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20주년사업 추진위원회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대토론회 - 상상변주곡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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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와 사상의 변화

이진경(철학자, 서울산업대 교수)




1. 역사적 대답, 질문의 역사


  우리는 지금 지난 20년의 지나간 역사에 대해 묻고 있다. 무엇을 묻고 있는가?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에 하나의 문턱이 되었던 87년 6월 항쟁의 의의에 대해, 그 항쟁으로 인해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사회의 변화양상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묻고 있는가?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그 동안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확보하지 못한 것을, 혹은 다행히도 확보한 것을 문턱이 된 과거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역사적 형식의 질문으로 무언가의 ‘의의’를 묻는다는 것은 이렇게 되기 십상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역사 안에 확고한 하나의 자리를 부여하고,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 그것과 계열화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역사적 의의를 묻는 통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 경우 질문은 이미 대답을 포함한다. 질문에는 언제나 이미 반쯤은 대답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에 할당된 역사적 자리, 그것은 이미 그것과 연결되는 모든 사건들의 의미를 이미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흔히 그것에 이미 만족한다. 그것이 얻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설정된 지난 20년이란 기간은 그 사건을 통해 이미 '해석의 지평‘이 만들어진 기간이고, 그 지평을 통해 다듬어진 시간이며, 그리하여 그 안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대개는 그 중심적 사건으로 수렴하게 마련인 시간이다. 그러나 정말 그 20년이 6월 항쟁으로 귀속되는 시간이었을까? 그 20년간의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과 계열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차라리 그렇게 제공된 대답들에 대해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87년 6월 항쟁 이후 20년간의 사회·사상적 변화에 대해 논의하자는 제안에 대해 나는 그것을 질문의 역사로서 검토하자고 말하고 싶다. 운동의 관점, 아니 좀더 넓게 말해 실천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질문이란 사건과 사유가 만나는 접점이고 사회와 운동이, 사태와 실천이 만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사유되었나를, 아니 사유되어야 하는가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질문들이 당시에는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서 사태가 좀더 진행된 연후에야 비로소 명료하게 된 것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사회와 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무엇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며’ 사유하기보다는, 그것을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대결하며’ 사유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 혁명적 실천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87년은 두 개의 사건에 의해 과잉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80년 광주항쟁이다. 그것은 6월 항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되는 군사정권의 행로를 처음부터 결정지은 사건이었고, 그 정권과 대결하는 운동으로 하여금 혁명적 강밀도를 가질 것을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혁명적 봉기, 군사적 폭력과의 대결, 해방구적 상황, 그리고 거대한 패배, 80년 광주항쟁 이후 운동은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어야 했다.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자 하지 않고선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것은 이렇게 묻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다른 하나는 멀리 70년의 전태일 분신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노동자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는 어떠한 운동도 삶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그리하여 삶에 진지하거나 운동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노동자에 대해 노동운동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이었다. 오랜 잠행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에 관해 질문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노동에 대해, 노동자와 민중들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아마도 85년 대우어패럴 노조 연대파업과 서노련·인노련의 창립은 이 두 가지 사건의 효과가 응집되며 만들어낸 사건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 그리고 군사정권의 폭력과 대결하며 존속할 수 있는 조직, 그리고 ‘부분운동’을 넘어서 ‘전체 운동’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운동. 물론 알다시피 서노련과 인노련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던진 것이든 아니든, 그들을 통해, 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삼게 된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 그것을 위한 직업적 혁명가의 조직, 아마도 이것이 그 질문을 통해 얻어낸 대답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종종 비판하기도 하듯이, 질문을 통해 사유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수입’된 대답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답이 너무 빠르고 너무 쉽게 도출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사유 없이 도입된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배우고 논문을 쓰는데 원용되는 이론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실천의 이론이 ‘사유 없이’ 도입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비록 그 사유가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음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우연이었을까? 동형적인 이론적 배치가 출현한다.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 등, 후진국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이론들에 대비하여, 노동자계급의 사상으로서 맑스주의 이론의 보편성을 계급분화 양상을 통해 논증하면서, 이론적 수용에서 ‘사상적 원칙’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 논문이 제출되면서, 다기한 이론들 사이에 배제와 선별의 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혁명적 실천을 위한 혁명적 이론, 혁명 전략을 고민하기 위한 이론적 연구가 아카데믹한 공간에서 벗어나 운동의 장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한 대답의 시도이기 이전에, 맑스-레닌주의적 지반 위에서 혁명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주체들을 하나의 대열로 결집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대답은 그토록 많이들 달랐지만, 그 모두가 질문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었던 하나의 이론적 장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87년 6월 항쟁은, 물론 그 직접적인 불씨는 고문치사사건과 호헌선언이었지만, 그것은 점점 가속화되며 진행되던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로 응축되며 폭발하게 한 하나의 계기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3. 정치의 새로운 공간


