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문화단체의 특성에 기반한 프로그램 기획과 마케팅
- 지역사회조사 및 요구조사

- 사례 발표 및 토론
- 프로그램 개발과 평가

문화예술교육에서 기획자가 지켜야 할 것들
/안이영노

- 문화예술이 갖는 전인주의적 특성

이치에 따르는 기획자의 역할

1. 교육기회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파악하는 것
2. 자신이 가진 것을 돌아보는 일 : 내가 보유한 자원 - 강사, 예술단체, 후원, 동아리, 인프라 공간
3. 교육내용 프로그래밍
4. 홍보와 초기 실천
5. 커리큘럼 확정, 강사섭외, 수강자 모집, 예습, 정보지원, 교육후 성장 관리
6. 교육장 세팅 : 현장운영의 주는 강사 모시기가 아니라 수강자에 대한 고객응대 서비스다.
7. 유대감 지속, 정보 제공, 동아리공간 마련, 후속 프로그램 제공
8. 평가, 개선사항 - 피드백
9. 교육활동 기록, 자료 수집


기획자의 자세
1.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피교육자'나 '수강자'로 바라보는 낡은 시각을 버리자. 문화수용자이자 문화실천자.
2. 교육참여자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전인적인 존재로서 문화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누리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잊지말자.
3. 다각적인 교육방법론의 적용을 통해서만 지적 성장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4. 자신이 공공성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이고자 하는 '위선', 자신이 늘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선'을 경계하자.
5. 구체적인 교육내용이 없다 하더라도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자부심을 고취하자.
6. 교육과정보다는 교육 후 참여활동, 실천계획 등 가치와 전망을 미리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7. 문화기획은 근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행복을 증진하는 과정이다.
8. 일차적으로 교육참여자를 위한 매개자가 된 후에야, 교육수행자를 위한 매개자가 될 수 있다.
9. 교육참여자가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것을 얻고 있다고 느끼며, 사회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성취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자

에듀케이터의 역할
1. (타깃팅) 교육기회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고 확인한다.
2. (프로그래밍) 내가 ㅂ유한 자원이 허락하는 한에서 핵심이 분명한 교육내용을 개발한다.
3. (홍보) 교육장에서 학습기회와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교육활동이 벌어지는 것을 즉각적, 효과적으로 알려야 한다.
4. (과정관리) 커리큘럼 확정, 강사섭외, 실라버스 제출, 수강자 모집, 예습, 정보지원, 교육 후 성장관리
5. (현장운영) 쾌적한 교육장으로 현장을 세팅하고, 교육현장에서 응대서비스를 진행하여 교육몰입도를 높이도록 지원한다.
6. (사후 지원) 교육 후에도 동아리와 유대감이 지속되도록 정보제공, 공간제공, 후속 프로그램 제공 등을 추진한다.
7. (평가와 피드백) 무엇을 주었는가, 목표대로 주었는가, 그들은 바라는 대로 얻었는가?  평가하고 개선한다.
8. (연구) 교육활동을 정보화하고 강사와 함께 후속 프로그램, 지속 프로그램, 신규 프로그램, 다른 수혜자 대상의 동일 프로그램을 미리 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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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 아르떼에서 문자가 들어왔다. 사회기관단체 연수 오라고.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제목이 “미학과 창의성”이다.
  창의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중이어서 우선 관심이 동~했고,

  검색해보니 강사인 조윤경 교수의 책이 재밌다. 박사논문을 낸 것이라는데.
  이화인문과학원 이란 소속도 재미있고.

  충동 신청했다.


****이하 출처 : 문학과 지성사 홈페이지


초현실주의와 몸의 상상력

발행일: 2008년 04월 28일
사양: 신국판, 472쪽
ISBN: 978-89-320-1859-1
정가: 20,000원


프랑스 시사(詩史)에 의미 있는 획을 그은 두 시인 로트레아몽과 아폴리네르 이래로 초현실주의자들의 ‘몸’에 관한 맹렬한 탐색은 시작되었다. 이렇듯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우리 몸은 끊임없이 절단되고, 왜곡되고, 다른 이질적인 요소와 융합되는가 하면, 과장되게 표현되기 일쑤다.
그렇다면 ‘몸’은 왜 초현실주의 미학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은 몸에 어떤 예술적 의도를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몸의 담론 속에서 이 책이 밝히고자 하는 바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포착할 수 없는 무의식, 초현실, 꿈의 세계라는 추상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와 가장 밀착되어 있는 ‘몸’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 이를 위해 이 책은 ‘몸’을 중심 테마로 하여 초현실주의의 대표 시인인 엘뤼아르, 데스노스, 페레의 시적 모험을,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폴 델보 등을 비롯한 동료 화가들과의 연관 속에서 흥미롭게 조명하고 있다.

몸은 욕망과 불안, 무의식을 반영하는 ‘스크린’

초현실주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무의식의 무질서한 질주인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어떤 유파의 시보다 다층적이고 다형태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특히 ‘몸’을 중심 테마로 하여 “어렵고도 매혹적인” 초현실주의 시를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그동안 몸 이미지가 초현실주의 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저자 조윤경의 면밀한 텍스트 분석력과 흥미로운 논리 전개가 돋보이는 이 책에서 중점적인 연구 대상은 바로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세 시인 엘뤼아르, 데스노스, 페레의 시 세계.

우선 저자는 이에 앞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몸의 회화적 이미지의 유형을 살핀다. 1)파편화된 몸, 2)혼종성의 몸, 3)왜곡된 몸, 4)먹을 수 있는 몸, 5)여성의 나체, 6)풍경으로서의 몸, 7)내면으로 향한 눈의 일곱 가지 문제의식이 바로 그것. 화가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몸을 조각내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부풀리거나 다른 것들과의 혼종을 통해, 몸과 영혼 사이의 전통적 이분법으로부터 몸을 해방시켜 몸에 새로운 위치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몸은 마치 스크린처럼 꿈의 세계, 무의식의 비밀스런 영역, 환상, 착란, 존재 내면의 불안함을 투영해 보여주며,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새로운 비전의 표현체로 기능하는 것.

열린 지평이자 최상의 정점 ‘초육체성’을 향하여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몸 이미지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는 ‘엘뤼아르’ ‘데스노스’ ‘페레’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특히 책 중간에 몸과 관련한 초현실주의 화가와 시인들의 작품 73여 점을 화보로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한층 더 쉽도록 했다. 이 책은 이들 세 시인의 ‘몸’에 관한 탐색을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책에 실린 시 작품들, 혹은 시어 하나라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다. 저자의 세심한 눈길은 각각의 시들이 내포하는 다양한 몸 이미지를 탐색하고, 이를 통해 작품 속에서 시인들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몸의 특성을 밝혀낸다.

우선 ‘혼합하는 몸’으로 대변되는 엘뤼아르의 경우 다른 시인들보다 꾸준히 몸의 다양한 부분을 시화(詩化)하고 있으며, 특히 몸과 외부세계의 합일에 천착한다. 이 시인에게 몸은 부분과 전체, 구체와 추상, 관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연결하면서 모든 이분법을 없애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 반면 ‘해부되는 몸’의 데스노스는 몸의 조각나고 상처 난 이미지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존재의 내부로 침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몸 내부의 풍경이 감추고 있는 신비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의 시학적인 힘은 몸에 대한 거부에서 수용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글쓰기의 파괴에서 재구성으로 향하는 끝없는 변용에서 나온다. 또한 저항정신으로 가득 찬 페레는 ‘삼키는 몸’으로 말할 수 있다. 그는 몸의 그로테스크하면서 동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감각들 간의 조응을 특화시켜 특히 미각과, 보다 광범위하게 입으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책의 제2부에서 4부까지 독립된 장을 할애하여 다루어지는 이들 세 시인의 ‘몸’은, 각기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들 세 시인은 각자의 작품에서 자신의 텍스트를 다른 작가에게 헌사하기도 하고, 그들을 떠올리며 시를 쓰는가 하면,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던 것. 또한 엘뤼아르의 작품에서 자주 시도되었듯 화가들과의 공동 작업은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수많은 교류를 이루어냈다. 특히 마지막 5부에 이르면 저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는 개념으로 ‘초육체성le surcorporel’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안한다. 이는 육체성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가장 최상의 정점에 다다른 육체성을 의미한다. 즉, 초현실주의적인 몸의 존재론적이고 예술적인 모험을 총괄하는 개념.

이렇듯 초현실주의자들의 몸에 관한 탐험을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세심하고도 차분한 자세로 독자들을 다양한 형태의 초현실주의적 ‘몸’으로 안내한다. 그것은 조각나고 미완성적인 몸, 시작도 끝도 없는 몸, 하지만 항상 다른 몸, 다른 사물과 합쳐질 준비가 되어 있는 몸이다. 그들은 끝없이 재탄생을 준비하는 불완전한 몸으로부터 무한한 잠재성과 다의성을 발견한다. 이렇게 이들이 표상하는 몸은 우리 몸의 관습적 형태와 미학의 오래된 질서를 끊임없이 문제 삼음으로써 우리에게 일상적인 시각을 넘어선 새로운 시각으로 자아와 세계를 모색하게끔 한다. 특히 인간과 세계와 예술을 변혁시킬 수 있는 혁명의 원동력으로 ‘몸’을 바라본 그들의 상상력은 나와 타인의 단절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 「초현실주의 시에 나타난 몸의 글쓰기(엘뤼아르, 데스노스, 페레): ‘초육체성’을 향하여」를 한국어로 번역·정리하여 출판한 것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비롯해 총 다섯 부로 구성되어 있다.


