴밀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학생도 곧 그 문제를 극복해낸다. 긴 시간을 통해 깊이있는 관계가 만들어지고, '삶을 위한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 용어

폴케호이스콜레(folk high school, 국민고등학교) : 19세기 중반 덴마크에서 그룬트비에 의해 제창된 성인(농민) 기숙고등학교이다. 기독교에 바탕하여 덴마크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국의 역사와 언어를 중시하고 실제 삶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둔다.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vig, 1783-1872) : 목사, 시인, 역사가, 교육가. 19세기 중반(1864) 프로이센에 패배하고 곤경에 처한 덴마크사회를 국민고등학교운동을 통해 계몽하고 부흥시켜 오늘날 덴마크의 국부로 일컬어진다. 국민고등학교운동은 크리스텐 콜(Christen Mikkelsen Kold, 1816-1870) 등의 교육가들에 의해 만개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기성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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