  87년 항쟁의 직접적 결과물은 정치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야당은 물론 운동권의 정치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합법적 정치공간이 만들어졌다. 합법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를 내서 공개적인 정치적 장에서 선전활동을 했던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운동단체들이 합법적인 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조합의 활동 역시 합법성의 폭이 확대되었다.

  어느 정도 시차를 두기는 하지만 그람시의 이론을 비롯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의의를 강조하는 이론들이 조명을 받게 되고, 그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내지 한국의 정치공간을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조건의 산물일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획득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개념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란 점에서 6월 항쟁이라는 사건의 결과물에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대답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새로이 확장된 공간에 대한 사유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사유였다. 아마도 새로운 정치적 공간에 진출하여 그것을 이용해야 했던 한,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했고, 따라가야 했던 사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합법공간에서의 정치는 합법공간이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가령 합법공간을 가장 소극적으로 규정하여 합법적인 선전의 장으로 본다고 해도, 거기서 선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을 요구할 뿐 아니라 다양한 진입장벽과 작동방식으로 인해 항상-이미 부르주아지나 보수층에 유리하게 선규정된 게임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합법적 공간을 장악한 부르주아적 매체들과 대항해서 값은 싸지만 빈약한 선전물로 대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시작하면서부터 지는 게임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합법공간에서의 선전이 취하게 될 경로는 어느 정도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해도, 그 경로에서 크게 이탈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주 적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맑스의 말을 빌어, “무엇을” 선전하는가보다 차라리 “어떻게” 선전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부르주아지와 대결하는 지점에서 “어떻게” 대결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지점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선전만이 아니라 정치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중당을 비롯한 초기의 합법적 정당활동이나 대통령 선거 참여가, 그 성과가 없었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합법적 공간에서 혁명은 그만두고라도 변혁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하기는 그 성과가 매우 적었음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합법적 정치공간은 거기에 부합하는 정치활동의 ‘방식’에 따를 것을 요구하며, 그 방식은 물질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의 기득권이 거대하다는 점을 그만두고라도 기존 정치인들이 훨씬 능숙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싸워서 그들에게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과연 혁명운동의 기회를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람시의 용어로 말한다면,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대항해 합법적 정치공간에서 벌이는 진지전이 과연 그들과 싸워 이기는데 적합한 전술형태일까? 그것은 이기기 위해선 부르주아지보다 좀더 부르주아적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난점을 안고 있는 사태는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운동을 통해 확보한 합법적 공간을 포기하고 계속 지하로 달리는 노선을 고집해야 할까? 그거야말로 ‘좌익 소아병’이라고 비판받던 사람들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합법적 공간과 합법적 활동의 관념을 바꾸지 않고는, 아니 합법과 비합법으로 정치적 공간을 사유하는 지반 자체를 바꾸지 않고는 이 난점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합법공간의 확장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근본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결코 근본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묵시적으로, 그리고 편의적으로 나름의 대답을 한 것 같다. 가령 합법 공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권에 들어가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민중당이나 합법정당이 아니라 기존 보수정당(심지어 한나라당!)을 선택함으로써, 합법적 공간이 요구하는 바에 충실히 따라갔다. 기존의 모든 비합법 지하조직을 합법화하고자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해소의 길을 걸었던 한노당(준비위)의 시도는 이런 난점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기는커녕 사태를 통해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합법정당을 전부라는 부르주아적 대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결정적인 와해를 야기했던 극적인 사례였다. 그렇다면 합법적 정당을 단지 지하조직의 분견대로 간주하는 것이 이러한 난점을 피할 수 있을까?