■ 책 속으로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표상하는 몸은 우리 몸의 관습적 형태와 미학의 오래된 질서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다. 몸은 절단되고, 왜곡되고, 다른 이질적인 요소와 융합되며, 과장되게 표현됨으로써 몸 주변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밖과 안,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꿈을 융합한다. 우리는 그들의 그림 앞에서 종종 질문하게 된다. 물체가 육체로 살아나게 되었는가, 아니면 육체가 물체로 굳어지게 된 것인가? 이것이 ‘내 몸’인가 아니면 ‘타인의 몸’인가? 몸과 세계의 경계는 어디인가? 초현실주의 세계 안에서 몸과 세계는 영속적인 변용의 욕망에 사로잡혀 지속적으로 상호침투하면서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한다. (프롤로그, 26쪽)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실로서의 몸은 일종의 스크린처럼 심리적이고 몽환적인 내면의 풍경, 벵자벵 페레의 표현에 따르면 “최면의 풍경”을 반영한다. 이러한 풍경은 수동적으로 보이고, 탐험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몸의 감지할 수 없는 측면, 나아가 불가능한 측면을 드러내고자 애쓰는지를 보게 된다. 주관적인 이미지의 탐사를 통해 몸과 자연, 내부와 외부,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과 경계들은 무너진다. 몸-풍경은 몸과 풍경, 몸과 거주지, 몸과 배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제1부 2장 몸의 풍경과 내면으로 향한 시선, 68~69쪽)

다다 시기 이후 엘뤼아르의 시적 여정은 부분과 전체를 공존시키면서 점점 여성 육체의 합일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엘뤼아르의 시에서 여성의 몸은 한스 벨머나 살바도르 달리의 경우처럼 예술가이자 관찰자의 욕망에 의해 절단된 것이 아니다. 시인이 신체 부위에 천착하는 이유는 롤랑 바르트가 “분할되고 찢겨진 여성은 대상들과 물신숭배자들이 훑는 일종의 사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언급한 병적인 페티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몸에 독립성과 발언권을 부여하며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여성의 각 신체 부위는 마치 처음부터 몸의 전체에서 독립되었던 것처럼 나타나며 몸 이외의 다른 요소들과 자유롭게 결합한다. 눈, 손, 가슴, 다리, 손가락 등 각 부위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이동하고 자라나면서 자연과 독립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에 따라 여성의 몸은 늘 새로운 풍경으로 재구성된다. 여성의 몸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나타나는” 풍경과 흡사하다. (제2부 1장 여성 몸의 풍경들, 85쪽)

콜라주는 서로에게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두 현실의 자의적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이다.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찬양하는 로트레아몽의 문구, “해부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이 상징하는 것이다. 해부대는 실험실이자 변용의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해부대는 몸의 절단과 재구성에 관한 수술작업이 이루어지는 콜라주 자체이기도 하다. 몸의 이미지에서 이질적인 언어와 이미지가 몸을 이루기 위해 합쳐지듯이 콜라주에서도 이질적인 본질을 가진 요소들이 결합된다. 자의적인 만남들은 낯섦을 일으키고, 낯섦의 효과는 몸과 콜라주를 일상적인 맥락이나 환경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제2부 1장 여성 몸의 풍경들, 98쪽)

화가들과 시인은 서로 자유롭기 위해 결합한다. 글로 표현된 삽화라 할 수 있는 엘뤼아르 시의 단어와 구절은 그림이나 사진 속 이미지들에서 비롯되지만, 회화적 이미지들과는 별개로 특유의 상상력을 펼친다. 마찬가지로 그려진 시라고 할 수 있는 화가들의 삽화는 엘뤼아르의 시 텍스트에서 영감을 받지만, 고유의 독자성을 발휘한다. 엘뤼아르의 시집 속에서 화가들과 시인은 서로 자유롭게 꿈꾸기 위한 공동의 창작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제2부 3장 시와 회화의 상호교류와 ‘탈경계’의 몸, 182쪽)

데스노스가 즐겨 해부하는 또 다른 대상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다. 그의 시집들은 심지어 고유명사에 대한 해부실험 연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러한 연구의 의미는 그자비에 뒤랑의 지적처럼 “언어를 해부하면서, 우리는 그 비밀스런 하부조직들에 관한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어떤 것도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
데스노스는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유희하기를 좋아한다. 이 이름들은 시인이 보기에 결코 자의적이지 않으며 그 이름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운명과 강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작가의 이름인 서명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그의 삶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며, 열쇠다”라고까지 말한다. 또한 그는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의 운명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도록 영원히 운명지워진 이름들이 있다”고 말한다. (제3부 3장 일상언어를 넘어서, 289~90쪽)

데스노스의 시적 공간 안에서 몸은 정신의 언어로 변모한다. 관습적인 몸이 파괴되고 재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관한 유희들은 글쓰기의 해체를 동반한 다음 새로운 글쓰기로 변모한다. 그리하여 부정되고 재발견되는 글은 사회적 관습에 따르는 명확한 언어의 일상적 사용에 익숙해진 의식과 정신을 전복한다.
데스노스의 시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만들어냄에 따라, 미리 규정되지 않은 무한함에 열려 있게 된다.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인의 죽음을 천명하는 이유는 무화작용을 거친 글쓰기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데스노스의 시학의 힘은 몸의 거부에서 수용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글쓰기의 파괴에서 재구축으로 향하는 끊임없는 변용 속에 깃들어 있다. (제3부 3장 일상언어를 넘어서, 298~99쪽)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페레 작품의 중요 테마로 ‘음식’의 테마에 주목한다. (……) 우리가 보기에 음식과 관련된 주제와 감각의 착란은 시인의 작품에서 높은 빈도수를 차지하는 삼키기와 토하기, 마시기와 오줌 누기, 들어가기와 나가기라는 몸의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들이 지칭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특별히 섭취, 소화, 배설이라는 몸의 세 기능에 집착하고 있다. 또한 그는 몸뿐 아니라 “땅, 요리, 위장에서 벌어지는 세 층위의 소화작용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 소화작용으로 표상되는 몸의 왕복운동은 페레의 시학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몸과 세계, 내부와 외부 간 소통의 방식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세계의 경계, 모든 이분법적 한계를 무너뜨리는 시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음식을 부수는 행위와 그것을 소화시키는 행위는 해체작용을 거친 변신을 지향한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과 창작을 위해 부순 다음에 재구성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페레가 중시하는 몸의 내적 작용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나 시인들의 내적 작업을 환기시키는 효과 또한 가져온다. (제4부 벵자멩 페레와 폭식하는 몸, 305~306쪽)

페레는 자신의 작품 속에 동화적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현실과 상상세계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인이 드러내고 보여주고자 할 임무로 생각하는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동화의 고유한 자질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페레의 몸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이분법적인 두 질서 사이의 경계를 없앤다. (……)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코, 작은 손가락, 반지 등이 갖고 있는 모든 성적인 암시를 고려해본다면, 동화는 어린아이의 세계와 에로틱한 세계를 동시에 연결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관습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 꿈과 현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함께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화의 양가적인 자질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꿈꾸는 이분법적인 것들의 무화가 지니는 욕망에 부합된다. 페레의 동화와 시는 모두 일반 동화에 고유한 “진정으로 낯선 결합을 창출해내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1장 동화적인 몸과 감각의 재구성, 309, 311쪽)

세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몸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을 막론하여 모두가 갖고 있는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은 유기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엘뤼아르에 의해서는 자연의 요소, 정신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내포하며, 데스노스에게서는 비물질적인 것과 광물질 또는 신화적인 요소를, 그리고 페레에게서는 음식이나 사물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를 통해 몸은 공간과 시간의 보편적인 조건 밖에 위치하면서 모든 경계나 장르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
필자는 복수성(複數性)을 가진 초현실주의적 몸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초육체성le surcorporel’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려 한다. 이 용어는 아폴리네르가 ‘초-사실주의sur-réalisme’라는 신조어를 발명한 후 일반화된 초현실성이라는 개념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브루닉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아폴리네르는 리얼리즘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리얼리즘을 강화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접두사 ‘초sur’를 붙이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초현실성이 “다양한 현실의 상위 조합”인 것처럼 초육체성도 다양한 육체성과 그 복수성을 아우르는 상위 조합이다. (제5부 1장 낯선 몸, 친숙한 몸, 421쪽)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수많은 교류 속에서 시인들과 화가들은 서로에게 연결되면서도 자유롭게 활동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 근접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격하게 분리되기도 했다. 화가들과 시인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대로 몸을 일상의 규약에서 해방시키며 모든 표면적인 이분법적 구분들이 무너지는 지고의 지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초현실주의적인 새로운 몸을 창조해냈다. 몸, 언어, 세계는 분절되고 재구성되어 궁극적으로 세 시인과 화가들의 욕망에 의해 재창조되었다. 엘뤼아르는 융합하는 몸을 통해, 데스노스는 분열하는 몸을 통해, 페레는 삼키는 몸을 통해 자유롭게 초육체성을 탐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에서 부과된 금기와 한계들은 없어진다. (제5부 2장 읽을 수 있는 몸, 볼 수 있는 몸, 443쪽)


■ 차례

프롤로그

제1부_ 초현실주의 회화와 몸의 유형
1장 몸의 변주와 외적 형상
1. 분할되고 파편화된 몸/ 2. ‘혼종성의 몸corps hybrid’/ 3. 몸의 확대와 끝없는 왜곡/ 4. 탐욕스러운 몸과 먹을 수 있는 몸

2장 몸의 풍경과 내면으로 향한 시선
1. 여성의 나체/ 2. 풍경으로서의 몸/ 3. 눈과 내면으로 향한 시선

제2부_폴 엘뤼아르와 혼합하는 몸
1장 여성 몸의 풍경들
1. 몸의 조각 맞추기/ 2. 몸과 풍경의 동일화/ 3. 여성 몸의 ‘블라종blason’ 기법과 세밀함의 글쓰기

2장 몸과 세계와 공간의 변증법
1. 몸과 세계의 ‘옴팔로스omphalos’/ 2. 피와 도로의 ‘끊임없는 시poésie ininterrompue’/ 3. (탈)중심공간과 망상공간의 변증법

3장 시와 회화의 상호교류와 ‘탈경계’의 몸
1. 동·식·광물계의 경계 넘나들기와 여성의 ‘벗은 풍경’/ 2. 언어, 이미지, 오브제로서의 몸

제3부_로베르 데스노스와 해부되는 몸
1장 위험에 빠진 육체
1. 해부하기, 몸 내부로의 침투/ 2. 익사자의 몸과 희화화된 죽음/ 3. ‘꿈의 산문les récits de rêve’ 속의 의인화된 육체

2장 비생명체들의 몸
1. 하늘과 바다와 대지의 혼종체 ‘불가사리’/ 2. “관능적인 그림자”와 애매성의 미(美)/ 3. 검은 육체의 부활과 이미지의 변용

3장 일상언어를 넘어서
1. 반복의 기법과 육성(肉聲)의 글쓰기/ 2. 해부되는 글자들과 반(反)블라종/ 3. 내면의 ‘몸-언어’와 무덤의 시학

제4부_벵자멩 페레와 폭식하는 몸
1장 동화적인 몸과 감각의 재구성
1. ‘이야기 시’ 속에서의 몸/ 2. 음식들의 질서/ 3. 몸의 순환적인 리듬

2장 그로테스크한 몸과 전복(顚覆)의 유희
1. 몸의 다양한 전이와 공격의지/ 2. 몸과 언어/ 3. 우주적인 몸과 새로운 신화창조

3장 몸의 변신과 유동적인 글쓰기
1. 초현실주의 이미지와 몸의 말/ 2. 유희로서의 글쓰기

제5부_초현실주의와 ‘초육체성les surcorporel’을 향하여
1장 낯선 몸, 친숙한 몸
1. ‘초육체성’의 시학/ 2. 소통의 몸짓과 무한한 육체

2장 읽을 수 있는 몸, 볼 수 있는 몸
1. 몸과 언어/ 2. 몸, 시, 회화의 문화적 교차로

에필로그
Posted by

자료를 찾다가 때지난 뉴스를 봤다.
문화조례를 만든다고?

****

인천서 전국 최초로 ‘문화조례 만들기’ 착수  내 기사  
2010/05/22 11:56

http://blog.naver.com/m924914/70086482238



인천서 전국 최초로 ‘문화조례 만들기’ 착수  
인천의제21ㆍ지역문화네트워크, ‘시민참여문화 활성화를 위한 지원조례 토론회’

[342호] 2010년 05월 21일 (금) 12:21:59 이정민 기자  m924914@naver.com  


“누구나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자체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국민 모두가 잠재적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식한다면 국가는 당연히 이들에게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을 지원해야한다. 생활문화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 복지국가의 정형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의 생활적 가치를 인지하는 것이며,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뒷받침돼야하는 마땅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전국 최초로 인천에서 시작되는 ‘문화조례’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옥천 모단스쿨 김보성 교장은 시민참여문화 활성화를 위한 조례 제정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서 청원운동이 전개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의제21과 지역문화네트워크가 주최하고 인천시ㆍ해반문화사랑회가 후원하는 ‘시민참여문화 활성화를 위한 지원조례 토론회’가 20일 오후 7시부터 부평아트센터 커뮤니티홀 호박(Hobak)에서 개최됐다.

생활문화인들의 예술영역은 공적영역의 연장선



    
▲ 5월 20일 오후 7시 부평아트센터 커뮤니티홀 ‘호박’에서 개최된 시민참여문화 활성화를 위한 지원조례 토론회 모습. 이번 문화조례 제정을 위한 토론회는 전국에서 최초로 시도됐으며, 지역문화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참여해 문화조례 제정운동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  
임승관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는 시민이 주체가 되는 문화 활동의 활성화와 공적영역의 연장선격인 생활문화영역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 조례안을 만드는 데 참고하기 위해 마련됐다.

토론에 앞서 발제를 맡은 박종관 서원대 교수는 “생활문화의 확산은 결국 지역문화 가치 확산의 근거가 된다. 다양한 예술동아리 활동이 우리사회에 고착됐을 때 예술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다는 면에서 생활예술동아리 활성화는 오히려 전문인영역에서 깊게 관심을 보여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라고 생활문화예술 활성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박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복원 생활예술 활성화와 같은 명제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서서 전 지역적 차원에서 생활예술 활성화를 이어주는 연계방식으로 ‘생활공동체 운동’과 같은 구체적 목표 설정이 필요하며,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 복지적 관점의 생활문화 활성화에 대해 발제를 맡은 이춘아 한밭문화당 대표는 “최근 생활문화라는 단어가 문화 향유라는 단어를 대체해가고 있다. 단순 문화소비자에서 적극적인 문화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앞으로의 문화정책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관점을 지녀야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며 이 대표는 “과거 문화기반시설에 투입됐던 예산들이 이제는 문화기반시설의 정착으로 문화 향유를 위한 문화프로그램 지원으로 돌려지고 있는 단계에 들어와 있다. 전 국민의 평균적 문화력 향상을 위해 지금 서둘러야 할 문화정책은 적극적 문화 수용층을 흡수해 문화기반시설 등을 채워줄 문화 봉사자와 생활문화동아리를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생활문화는 일상을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

최근 들어 ‘문화 향유자 운동’이 지역 곳곳에서 펼쳐지면서 지역문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선호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문화는 역사ㆍ지리적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공동체 성원이 만들고 가꾸어가는 독특한 정서체계를 통칭한다.

조성진 대구거리문화시민연대 대표는 “제일 먼저 인지해야할 것은 ‘누림’의 문화에 대한 개인 스스로의 성찰이다. 일로 가득한 삭막한 사회구조 때문에 생산에 필요한 도구적 언어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곧 문화예술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떠안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며 조 대표는 “이제 생활문화는 일상을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그 중심기능이 변화하고 있다”라고 한 뒤 “서로의 생태에너지를 조화롭게 소통하며 문화예술적 시너지를 발산시켜 문화 향유자에서 생활문화 주체자로서, 주인을 바꾸는 것으로 새롭게 모색돼야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독일과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공공의 삶에 생기를 부여하고 예술의 인문학적 성격을 높인다는 전제 속에 국가적 차원에서 문화 복지정책을 체계적으로 입안하고 있다. 독일은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생활예술인 지원시스템이 구축돼 매년 10만여개의 아마추어 동아리들이 마음껏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물적 인프라를 보태고 있다.

한편, 이날 열린 토론회에는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과 이종복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사단법인 해반문화사랑회 회원, 인천의제21 문화분과 회원, 지역문화네트워크 창작활동가 등 30여명이 참석해 전국에서 최초로 진행되는 문화조례 제정운동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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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거 올리려고 만든 방이 아닌데...
올린다.

출처 : 한겨레신문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8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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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박쓰고, 돌려막고, 쏟아붓고… 조금 위험한 인천 이야기 [2010.07.30 제821호]

[특집]
중앙정부도 만류한 경기장, 시 예산으로 돌려막은 지하철, 미분양 사태의 신도시…
안상수 전 시장의 독주 속에 예산 낭비로 심각한 재정 위기 맞은 인천시



▣ 김기태





» 안상수 전임 시장이 인천 서구에 건설을 추진했던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조감도. 문화체육관광부는 인천 문학경기장을 주경기장으로 재활용하라고 권유했지만, 안 전 시장은 건설비에 국비 지원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경기장 건설안을 강행했다. 인천시 제공



지난 6월 인천시장 선거에서 가장 큰 쟁점은 인천시의 천문학적 부채였다. 송영길 민주당 후보는 인천시의 부채가 무려 7조원에 이른다면서 ‘재정 파탄’의 주범으로 안상수 당시 시장을 지목했다. 3선을 노리고 선거전을 벌이던 안 시장은 송 후보의 주장이 “거짓말”이라고 맞받아쳤다. “경제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선거의 승리는 재정 부채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송 후보에게 돌아갔다.

막상 시청에 들어선 송 신임 시장은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천시와 산하기관의 부채는 7조원이 아니었다. 회계장부를 들춰보니, 실제 부채는 그보다 훨씬 많은 10조원에 다가서고 있었다. 지난 2002년 6462억원 수준이던 부채는 안 시장이 연임한 8년 사이 15배 가까이 불어났다.

<한겨레21>은 인천시가 지난 6월 내부용으로 작성한 ‘대인천비전위원회 업무보고’ 자료 2권을 입수했다. 그 안에는 인천시의 부채가 지난 8년 사이 불어난 내용이 기록됐다. 자료를 보니, 전임 시장의 개발 드라이브가 있었다. 심지어 중앙정부의 예산 지원을 마다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안 시장이 어떤 무리수를 뒀는지 살펴봤다. 인천 이야기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예산을 어떻게 쓰는지 점검할 수 있는 좋은 사례로 풀이된다.

 

1. 이상한 자력갱생 프로젝트, 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

2007년 4월17일 쿠웨이트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제26차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새로운 결정을 하나 내렸다. 인천을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 도시로 지목한 것이었다. 주경기장은 문학경기장이 된다는 게 유치위의 당시 구상이었다. 막상 개최가 확정된 뒤, 인천시는 계획을 바꿨다. 문학경기장 대신 서구 연희동 그린벨트 지역에 새로운 주경기장을 짓겠다는 것이다. 당장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문학경기장을 활용하라고 요구했다.

이듬해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인천시의 구상은 논란을 낳았다.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은 당시 “주경기장을 신축하는 것보다 기존 경기장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선호가 높다”면서 “문학경기장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청와대까지 나서 중재를 했지만, 안 시장은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인천시와 중앙정부의 지루한 줄다리는 지난해까지 계속됐다.

지난해 1월 안 시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서 인천시장 책임하에 민자 유치로 주경기장을 신축하라고 승낙했다”고 설명했다. 서구 연희동 그린벨트 지역 58만5천㎡에 4460억원을 투입해 주경기장 등을 신축한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됐다. 시는 주경기장 건축비를 민자 70%, 시 예산 30%로 추진하기로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마땅히 들어가야 하는 국비 지원 계획이 없었다. 안 시장은 국비를 지원받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양보를 받아낸 것이었다. 지난해 6월 공표된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지원법’에는 국가가 필요한 예산을 지원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지만, 인천시에 오는 혜택은 거의 없게 됐다. ‘대인천비전위원회 업무보고’ 자료를 보면, 경기장 건설에 1조9480억원, 선수촌 및 미디어촌 건설 비용 등에도 2조8268억원이 필요했다. 무려 5조원가량이다. 이 가운데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액수는 고작 5912억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시의 부담이 됐다. ‘대인천비전위원회 업무보고’는 경기장 건설비 등에 대해 “시 재원 한계로 대부분을 지방채로 발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빚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시는 5350억원어치의 지방채 발행을 이미 승인했다. 또 1조6650원의 지방채를 2014년까지 발행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안상수 전 시장이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인 서구 지역에 개발 호재를 줘서 3선에 유리한 고리를 마련하려 한 것으로 본다”고 풀이했다.

 

2. 시 예산을 당겨 짓자, 인천 도시철도 2호선

2006년 5월17일 인천시는 도시를 남북으로 잇는 도시철도 2호선을 2008년 착공해 2013년에 준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총사업비 1조9784억원 가운데 1조1870억원은 국비, 7914억원은 시비로 조달하겠다는 계획도 나왔다. 당시 재선을 노리던 안상수 인천시장이 지방선거를 불과 2주 앞두고 내놓은 안이었다. 그러나 국비를 대줄 중앙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듬해 12월 건설교통부는 “사업비를 줄이거나 건설 기간을 늦추라”고 인천시에 요구했다.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2018년을 완공 시점으로 맞추라는 권고였다.

시는 곧 사업 계획을 변경했다. 도시철도 2호선을 단계적으로 나눠 개통하기로 하고, 수정안을 작성했다. 수정안은 인천대공원~서구 공촌사거리 19.4km 구간을 2014년 상반기에 우선 개통하고, 나머지 공촌사거리~오류지구 9.8km 구간은 2018년까지 완공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서구 검단신도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개통 시기를 2014년에 맞추라고 요구했다. 인천시가 아이디어를 짜냈다. 시의 예산을 우선 쓰고 국비는 나중에 받겠다는 것이었다. ‘대인천비전위원회 업무보고’에서는 “조기 준공하기로 함에 따라 선투입재원 6천억원을 조달할 필요가 생겼다”고 밝혔다. 시는 또 빚을 끌었다. 지난해까지 289억원어치 지방채를 발행하고 오는 2014년까지 1873억원의 지방채를 추가로 발행할 계획이다. 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나온 정책은 결국 시의 재정 부담으로 돌아왔다.