  어쨌건 이러한 질문과 근본적으로 대결하지 않는 한, 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앞서 말했던 난점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럽이나 일본에서 사회당처럼 ‘성공’했던 경우에조차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부르주아적 정당의 하나가 되고 만다는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사실 합법적 공간의 문제는 단지 정당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또한 합법적 공간의 딜레마를 피할 수 없었던 던 것 같다. 가령 민주노총은 이와 다른 경로로 합법화가 갖는 난점을 다른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 알다시피 1999년까지 불법단체였던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 들어 합법화을 쟁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아가 민주노총은 노사정 위원회라는 코포라티즘적 체제의 중심적 한 축이 됨에 따라 정부와 ‘사용자’의 파트너로서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합법적 공간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짐에 따라 민주노총은 앞서와 어느 정도 유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즉 합법적 공간에서의 힘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합법공간의 다른 두 축인 ‘사용자’와 ‘정부’의 협조자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라면 민주노조운동이 받아들이기 힘든 그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합법적 공간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이점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합법적 공간은 그 공간이 요구하는 게임의 규칙, 게임의 방식을 제시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민주노총이 노사정 위원회에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은 명료하다곤 하기 어려워도 이러한 상황이 던지는 질문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과 대결하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 해도 말이다. 이 질문과 대결하지 않고서 당면한 딜레마를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합법적 활동의 개념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의 형태 자체, 그리고 그것의 활동방식 자체를, 아니 노동운동의 위상이나 의미 자체를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시민운동의 경우에는 이런 동요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87년 이후 시민운동의 발전은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민주정부’나 ‘참여정부’ 이후에는 시민운동이 정부의 정책이나 재벌의 활동 등에 대한 비판적 견제세력이 되었고, 비정부조직으로서 거버넌스의 한 요소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으며, 그 결과 시민운동 단체는 ‘운동권’에서 정부나 정계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총리나 장관은 물론 심지어 국정원 내부에까지 소위 ‘운동권’ 인사들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와 나란히 시민운동은 ‘공식소송’처럼 법에 근거하여 정부나 재벌의 불법행위를 따지고 비판 내지 ‘고발’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혹은 문제가 많은 법에 대해 법의 정당성을 따지고 개정하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라는 또 다른 법적 소송에 기대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 모든 과정은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고 법이 정권의 직접적 도구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되면서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거꾸로 그것은 시민운동이 법에 기초한 운동이지 그것을 전복하는 운동이기를 그쳤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시민운동가들에 의해 통상 ‘비현실적’이라는 말과 동일시되는--문제와 다른 차원에서 좀더 현실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운동이 법을 기반으로 삼고 법적 고발의 형식을 반복하게 됨에 따라, 법적 판결을 최종적 판단으로 삼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탄핵,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개폐 등이 모두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귀착되었을 뿐 아니라, 이라크 파병문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 운동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사안이 법적 판결에 의해 운동 자체가 해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양상의 가장 극적 형태는 새만금 사업에 대한 투쟁이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을 많은 사람들이 혼신을 다해 싸웠고 그 성과 또한 환경과 생태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전환시킬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운동이, 대법원의 어이없는 판결 하나로 해소되고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법이 운동의 상위에서 운동에 대해 판단하고 운동은 그것을 존중하고 그 판결에 따르는 현상, 운동 자체마저 사법화되고 있는 것이다. 법관들은 고시공부만으로 세상을 만났기에 법 바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좋든싫든 법의 경계를 침범하고 위반하는 운동들을 통해 법 바깥을 고려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운동은 역으로 법 안에 안주하게 됨에 따라 법적 통치의 게임이 현실이나 운동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법적 관점에서보아도 사태는 매우 비관적인 결과로 귀결되고 있는 것 같다. 법정 드라마가 TV시청자의 관심마저 끌게 되고, 모든 문제를 법적 소송의 문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문제로 귀착되는 미국의 상황이 이러한 사태의 멀지 않은 미래라고 하면 과장일까?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은 합법적 공간이 제공하는 대답, 즉 합법적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고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확보한다는 대답에 충실했지만, 그것이 던지는 질문을 듣지 못했고 그것이 야기하는 딜레마조차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익적 사유는 가능한가?