» 지난해 8~10월 인천에서 열린 인천세계도시축전. 축전은 ‘짝퉁 엑스포’ 시비를 낳는 등 매끄럽지 않은 행사 진행으로 비판을 샀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3. ‘짝퉁’ 엑스포를 감사하라, 인천세계도시축전

2006년 8월 인천시는 2009년 8월에 인천세계도시엑스포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 행사에는 1천만 명이 다녀갈 것이라는 거창한 비전이 마련됐다. 경제 효과가 2조7800억원이라는 조직위의 발표도 뒤따랐다. 이듬해 2월 정작 국제엑스포를 주관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가 발끈하고 나섰다. “인천엑스포가 국제박람회 기구의 인증을 받은 것이 아니고, 2010년 중국 상하이엑스포와 주제와 기간이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짝퉁’이라는 것이었다. 인천시는 행사 이름을 ‘2009 인천세계도시축전’으로 바꿨다. 예상 관람객 수도 700만 명으로 조정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80일 동안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행사는 진행됐다. 행사에는 기업 협찬과 시 예산 500억원을 포함해 모두 1330억원의 비용이 들었다. 행사의 내용은 기대 이하였다. 예산 낭비 시비가 계속됐다. 특히 회계 과정이 깔끔하지 않아, 자금의 흐름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7월7일 송영길 신임 시장은 인천세계도시축전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청구했다. 인천시에서 현직 시장이 행정사업과 관련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한 것은 처음이다. 윤관석 인천시 대변인은 “도시축전 조직위원회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은 결과 보고 내용이 매우 허술해 감사를 청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시 관계자는 “도시축전은 안 전 시장이 3선을 위해 만든 사업이라는 말이 계속 돌았고 전형적인 낭비성 예산이었다. 돈의 흐름에도 의혹이 있다”고 말했다.



» 인천 서영종지구 조감도. 인천시 도시개발공사가 30%의 지분을 갖고 참여한 영종하늘도시 개발사업은 분양률이 30%에 못 미치는 등 사업 진행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인천시 제공



 

4. 줄줄이 ‘제동 걸린’ 1조원 개발사업, 검단과 영종도

지난 6월30일 인천시청 시장 집무실에서는 임기 마지막 날을 맞은 안상수 시장과 송영길 당선자가 독대했다. 간단한 인사말 정도로 지나갈 줄 알았던 자리는 20분 넘게 이어졌다. 시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송 당선자는 시의 재정 상태를 두고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가게 됐느냐”고 물었고, 안 시장은 “(부동산 경기가) 계속 좋을 줄 알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안 시장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사업비가 1조원이 넘는 개발사업만 해도 시 주변에서 줄줄이 이어졌다. 영종하늘도시 개발사업(2조3564억원), 검단신도시 개발사업(7조7천억원), 검단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1조1928억원), 운북복합레저단지 조성사업(8085억원), 도화구역 도시개발사업(2조7586억원), 동인천역 주변 도시재생사업(2조1230억원) 등이 그 예였다. 지난해 말부터 부동산 경기가 기울어지자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모두 시가 100% 출자한 공기업인 도시개발공사에서 주도하거나 참여한 사업들이었다. 무모하게 판을 벌인 탓이 컸다. 공사가 30%의 지분을 출자한 영종하늘도시 개발사업은 전체 286만㎡ 가운데 44만8천㎡만 분양됐다. 그나마도 약 40%는 다시 해약됐다. 검단산업단지의 분양률도 44.2%에 그치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서구 가정동 ‘루원시티’ 개발사업도 결산을 하고 나면 손실이 2천억~8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개발이익을 노리고 투자한 땅에서 수익이 생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대인천비전위원회 업무보고’에서는 “부동산 경기 침체에 따른 분양 부진 및 대금회수 지연 때문에 (도시개발공사의) 부채비율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인천시 부채 현황



 

시 의회와 지역 언론, 환상의 짝꿍

대규모 개발사업에 참여하면서 도시개발공사의 부채는 이미 급격하게 불어났다. 안상수 전 시장이 당선한 이듬해 건립된 도시개발공사는 2003년 1380억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지만, 지난해 말에는 부채가 4조4609억원까지 불었다. 공사의 부채는 올해 말 6조6424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도시개발공사의 재무건전성이 나빠지면 그 부담은 인천시에 돌아오게 된다. 인천시의 일반회계 전입금으로 공사의 자본금을 확충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인천시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다. 빚도 급격하게 늘고 있다. 지난 2002년 6462억원이던 부채가 지난해 말 2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말에는 2조7526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시와 공사의 부채를 합하면 올해 말 부채는 9조3950억원에 이르게 된다.

시의 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7월9일 내놓은 ‘지방자치단체 재정난의 원인과 대책’ 보고서를 보면, 인천시의 경상가용재원은 2008년을 기준으로 -6597억원으로 나타났다.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에서 경상가용재원이 마이너스가 나온 곳은 인천이 유일했다. 경상가용재원은 일반 재원 가운데 인건비와 운영비 등 반드시 써야 할 경상비용을 제외한 비용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인천은 인건비와 운영비를 대기에도 재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세입에 견줘 세출 규모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인천시가 어쩌다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됐을까. 일단 부동산 경기 침체라는 외부적 요인이 컸다. 중앙정부의 감세 기조로 세입이 대폭 줄어든 탓도 컸다(<빈익빈 수렁에 빠진 동네를 구하라> 기사 참조).

다른 요인도 있다. 시장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견제 장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우선 시의회가 무기력했다. 안 시장과 임기를 같이한 민선 5기 시의원 33명 중 32명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이던 이명숙 전 의원은 “시의원 중 상당수가 같은 당에 속한 안 시장의 눈치를 봤다”며 “시의회가 견제 기능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의회의 ‘부화뇌동’은 때로 도를 넘었다. 중앙정부가 문학경기장을 리모델링해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으로 사용하라며 안상수 시장과 이견을 보이자, 시의회 의원들은 2008년 11월 문학경기장의 리모델링을 금하는 황당한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지역 언론도 시청 권력을 견제하는 데는 부족했다. 인천시의 한 관계자는 “지역 언론 한두 곳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견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오히려 대부분의 언론에서 시청에서 만든 부동산 개발 거품을 타고 한몫을 챙기려 했다”고 말했다. 지역 시민단체들이 예산 문제를 제기했지만 시청에는 목소리가 미치지 못했다. 인천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연합체인 ‘인천참여예산네트워크’를 지난 2007년에 꾸리고 시의 재정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김송원 인천경실련 사무처장은 시청이 아예 귀를 막았다며 “불통도 이런 불통이 없었다”고 말했다.



» 2009년 10월 인천 영종하늘도시 견본주택이 예비 청약자들로 붐비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기 전의 풍경이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납세자 소송제 도입이 대안

제도적 원인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세금을 함부로 쓴 지방자치단체장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부 시민단체는 ‘납세자 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납세자 소송제’란 중앙 혹은 지방정부의 위법한 예산 집행에 대해 주민이나 납세자가 원고가 돼 정식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은 “납세자 소송제도는 지방자치단체장의 방만하거나 악의적인 예산 집행을 견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공기업법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방공기업법령을 보면, 지방자치단체장은 산하 공기업 사장의 임명권자다. 예산과 결산은 공기업의 이사회에서 승인하는데, 이사들은 사장과 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하게 된다. 지방공기업의 예산과 인사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공사의 설립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방의회의 견제가 미칠 여지는 거의 없다. 이런 구조 안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이 공기업을 통해 마음껏 부채를 끌어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인천시도 공사의 부채가 시청 부채의 2배였다. 다만 자산의 400%까지만 부채를 발행할 수 있다는 규제는 따른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마음먹으면 이 규제도 피해갈 수 있다. 공사가 특수목적회사(SPC)에 투자하는 식으로 다른 사업을 벌이면 외부 돈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하나 더 마련된다. 지방공기업은 흔히 일종의 페이퍼컴퍼니인 특수목적회사를 통해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사업을 벌인다. 인천시 도시개발공사도 13개 특수목적회사에 지분을 투자하는 등의 방법으로 17조2147억원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사업이 부실로 이어지면 도미노처럼 지방재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방공기업들이 흔히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면서 최소운영수익을 보장하는 등 ‘보험’을 걸어주기 때문이다. 지방공기업법에는 지분에 참여하는 액수가 자기자본의 10% 이내여야 한다는 규제만 있다. 윤관석 인천시 대변인은 “특수목적회사의 사업 내용은 아직 보고를 받지 않은 단계”라고 말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장이 공기업 혹은 특수목적회사를 통해 무리하게 돈을 끌어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 있다”며 “공기업과 특수목적회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지방자치단체장의 전횡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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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차 안에서 신지승과의 인터뷰를 들었다.
주로 시골 마을을 찾아가서 주민들이 쓰고 연기하는 마을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일단 급히 클리핑~

http://blog.daum.net/supia21/15681654

http://blog.daum.net/supia21/1568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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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주년사업 추진위원회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대토론회 - 상상변주곡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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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와 사상의 변화

이진경(철학자, 서울산업대 교수)




1. 역사적 대답, 질문의 역사


  우리는 지금 지난 20년의 지나간 역사에 대해 묻고 있다. 무엇을 묻고 있는가?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에 하나의 문턱이 되었던 87년 6월 항쟁의 의의에 대해, 그 항쟁으로 인해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사회의 변화양상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묻고 있는가?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그 동안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확보하지 못한 것을, 혹은 다행히도 확보한 것을 문턱이 된 과거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역사적 형식의 질문으로 무언가의 ‘의의’를 묻는다는 것은 이렇게 되기 십상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역사 안에 확고한 하나의 자리를 부여하고,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 그것과 계열화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역사적 의의를 묻는 통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 경우 질문은 이미 대답을 포함한다. 질문에는 언제나 이미 반쯤은 대답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에 할당된 역사적 자리, 그것은 이미 그것과 연결되는 모든 사건들의 의미를 이미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흔히 그것에 이미 만족한다. 그것이 얻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설정된 지난 20년이란 기간은 그 사건을 통해 이미 '해석의 지평‘이 만들어진 기간이고, 그 지평을 통해 다듬어진 시간이며, 그리하여 그 안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대개는 그 중심적 사건으로 수렴하게 마련인 시간이다. 그러나 정말 그 20년이 6월 항쟁으로 귀속되는 시간이었을까? 그 20년간의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과 계열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차라리 그렇게 제공된 대답들에 대해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87년 6월 항쟁 이후 20년간의 사회·사상적 변화에 대해 논의하자는 제안에 대해 나는 그것을 질문의 역사로서 검토하자고 말하고 싶다. 운동의 관점, 아니 좀더 넓게 말해 실천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질문이란 사건과 사유가 만나는 접점이고 사회와 운동이, 사태와 실천이 만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사유되었나를, 아니 사유되어야 하는가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질문들이 당시에는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서 사태가 좀더 진행된 연후에야 비로소 명료하게 된 것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사회와 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무엇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며’ 사유하기보다는, 그것을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대결하며’ 사유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 혁명적 실천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87년은 두 개의 사건에 의해 과잉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80년 광주항쟁이다. 그것은 6월 항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되는 군사정권의 행로를 처음부터 결정지은 사건이었고, 그 정권과 대결하는 운동으로 하여금 혁명적 강밀도를 가질 것을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혁명적 봉기, 군사적 폭력과의 대결, 해방구적 상황, 그리고 거대한 패배, 80년 광주항쟁 이후 운동은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어야 했다.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자 하지 않고선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것은 이렇게 묻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다른 하나는 멀리 70년의 전태일 분신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노동자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는 어떠한 운동도 삶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그리하여 삶에 진지하거나 운동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노동자에 대해 노동운동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이었다. 오랜 잠행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에 관해 질문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노동에 대해, 노동자와 민중들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아마도 85년 대우어패럴 노조 연대파업과 서노련·인노련의 창립은 이 두 가지 사건의 효과가 응집되며 만들어낸 사건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 그리고 군사정권의 폭력과 대결하며 존속할 수 있는 조직, 그리고 ‘부분운동’을 넘어서 ‘전체 운동’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운동. 물론 알다시피 서노련과 인노련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던진 것이든 아니든, 그들을 통해, 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삼게 된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 그것을 위한 직업적 혁명가의 조직, 아마도 이것이 그 질문을 통해 얻어낸 대답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종종 비판하기도 하듯이, 질문을 통해 사유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수입’된 대답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답이 너무 빠르고 너무 쉽게 도출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사유 없이 도입된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배우고 논문을 쓰는데 원용되는 이론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실천의 이론이 ‘사유 없이’ 도입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비록 그 사유가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음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우연이었을까? 동형적인 이론적 배치가 출현한다.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 등, 후진국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이론들에 대비하여, 노동자계급의 사상으로서 맑스주의 이론의 보편성을 계급분화 양상을 통해 논증하면서, 이론적 수용에서 ‘사상적 원칙’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 논문이 제출되면서, 다기한 이론들 사이에 배제와 선별의 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혁명적 실천을 위한 혁명적 이론, 혁명 전략을 고민하기 위한 이론적 연구가 아카데믹한 공간에서 벗어나 운동의 장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한 대답의 시도이기 이전에, 맑스-레닌주의적 지반 위에서 혁명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주체들을 하나의 대열로 결집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대답은 그토록 많이들 달랐지만, 그 모두가 질문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었던 하나의 이론적 장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87년 6월 항쟁은, 물론 그 직접적인 불씨는 고문치사사건과 호헌선언이었지만, 그것은 점점 가속화되며 진행되던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로 응축되며 폭발하게 한 하나의 계기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3. 정치의 새로운 공간


  87년 항쟁의 직접적 결과물은 정치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야당은 물론 운동권의 정치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합법적 정치공간이 만들어졌다. 합법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를 내서 공개적인 정치적 장에서 선전활동을 했던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운동단체들이 합법적인 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조합의 활동 역시 합법성의 폭이 확대되었다.

  어느 정도 시차를 두기는 하지만 그람시의 이론을 비롯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의의를 강조하는 이론들이 조명을 받게 되고, 그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내지 한국의 정치공간을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조건의 산물일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획득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개념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란 점에서 6월 항쟁이라는 사건의 결과물에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대답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새로이 확장된 공간에 대한 사유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사유였다. 아마도 새로운 정치적 공간에 진출하여 그것을 이용해야 했던 한,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했고, 따라가야 했던 사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합법공간에서의 정치는 합법공간이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가령 합법공간을 가장 소극적으로 규정하여 합법적인 선전의 장으로 본다고 해도, 거기서 선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을 요구할 뿐 아니라 다양한 진입장벽과 작동방식으로 인해 항상-이미 부르주아지나 보수층에 유리하게 선규정된 게임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합법적 공간을 장악한 부르주아적 매체들과 대항해서 값은 싸지만 빈약한 선전물로 대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시작하면서부터 지는 게임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합법공간에서의 선전이 취하게 될 경로는 어느 정도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해도, 그 경로에서 크게 이탈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주 적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맑스의 말을 빌어, “무엇을” 선전하는가보다 차라리 “어떻게” 선전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부르주아지와 대결하는 지점에서 “어떻게” 대결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지점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선전만이 아니라 정치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중당을 비롯한 초기의 합법적 정당활동이나 대통령 선거 참여가, 그 성과가 없었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합법적 공간에서 혁명은 그만두고라도 변혁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하기는 그 성과가 매우 적었음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합법적 정치공간은 거기에 부합하는 정치활동의 ‘방식’에 따를 것을 요구하며, 그 방식은 물질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의 기득권이 거대하다는 점을 그만두고라도 기존 정치인들이 훨씬 능숙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싸워서 그들에게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과연 혁명운동의 기회를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람시의 용어로 말한다면,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대항해 합법적 정치공간에서 벌이는 진지전이 과연 그들과 싸워 이기는데 적합한 전술형태일까? 그것은 이기기 위해선 부르주아지보다 좀더 부르주아적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난점을 안고 있는 사태는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운동을 통해 확보한 합법적 공간을 포기하고 계속 지하로 달리는 노선을 고집해야 할까? 그거야말로 ‘좌익 소아병’이라고 비판받던 사람들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합법적 공간과 합법적 활동의 관념을 바꾸지 않고는, 아니 합법과 비합법으로 정치적 공간을 사유하는 지반 자체를 바꾸지 않고는 이 난점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합법공간의 확장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근본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결코 근본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묵시적으로, 그리고 편의적으로 나름의 대답을 한 것 같다. 가령 합법 공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권에 들어가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민중당이나 합법정당이 아니라 기존 보수정당(심지어 한나라당!)을 선택함으로써, 합법적 공간이 요구하는 바에 충실히 따라갔다. 기존의 모든 비합법 지하조직을 합법화하고자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해소의 길을 걸었던 한노당(준비위)의 시도는 이런 난점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기는커녕 사태를 통해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합법정당을 전부라는 부르주아적 대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결정적인 와해를 야기했던 극적인 사례였다. 그렇다면 합법적 정당을 단지 지하조직의 분견대로 간주하는 것이 이러한 난점을 피할 수 있을까?

  어쨌건 이러한 질문과 근본적으로 대결하지 않는 한, 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앞서 말했던 난점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럽이나 일본에서 사회당처럼 ‘성공’했던 경우에조차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부르주아적 정당의 하나가 되고 만다는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사실 합법적 공간의 문제는 단지 정당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또한 합법적 공간의 딜레마를 피할 수 없었던 던 것 같다. 가령 민주노총은 이와 다른 경로로 합법화가 갖는 난점을 다른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 알다시피 1999년까지 불법단체였던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 들어 합법화을 쟁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아가 민주노총은 노사정 위원회라는 코포라티즘적 체제의 중심적 한 축이 됨에 따라 정부와 ‘사용자’의 파트너로서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합법적 공간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짐에 따라 민주노총은 앞서와 어느 정도 유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즉 합법적 공간에서의 힘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합법공간의 다른 두 축인 ‘사용자’와 ‘정부’의 협조자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라면 민주노조운동이 받아들이기 힘든 그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합법적 공간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이점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합법적 공간은 그 공간이 요구하는 게임의 규칙, 게임의 방식을 제시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민주노총이 노사정 위원회에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은 명료하다곤 하기 어려워도 이러한 상황이 던지는 질문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과 대결하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 해도 말이다. 이 질문과 대결하지 않고서 당면한 딜레마를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합법적 활동의 개념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의 형태 자체, 그리고 그것의 활동방식 자체를, 아니 노동운동의 위상이나 의미 자체를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시민운동의 경우에는 이런 동요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87년 이후 시민운동의 발전은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민주정부’나 ‘참여정부’ 이후에는 시민운동이 정부의 정책이나 재벌의 활동 등에 대한 비판적 견제세력이 되었고, 비정부조직으로서 거버넌스의 한 요소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으며, 그 결과 시민운동 단체는 ‘운동권’에서 정부나 정계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총리나 장관은 물론 심지어 국정원 내부에까지 소위 ‘운동권’ 인사들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와 나란히 시민운동은 ‘공식소송’처럼 법에 근거하여 정부나 재벌의 불법행위를 따지고 비판 내지 ‘고발’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혹은 문제가 많은 법에 대해 법의 정당성을 따지고 개정하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라는 또 다른 법적 소송에 기대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 모든 과정은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고 법이 정권의 직접적 도구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되면서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거꾸로 그것은 시민운동이 법에 기초한 운동이지 그것을 전복하는 운동이기를 그쳤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시민운동가들에 의해 통상 ‘비현실적’이라는 말과 동일시되는--문제와 다른 차원에서 좀더 현실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운동이 법을 기반으로 삼고 법적 고발의 형식을 반복하게 됨에 따라, 법적 판결을 최종적 판단으로 삼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탄핵,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개폐 등이 모두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귀착되었을 뿐 아니라, 이라크 파병문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 운동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사안이 법적 판결에 의해 운동 자체가 해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양상의 가장 극적 형태는 새만금 사업에 대한 투쟁이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을 많은 사람들이 혼신을 다해 싸웠고 그 성과 또한 환경과 생태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전환시킬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운동이, 대법원의 어이없는 판결 하나로 해소되고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법이 운동의 상위에서 운동에 대해 판단하고 운동은 그것을 존중하고 그 판결에 따르는 현상, 운동 자체마저 사법화되고 있는 것이다. 법관들은 고시공부만으로 세상을 만났기에 법 바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좋든싫든 법의 경계를 침범하고 위반하는 운동들을 통해 법 바깥을 고려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운동은 역으로 법 안에 안주하게 됨에 따라 법적 통치의 게임이 현실이나 운동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법적 관점에서보아도 사태는 매우 비관적인 결과로 귀결되고 있는 것 같다. 법정 드라마가 TV시청자의 관심마저 끌게 되고, 모든 문제를 법적 소송의 문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문제로 귀착되는 미국의 상황이 이러한 사태의 멀지 않은 미래라고 하면 과장일까?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은 합법적 공간이 제공하는 대답, 즉 합법적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고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확보한다는 대답에 충실했지만, 그것이 던지는 질문을 듣지 못했고 그것이 야기하는 딜레마조차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익적 사유는 가능한가?


  운동과 사유의 지반을 가장 심층적인 층위에서 뒤흔들고 뒤바꿔버린 사건은 87년 6월 항쟁과 전혀 다른 외부에서 왔다. 90~91년의 사회주의의 붕괴가 그것이다. 단절된 운동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전국적 전위정당의 건설을 시도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그 모든 꿈과 희망을 와해시키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서도 스스로 던진 적이 없던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찾아내고 발빠르게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능성, 혹은 맑스주의적 사상의 무모성, 혹은 혁명의 꿈 자체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었을 게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저 꼴 난 사회주의보다는 나으며, 그나마 덜 나쁜 체제라는 식의 생각, 혹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사회민주주의가 그나마 적절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거기 포함된 또 다른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전에 “맑스주의와 근대성” 서론에서 개인적인 상황과 체험의 형식으로 쓴 적이 있는 것이지만, 사회주의 붕괴는 무언가를 확고하고 확신하게 해주는 대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동시에 던지는 사건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에서 혁명운동 내지 변혁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 맑스주의라는 사상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념 아닌 삶의 문제였기에, 그래서 이념도 사상도 없이 운동했기에, ‘자생성’과 ‘아마추어주의’, ‘자족성’ 등으로 비판되었던 것이 아닌가? 삶 전체를 걸게 만들었던 현실과 사태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삶을 걸고 가려던 길이 갑자기 끊어지고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난 것이다. 손쉬운 대답이나 발빠른 대안을 찾는 사람이라면 널 나쁜 길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미련하게 거기에 삶 전체를 걸었던 사람, 항상 근본적으로 사유하려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아갈 수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발빠른 변신을 시도한 사람들과 달리, ‘붕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던 길을 의연해 계속하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태에 대해 좀더 진지했었다고 믿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것과 반대로 이념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삶에 진지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맑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대비시키고, ‘진정한 사회주의’와 ‘잘못된 사회주의’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도 좋을까? 스탈린에 의해 폐기된 사회주의 이론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으로 우회하는 것으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저 사태가 강력한 당혹의 힘으로 힘껏 던지고 있는 질문에 귀막는 것은 아니었을까?

  좋든싫든 사회주의의 붕괴는 혁명이나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사유되던 삶의 문제, 새로운 삶의 방식의 문제가 근본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사유되지 않은 채’ 혹은 ‘사유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혁명이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될 것을 요구하는 사태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혁명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한편으론 맑스주의 사상 자체에 대해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의 역사란 어떻게 말을 해도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진행되어 온 것인데도, 맑스주의는 그 붕괴한 역사의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지났다는 사회주의가 어째서 붕괴했고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대체 맑스주의는 자신의 이름과 결부된 이 역사를 어째서 이해할 수조차 없는가? 그것은 맑스주의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맑스주의자는 맑스주의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형적 배열을 넘어서, 역사철학적 종말/목적으로서 공산주의의 관념을 넘어서 자본주의와 다른 종류의 관계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형태로 현재로부터 분리되고 유예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맑스 말대로 현재 시제의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로서 코뮨주의를 다시 사유하는 것, 아마도 이런 과제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코뮨적 관계, 코뮨적 구성체를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라는 이전의 개념으로부터 분리하여 다시 정의하고 다시 사유하는 것.

  다른 한편, 그것은 자본주의와 외연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근대’ 내지 ‘근대성’에 대해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의 근대적 인간들, 근대적 통제체제, 근대적 관리체제들이 그대로, 혹은 좀 더 거대하게 확대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근대성’이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근대 사회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이 시기 맑스주의자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문제의식이 한국 사회에서 근대성의 형성과 결부된 많은 연구들과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푸코의 그것을 포함하여, 이러한 연구들은 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전통적인 사회구성체론과 다른 측면에서 ‘근대’라고 불리는 사회구성체에 대한 연구였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상관적이며 서로를 규정한다. 한편으로 사회주의가 근대적이었다면, 그것을 방향짓고 그것을 인도하던 이념인 맑스주의 역시 근대적이었을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맑스주의 안에서 근대적 요소들, 혹은 맑스주의의 근대적 지반은 대체 어떤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 근대적 지반을 넘어서는 사유는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 맑스주의의 사상적 지반이었던 노동의 인간학 내지 휴머니즘, 그것의 경제학적 형태인 노동가치론, 계산가능성의 사회적 전제로서 화폐적 형식, 그리고 생산성으로 생산력을 대체하고 그런 의미의 생산성 발전을 진보로 정의하는 공리주의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진보관념, 그리고 생산의 사회화를 계산능력의 사회화로 치환하고는 계산과 계획을 통해 정의되는 사회주의의 관념 등 모든 것들이 근본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다른 한편 맑스주의를 통해 근대성의 경계를 다시 사유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긍정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 근대적 삶의 방식, 근대적 주체형태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주체형태를 근대와의 대결지점에서 사유하고 창안하는 것이 또 하나 모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었을까?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으로 대체되어 이해되는 ‘근대의 종언’ 내지 ‘탈근대 사회’의 도래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근대 이후 세계의 요소를 발견하고 확장하며 현재화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근대 내지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는 그것의 외부들을 창안하고 구성하려는 시도로서 코뮨주의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이러한 질문들과 대결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좌익적 사유가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아니 이러한 대결을 통해 새로운 이론적 사유를 밀고 나갈 수 있다면, 사회주의 붕괴야말로 거꾸로 진정 좌익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는다. 기성의 것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으로서 보수주의와 반대로, 사회적 상황 내지 사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확보된 안정적 요소들에 대해서조차 전복의 힘을 작용시키는 것으로서 좌익적 사유를 정의한다면 말이다. 이전의 사회주의가 결코 사유되지 않은 혁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충분히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할 때, 비로소 혁명에 대해 충분하게 사유하고 혁명을 향해 전위--‘아방가르드’라는 의미에서--적인 실험과 실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5. 문화주의의 시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문화’에 관한 관심이 부상하고, 문화이론이 이전의 ‘경제이론’을 대신할 듯한 이론적 구도가 만들어진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라캉이나 푸코 등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읽히기 시작했으며, 그에 이어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이론이 널리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최소한 외환위기사태가 발생했던 1997년까지 이는 이론적 영역에서 지배적인 경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라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그 공백을 문화이론이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화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거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혹자는 긍정적으로, 혹자는 부정적 내지 냉소적으로.

  일단 현상적인 측면에서 사태가 그러했다는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긍정적인 면이 있었음 또한 사실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갖춘 통일적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에 의해 다른 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닫혀 있던 상황이 해소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대립적 지점이 있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한 사유의 개방은 자본주의 내지 근대에 대한 맑스적 사유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보드리야르나 리요타르가 프랑스 공산당을 왼쪽에서 비판하던 ‘좌파’였으며 그의 이론 역시 그런 좌익적 문제설정에서 시작된 것이었음은 잊혀진 채, 모든 ‘거대이론의 종말’이란 형태로 사소한 것에 집중하게 된 시대의 선언으로 읽히거나, 시뮬라시옹이라는 과잉실재의 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문화가 지배하게 된 시대에 대한 선언으로 읽혔던 게 아닐까? 매체나 문화의 강력한 힘에 도취된 ‘날라리’ 이론. 이는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푸코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갖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잊혀진 채, 경제를 담론이 대신하고 국가권력을 미시권력이 대신하는 문화이론으로 간주되었던 게 아닐까?

  명시적으로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며, 68혁명을 이론화한 것으로 간주되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에 반하는 날라리 문화이론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 시기 이론적 지형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거기에는 이전의 맑스주의와 다른 모든 이론을 맑스주의에 반하는 이론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대답’으로 간주하려는 의지가 일종의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화이론’ 내지 ‘문화주의’란 말이 이러한 의지와 나란히 가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경제이론 내지 경제주의로 간주되었던 유물론과 대비되는 명칭이었다는 점에도 적지 않게 기인하는 듯하다.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이론 역시 이와 유사하게 어떤 근본적 질문보다는 이전의 이론을 대신할 대답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프롤레타리아트 없는 운동의 가능성, 혁명 없는 운동의 불가피성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을까?

  1997년 이른바 IMF사태가 또 하나의 변곡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도 속에서 그것은 잘나가던 ‘문화’의 화려함을 밀치고 ‘경제’가 다시 삶의 일차적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가령 1998년 “진보평론”이 적어도 그 창간의 시점에서는 ‘신/구’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나, 2003년 개최된 제1회 맑스코뮤날레가 백화점식 나열이란 비판을 들을 정도로 넓은 편폭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전의 이론적 지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맑스주의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헤게모니를 얻을 수 없었고, ‘정통’이란 이름의 분할과 배제의 이론적 메커니즘 역시 되살아날 수 없었다. ‘문화이론’이란 이름의 이론들 또한 앞선 시기와 같은 주도권을 유지할 순 없었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확보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어느 하나가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립의 강도가 완화되며 만들어진 이 거리 속에서 경제주의와 문화주의, 맑스주의와 ‘문화이론’을 가르던 경계는 와해되었고, 새로운 이론적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 이론이 대답 아닌 질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맑스주의 진영 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비록 모두가 그랬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혁명에 대해,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맑스주의 붕괴 이후의 좌익적 사유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맑스주의 안에서 새로운 분화와 분기의 지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정보가치를 둘러싸고 노동가치론 자체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하고, 맑스주의에서 노동의 인간학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제국주의를 대신한 제국의 개념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고, 레닌주의적 당조직을 대신하는 네트워크 식의 조직이, 혹은 평의회 식 사회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대신하는 사회주의적 세계화가 새로운 토론의 대상들로 떠올랐다는 것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자율주의나 아나키즘, 푸코나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단순한 거부나 지지의 방식을 넘어서 이론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문화주의’는? 잘 모르겠다.



6. 전선의 이동, 혹은 소수자의 정치학


  박정희 체제 이래 한국의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을 분할하고 결집시키던 적대의 구도는 이른바 ‘민주/반민주’의 대립이었다. 상이한 이해,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어도, 독재정권에 대해 반대하며 투쟁할 의사가 있다면, 모두가 민주/반민주를 가르는 전선에서 민주의 편에 선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는 87년 이후, 혹은 더 뒤로 잡아도 양 김씨의 집권이후에는 유효성이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정치적 대립을 전체화하는 전선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이후의 정치 전반을 규정하는 새로운 전선의 형태는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다. 분명히 정치투쟁, 혹은 계급투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래서 가령 이전에는 관제동원에 지나지 않아 거의 무의미하던 우익단체의 행동이 새로이 ‘자발적’ 운동의 형태를 취하고 기독교 단체들의 우경화가 아주 뚜렷하게 진행되는 한편, 대중운동 역시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로 모아주고 집약해주는 대립의 형태는 뚜렷하지 않았다. 즉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을 대체한 다른 전선의 형태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투쟁은 빈발하고 다양한 형태의 운동과 대결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전선으로 결집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세력들간의 대결과 확장되지 않는 상태, 그래서 지원과 지지의 형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세력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하나의 전선으로 응집되지는 않는 상황, 그것이 우리가 87년 이후 통과한 시기를 특징지어준다. 다양한 투쟁들은 있지만 그 투쟁들이 응축되어 하나의 전선, 하나의 ‘주요모순’으로 응축되지 않는 상황, 그래서 각각의 투쟁들은 각각의 해당지점에서 각개약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상황, 아마도 알튀세르라면 이를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물론 미군반대운동과 대통령 선거로 대중운동이 강력하게 집중되었던 2002년이나, 탄핵을 둘러싸고 국민 전체가 양분되어 대결하던 시기를 들어 응축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2002년의 사태는 대중의 흐름이 강력하게 형성되어 가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월드컵과 반미운동, 대통령 선거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투쟁, 전혀 다른 대립의 지점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응축이 수반되는 과잉결정이 아니라 응축이 없이 다양한 투쟁이 상이한 지점에서 진행되는 과소결정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거기서 하나로 결집된 것은 모순이나 전선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흐름 자체였다. 그것은 다양한 세력이나 투쟁을 응집하는 단일한 전선이 가시화된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흐름의 공간을 통해 단일한 대중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전선, 새로운 대결의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대결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대결해야 할 하나의 중심적인 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종류의 적들과 대결하는 새로운 종류의 대중을, 새로운 종류의 운동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로운 대결의 지점은 다른 곳에서, 그리고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양극화’와 결부되어 있다. 특히 IMF 사태 이후 이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이전과 다른 점은 양극화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두 계급으로의 분해가 아니라, 각각의 내부에서조차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율은 1998년 각각 6.5%와 5.2%였던 것이 2004년에는 9.4%와 4.1%로 벌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이나 일자리와 관련해서 더욱 현저하다. 1998년 중소기업이 고용한 인력은 전산업고용인구의 75.3%였고 그 사람들에게 지불된 임금은 전체임금의 76.2%였던 반면, 2003년에는 고용비중이 87%로 늘어났지만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은 전체 임금의 65.8%로 줄어들었다. 이는 중소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이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으며, 반대로 대기업 고용인력의 임금이 그만큼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 일자리 역시 상위 수준의 일자리와 하위 수준의 일자리가 모두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반면 중간수준의 일자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좀더 분명한 것은 전체 고용인구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매우 급속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4년 8월 전체 노동자의 반이 넘는 56%가 비정규직 형태의 일자리에 고용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급속하게 분화 내지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의 비율은 70%에 이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60% 정도에 머물고 있으며, 4대보험이나 퇴직금, 상여금, 유급휴가 등 다른 급여적 요소들 역시 정규직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다(고병권, “한미FTA와 한국사회의 양극화”, “한미FTA 국민보고서”, 그린비, 2006).

  이러한 양극화는 맑스주의자라면 자본주의 사회 어디서나 발견하던 것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지금 진행되는 양극화는 고전적인 맑스주의 계급이론에서 말하는 양극화와 크게 다르다. 고전적인 계급이론에서 그것은 중간계급인 쁘띠 뿌르주아지가 일부 소수는 부르주아계급으로,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 분해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 지금의 양극화는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간의 실질적인 격차를 만들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그것과 다르다. 중간계급만 분해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자신도 두 층으로 분할--아직은 분해라고 해야 할지, 분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나 중간층 역시 유사하게 양극화되고 있다는 점이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할은 단지 경제적이고 객관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2000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의 배타적인 태도로 아주 유명하다. 이는 현대자동차 등의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해 보여준 배타적인 태도와 더불어 2000년대 노동운동의 지형을 규정하는 아주 근본적인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노동운동 자체도 경제적 양극화의 선을 따라 분할되며 양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간부나 민주노총 간부의 ‘비리’ 사건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이 이젠 이익을 확보하고 따로 챙기는 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노동자 내부에서 정규적인 일자리를 갖고 높은 임금을 받아 안정적인 생활을 확보한 주류적인(major) 노동자와 비정규적이고 낮은 임금, 불안정한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소수적인(minor) 노동자로의 분할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소수적인 노동자의 문제는 단지 노동자 내부에서의 분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힘들고 위험한데 임금마저 낮아 한국인들이 피하는 최하위층 일자리를 담당하는, 이미 40만을 넘어서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에서 소수적인 노동자층의 핵심적인 요소다. 여기에 태생적으로 시장에 취약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해야 하는 농민들, 남성들에 비해 어디서나 2차적이고 저급한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여성 등등의 수많은 소수적인 층, 소수적인 집단들이 여러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수가 많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확보한 이권이나 이득이 많다는 의미에서 ‘다수적인(major)' 층과, 수는 많지만 이권이나 이득이 적다는 의미에서 ’소수적인‘ 층의 대립이 점점더 많은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그 대립의 양상 역시 본격화되고 있다.

  이상의 사태를 요약하면, 여러 영역에서 다수자(이른바 ‘주류’)와 소수자간의 분할과 대립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결국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이 현재 한국 사회를 양분하는 주요모순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반민주의 전선’이 ‘다수자/소수자의 전선’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아직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대립이 하나의 전선으로 응축되는 과잉결정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는 이러한 상황을 빠르게 가속화하게 되지 않을까? IMF 이후의 구조조정이 비정규직이나 소수자를 급격하게 양산하기 시작했음을 안다면, 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수반될 한미FTA가 이러한 사태를 매우 강하게 밀어붙이며 다양한 소수자들을 하나로 응집시키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 노무현 정권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이유를 이러한 전선의 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투쟁을 통해 집권했을 뿐 아니라 탄핵사태라는 위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노무현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어떤 개혁도 이루어낸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은 ‘진보’라고 믿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유효하게 실행된 정책은 모두 진보진영에 반하는 ‘보수적’ 정책 일색이었다. 새만금이나 천성산 문제처럼 자신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도 모두 뒤집었고, 언론개혁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하지 못했으며, 국가보안법처럼 거의 다 죽은 악법조차 의회에 과반수를 갖고서도 폐지하지 못했다. 그린벨트를 과감하게 풀어 개발주의를 가속화했고, 스스로 공언하던 아파트 원가공개조차 포기했고 거꾸로 부동산 가격을 이전 어느 정권보다 급속하게 올려놓았다. 미국과 거리를 두던 초기의 입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미군기지의 확장을 비롯한 미군의 새로운 세계전략에 파트너가 되어주었고, 진보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몇 안되는 이라크 파병국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모든 진보진영이 일치하여 반대하는 한미 FTA를 미친 ‘곤조’ 하나로 밀어붙였고, 덕분에 견원지간이던 보수언론이나 보수정치인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믿음 자체는 거짓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왜 노무현은 자신이 선택한 정책이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이 진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서 있는 곳은 예전과 같은 곳 그대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진영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싸우던 곳에 그대로 서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도덕적 정당성’은 단지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이러한 전선 상의 위치에 대한 자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그가 민주진영의 사람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을 만큼 훌륭한 일원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해도(그게 사실인지도 지금은 의문이지만) 사회적 대결의 양상을 규정하는, 즉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전선이 이동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인사라는 것이 ‘진보적’이라고 말할 어떤 이유도 제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양김씨 주변에 있었기에 자동으로 ‘반독재’ 진영에 속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대개 보수파임이 분명해졌으며, 거꾸로 과거 운동권에 속했던 사람들이 보수파 정객이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전선이 이동하는 경우, 민주/반민주의 이편에 있다고 해도, 다수자에 속하는 경우 전선의 저편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한국통신 노조처럼 민주노동운동의 중요한 일부였지만, 소수자들의 적대세력이 된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 의도적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기에,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많은 노조들, 특히 대기업노조들이 그러하듯이.

  여기서 정말 웃기는 코메디는 전선이 이동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어도 보수파가 될 일군의 사람들이, 이제는 진보를 그만두고 보수가 되겠다고 전선 저편 멀리 훌쩍 이동한 것이다. 그들은 새로이 보수파가 되려는 의도를 갖고 이동했기에 자신이 ‘뉴 라이트’이라고 믿지만, 그들이 옮겨간 곳은 민주/반민주 전선의 저편, 즉 ‘올드 라이트’가 서 있던 곳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그들이 제시하는 역사해석 등이 한결같이 낡은 올드 라이트의 그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에서 ‘뉴 라이트’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 진보라고 믿으면서 그 자리에 선채 전선의 저편으로 이동한 사람들, 노무현이나 주류층이 된 노동조합이다.

  여기서 진보적이 되기 위해 ‘소수자’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너무 쉽게 대답을 구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새로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듣지 못하고, 그것을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 대답은 상황이 조금 달라지면 또 금방 잘못된 대답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보기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두 계급으로의 분해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신이 다수자와 소수자로 분할되고 있다면, 그리하여 전투적인 역사를 갖는 민주노조조차 가던 길을 그대로 가는 한 다수자가 되고 만다면, 노동운동이 진보적이기 위해선, 즉 노동운동이 ‘소수적’(이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민주/반민주가 정권이라는 근대적 총체성의 담지장치를 통해 작동하기에 반독재 세력의 결집과 응집이 자연스럽고 용이했지만, 소수화는 여러 영역으로 분할되어 진행될 뿐 아니라 시장의 힘이라는 분산적 권력에 의해 진행되기에 응집과 결집이 어렵다면,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투쟁은 언제나 과소결정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전통적 의미에서 권력의 전복을 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연대나 동맹의 관념이 이제는 계급이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로질러 작동해야 하는 것일까? 등등.

  그렇다면 6월 항쟁이라는 미완의 혁명, 미완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방식으로는 혁명적이기는 물론 진보적이기도 어렵다는 것을 굳이 따로 지적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20주년 기념’의 형식으로 현재를 어떤 식으로 6월 항쟁과 연속적인 지점에 두고 연결하기보다는, 차라리 6월 항쟁과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변환을 포착하는 것이 정작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것이 6월 항쟁의 정신에 더 충실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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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웹진 땡땡

          http://www.arte.ne.kr/webzine/webzine_view.asp?idx=46

 

 

미술평론가 박신의 선생님

정리 : 신정수
(웹진 콘텐츠팀, yamchegong@naver.com)





전효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계신데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이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기억하기로는 작년에 문예진흥원 심사 이후에 약간의 ‘시비’가 있었고,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했던 것에 대해 나는 ‘다모 폐인’이다 이런 식으로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지요. 선생님 개인을 정의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박신의: 어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벨기에 현대만화전을 위해 내한한 벨기에 만화작가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제 명함만 보고는 어떻게 만화 자리에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저보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일단 그들에게 저는 만화를 예술로서 접근한다고 했고, 그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 비디오아트,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영역까지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모든 예술적 성과를 함께 나눠 갖기 위해 효율적인 예술제도와 매개장치를 연구하고, 문화정책을 고민한다고 하였더니 금방 이해하더군요. 문제는 장르나 전공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문화적 관심의 확장과 사회적 연속성을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다면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전문성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고 봅니다. 지난 해 문예진흥원 지원 심사를 할 때 어떤 분이 저를 80년대 방식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구분하면서 색깔론 비슷하게 몰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저는 ‘다모폐인이다’라고 대답했어요. 당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문화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 아니겠어요? 저는 직업상으로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예술경영을 가르치고 미술평론과 전시 기획을 하고, 문화정책과 문화기획 전반을 다루는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미술평론가’라는 지위를 택하고 싶어요. 미술의 확장과 문화적 힘을 믿는 사람, 늘 당대적 담론에 반응하며 현장감을 가지고 문화적 실천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의 ‘미술평론가’ 말입니다. 또 겸손하고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직함이기도 하잖아요?

전효관: 미술평론가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계시잖아요?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신 건가요?

박신의 : 물론 미술평론이라는 활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저로서는 평론 작업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의식과 쟁점을 풍부하게 살려주는 작업이라고 봐요. 그리고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사회적 지위, 그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실천력을 살려주고, 이를 많은 사람들이 나눠갖도록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러니 미술평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예술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되고, 또 사회적 실천도 고민하게 되죠. 그런 과정이 결국 예술작품을 매개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살피는 일이 되면서 사회적 개입이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요.

전효관: 제가 책이나 글로 보면서 아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관심 영역과 관심의 확장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신의: 정말 그래요. 저는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여러 영역의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치지요. 경희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학과를 맡다보니, 또 제가 경영대학원 소속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된 것도 있어요. 최근 저는 문화예술기반시설에서의 인력문제를 다룬 연구를 하면서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하신 분들과 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노동의 문제와 경영의 문제에서 문화 영역을 덧붙여 냈지요. 또 도시계획 연구자들이 새로운 도시계획 개념으로 문화기획(Cultural Planning)을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쟁점이 드러나게 되면서 제가 그 부분에 합류하게 된 것도 같은 경우지요. 이런 식으로 문화예술 외부의 영역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제가 여러 일을 하는 것이 된 셈인데, 사실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문화부분이 고려되지 않다가 이제야 문화가 들어오는 시점이 된 것이라는 변화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미술사를 통해 그런 간학문적인(interdisciplinary) 측면을 훈련받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저는 미술사를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입장인데, 예술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적 구조를 보고, 욕망을 읽으며, 모순을 관찰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겐 미술사가 단순히 지식체계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사유 모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을 해석하고 해체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전효관: 미술의 위기, 이에 관한 대응들과 관련된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박신의: 요즘에는 ‘미술’이 너무 위축되어, 미술교과모임의 미술 선생님들도 미술이라는 이름 대신 ‘시각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시각문화’는 저 역시 80년대 말부터 미술이 시시각각 변하는 시각문화 혹은 영상문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하게 제안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미술을 대체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시각문화 관점에서 ‘새로운 미술교육’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만일 미술의 위기를 말한다면, 저는 미술교육을 실행하는 ‘제도의 위기’이지 그 자체의 위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술이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보수적인 제도적 틀에 안주하는 것 역시 미술제도의 위기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지요. 저는 미술을 제대로 교육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틀로 미술을 갱신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판단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전효관: 선생님께서 미술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시대 환경 변화에서 미술의 대응이 약했다고 봅니다. 한국, 외국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미술은 쇠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역별로 넓혀가려는 자체 노력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박신의: 지난 해 11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문화정책회의에 참석하면서, 저는 프랑스 미술대학 교육 프로그램 혁신을 주제로 미술학교 방문을 신청해서 간 적이 있어요. 이미 프랑스에서는 변화하는 매체 현상에 대응하면서 미술교육을 시각문화 중심으로 바꿔가고 있었어요. 5년 기간의 미술학교 기간 중 1학년과 2학년의 기초과정을 마치면 3년 차부터는 사진과 비디오, 3-D 디자인 및 영상, 음향작업 등을 배울 수 있게 해요. 다시 말하면 그리고, 만들고, 표현한다는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바탕으로 기술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미술교육의 범주로 포괄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하면 한국의 미술교육은 여전히 낡은 미술개념을 고수하는 입장이지요. 저로서는 새로운 세대들이 게임과 디지털 카메라에 익숙한데, 이들에게 여전히 그리고 만드는 작업만을 교육한다면, 미술교육 자체가 억압이 된다고 봐요. 게다가 뉴미디어라는 것이 여전히 예술적 표현과 생각의 기록과 질문을 던지기 위한 ‘도구’인 한, 결코 미술을 대체하는 요소가 아니겠지요. 오히려 뉴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교육적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전효관: 미술사에서 그런 선례가 있을까요?

박신의: 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 구성주의와 생산주의 예술, 그리고 그 흐름을 서구의 바우하우스에서 받아들인 라즐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의 예술 개념을 모델로 두고 있어요. 생소하실지 모르겠는데, 모홀리-나기는 우리가 잘 아는 파카 만년필을 디자인 한 사람이에요. 그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 바우하우스를 운영하는 데 보탰다고 하지요. 그는 회화에서 조각, 사진, 영화, 건축, 디자인 분야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이어서 오늘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컴퓨터를 가지고 많은 작업을 했을 겁니다. 또한 독일 바우하우스와 미국의 바우하우스를 이끌기도 한 훌륭한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요. 그는 바우하우스 총서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1924년에 발표한 사진과 영화 등의 미디어에 대한 예술적 사고는 차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로 남고 있답니다. 제가 이 예술가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큰 의미를 두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다면적 능력을 믿는다는 점이고, 또 예술이 한 사회의 문화생산에 기여함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미디어 발달에 대해 능동적인 대응을 보여준 태도에 있구요. 저는 예술이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까운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미디어 역시 그런 생체리듬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전효관: 이제 문화예술교육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죠.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박신의: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의 생체리듬을 일깨워주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답하고 싶어요. 다시 말하면 생체리듬이란 열려진 것이어서, 이를 통해 인간은 다면적인 활동과 복합적인 자기 개발이 충분히 가능한데, 오히려 학교교육이 그 가능성을 닫아버렸다고 보는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최근 문화예술교육의 실행을 위한 연구작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수혜 개념에 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실제로 어떤 문화예술이고, 어떤 교육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 부분이 아쉽더군요. 저는 예술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편이고, 또 그래서 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갖고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발견’이라는 교육 효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생체리듬을 찾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는 전 과정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예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에서 우월함이 있다고 봐요.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나 계량적인 방식으로 따져보면, 월드컵과 촛불시위로 모인 사람들의 엄청난 공감대와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생체리듬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게 마련이지요. 엄청난 상상력이 수반된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계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는 인간에 대한 신뢰의 기초를 예술가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란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가 없이도 사회가 돌아갈 법도 한데, 왜 그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갖는 걸까요. 그리고 왜 그 결과물을 나눠 갖자고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그럴까요. 그것은 세계를 바꿔갈 수 있는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일 저보고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라면, 제 모델은 바로 이런 구조를 갖습니다.

전효 관: 선생님 말씀에 재미있는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인간의 이성 능력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내 휴머니즘은 어떤 에너지에 대한 신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박신의: 사회는 설득력 있는 ‘공감대’로 인해 바뀌지, 측량 가능한 ‘수치’로 바뀌지는 않거든요. 아시잖아요. 아주 소수라도 내용의 핵심과 설득력을 가지면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된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앞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어요. 선생이 말하는 에너지를 믿는 휴머니즘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래서라도 문화예술교육의 경우도 어떤 예술인가, 어떤 교육인가를 먼저 논의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예술교육을 단순히 예술 향유의 기회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일테면 국립현대미술관을 무료로 입장하도록 한다거나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어린이 그림대회를 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기회 확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에너지를 찾아가도록 하는 교육말입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말하는 ‘예술과 삶의 결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술가라는 전문집단만의 예술을 거부하는 의미이거든요. 그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찾는다는 행동도 일반 대중의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다는 의미이구요. 저는 예술가와 아마추어의 생체리듬을 찾는 공동의 프로젝트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이 행해지길 바라고, 그런 가운데 진정한 에너지가 사회의 힘으로 쌓이는 과정을 보고 싶은 겁니다.

전효관: 어떤 과정과 사례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부연해서 설명해주세요.

박신의: 새로운 예술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네요. 흔히 새로운 예술하면 형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지만, 저로서는 작품 제작의 방법, 작품 감상의 방법, 작품이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법, 작품이 소통하는 경로의 문제에서 새로운 접근을 갖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현대미술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을 감상한다는 개념은 매우 약화되었지요. 현대미술의 혁명은 개념 예술, 즉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예술이 등장하면서 주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어요. 예술가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주고 대중들이 참여하면서 작품을 같이 만들어 가는 개념이 가능하지요. 현재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만날 수 있는 개념미술의 한 사례를 들어볼께요. 공원에 가면 헤드폰이 걸려있고, 누구나 헤드폰을 끼면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와 공원을 산책하도록 가이드를 합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실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헤드폰에서 동일한 바람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립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무심코 지나는 바람소리를 의식적으로 듣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목소리는 오른편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 멈춰 왼편 아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따라하면 그 아래에서 자그마한 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죠. 이렇듯 예술가는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어떤 ‘주의력’을 제공합니다. 그 주의력이 사회의 모순을 읽는 주의력이 되고, 휴머니즘을 헤아리는 주의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가끔 예술가들을 정의할 때, ‘주의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주의력이 왜 중요한지, 왜 그것을 존중해야 하는지, 한번 같이 생각해 볼까요?

전효관: 현실적인 딜레마가 있을 수 있지요.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버린 공간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해야 하고, 그런 교육을 해줄 예술가의 결합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특히 문화예술교육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말이죠.




박신의: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개념과 철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방안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리라 봅니다. 학교 교육이 바뀌면서 가능할테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예회관, 문화의 집 등의 문화기반 시설을 통한 교육, 공공성을 살린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등이 모두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에는 기획자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봐요. 최근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인력풀을 만든다고 하던데, 인력풀을 직접적인 교육자로서 예술가에 집중하지 말고, 매개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자가 포함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전효관: 문화교육, 예술교육 명명법이 다르고, 그 명명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요. 관객 개발의 입장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부터 교육개혁의 맥락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도 있지요.

박신의: 저는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을 나누는 입장에는 전적으로 반대입니다. 전문인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고, 대중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은 예술 개념을 전통적인, 혹은 모더니즘적 구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예술인을 위한 교육도 매우 중요하지요. 그것은 한 사회의 경쟁력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문인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교육 자체로 전제된다는 것은, 교육 개념에서 대중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이 문제를 새로운 예술에서 풀었지만, 실제로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문화예술교육, 즉 대중을 새로운 예술행동의 주체로 유도하면서 도시문화를 바꾸는 것, 문화환경을 바꾸는 것도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강의식 개념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제 수업은 일종의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고 봐요. 다시 말하면 프로젝트는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협업으로 생각을 바꿔가고 현실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해 가는 것이지요. 문화예술교육의 프로그램을 고민할 때에도 ‘프로젝트’ 모델을 고민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에 대해서라면, 뭔가 모험을 하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육의 효과가 엄청난 것임에도, 그것을 통해 전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감히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예 이번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위험한’ 일을 저질러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생체리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이에요.

전효관: 현실적으로 사회적 사실로는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를 접근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언젠가 선생님과 같은 토론회에서도 문화의 민주주의, 예술의 질 문제 이런 것이 쟁점이 되었지요.

박신의: ‘문화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프랑스 문화정책에 기조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도 전문 예술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술이 바탕이 되고, 예술이 사회화되는 것이 문화이며, 그 문화가 사회적, 제도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문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만일 이것이 편의적으로 해석되면 예술의 힘을 배제할 수 있다고 봐요. 직업적으로, 제도적으로 전문가와 아닌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갖는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화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여야 한다고 봅니다.

전효관: 사회 참여를 통해서, 정책 개입을 통해서 느끼시는 점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박신의 : 저는 정책평가위원회에서 정부 업무와 정책에 접하면서 궁극에는 모든 사회문제가 ‘문화적으로’ 밖에는 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카드대란이나 유해식품, 청소년 범죄와 모든 사회문제들이 언제까지 형사처벌 강화로만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외교력과 통일의 문제도 문화적 접근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난 주말에 KBS TV를 통해 일본의 한류 열풍을 르포르타주한 프로를 아주 인상깊게 보았는데, 그런 실질적인 문화현상과 교류가 노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만난 현실 정치적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화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회의 치유를 이루어보자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인식 수준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저는 문화는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기득권자들, 혹은 진정한 좌절감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문화는 여전히 향유할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라도 대중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문화가 마음에 닿아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기대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효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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