  운동과 사유의 지반을 가장 심층적인 층위에서 뒤흔들고 뒤바꿔버린 사건은 87년 6월 항쟁과 전혀 다른 외부에서 왔다. 90~91년의 사회주의의 붕괴가 그것이다. 단절된 운동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전국적 전위정당의 건설을 시도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그 모든 꿈과 희망을 와해시키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서도 스스로 던진 적이 없던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찾아내고 발빠르게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능성, 혹은 맑스주의적 사상의 무모성, 혹은 혁명의 꿈 자체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었을 게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저 꼴 난 사회주의보다는 나으며, 그나마 덜 나쁜 체제라는 식의 생각, 혹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사회민주주의가 그나마 적절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거기 포함된 또 다른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전에 “맑스주의와 근대성” 서론에서 개인적인 상황과 체험의 형식으로 쓴 적이 있는 것이지만, 사회주의 붕괴는 무언가를 확고하고 확신하게 해주는 대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동시에 던지는 사건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에서 혁명운동 내지 변혁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 맑스주의라는 사상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념 아닌 삶의 문제였기에, 그래서 이념도 사상도 없이 운동했기에, ‘자생성’과 ‘아마추어주의’, ‘자족성’ 등으로 비판되었던 것이 아닌가? 삶 전체를 걸게 만들었던 현실과 사태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삶을 걸고 가려던 길이 갑자기 끊어지고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난 것이다. 손쉬운 대답이나 발빠른 대안을 찾는 사람이라면 널 나쁜 길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미련하게 거기에 삶 전체를 걸었던 사람, 항상 근본적으로 사유하려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아갈 수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발빠른 변신을 시도한 사람들과 달리, ‘붕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던 길을 의연해 계속하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태에 대해 좀더 진지했었다고 믿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것과 반대로 이념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삶에 진지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맑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대비시키고, ‘진정한 사회주의’와 ‘잘못된 사회주의’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도 좋을까? 스탈린에 의해 폐기된 사회주의 이론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으로 우회하는 것으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저 사태가 강력한 당혹의 힘으로 힘껏 던지고 있는 질문에 귀막는 것은 아니었을까?

  좋든싫든 사회주의의 붕괴는 혁명이나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사유되던 삶의 문제, 새로운 삶의 방식의 문제가 근본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사유되지 않은 채’ 혹은 ‘사유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혁명이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될 것을 요구하는 사태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혁명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한편으론 맑스주의 사상 자체에 대해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의 역사란 어떻게 말을 해도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진행되어 온 것인데도, 맑스주의는 그 붕괴한 역사의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지났다는 사회주의가 어째서 붕괴했고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대체 맑스주의는 자신의 이름과 결부된 이 역사를 어째서 이해할 수조차 없는가? 그것은 맑스주의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맑스주의자는 맑스주의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형적 배열을 넘어서, 역사철학적 종말/목적으로서 공산주의의 관념을 넘어서 자본주의와 다른 종류의 관계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형태로 현재로부터 분리되고 유예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맑스 말대로 현재 시제의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로서 코뮨주의를 다시 사유하는 것, 아마도 이런 과제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코뮨적 관계, 코뮨적 구성체를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라는 이전의 개념으로부터 분리하여 다시 정의하고 다시 사유하는 것.

  다른 한편, 그것은 자본주의와 외연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근대’ 내지 ‘근대성’에 대해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의 근대적 인간들, 근대적 통제체제, 근대적 관리체제들이 그대로, 혹은 좀 더 거대하게 확대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근대성’이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근대 사회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이 시기 맑스주의자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문제의식이 한국 사회에서 근대성의 형성과 결부된 많은 연구들과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푸코의 그것을 포함하여, 이러한 연구들은 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전통적인 사회구성체론과 다른 측면에서 ‘근대’라고 불리는 사회구성체에 대한 연구였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상관적이며 서로를 규정한다. 한편으로 사회주의가 근대적이었다면, 그것을 방향짓고 그것을 인도하던 이념인 맑스주의 역시 근대적이었을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맑스주의 안에서 근대적 요소들, 혹은 맑스주의의 근대적 지반은 대체 어떤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 근대적 지반을 넘어서는 사유는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 맑스주의의 사상적 지반이었던 노동의 인간학 내지 휴머니즘, 그것의 경제학적 형태인 노동가치론, 계산가능성의 사회적 전제로서 화폐적 형식, 그리고 생산성으로 생산력을 대체하고 그런 의미의 생산성 발전을 진보로 정의하는 공리주의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진보관념, 그리고 생산의 사회화를 계산능력의 사회화로 치환하고는 계산과 계획을 통해 정의되는 사회주의의 관념 등 모든 것들이 근본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다른 한편 맑스주의를 통해 근대성의 경계를 다시 사유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긍정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 근대적 삶의 방식, 근대적 주체형태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주체형태를 근대와의 대결지점에서 사유하고 창안하는 것이 또 하나 모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었을까?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으로 대체되어 이해되는 ‘근대의 종언’ 내지 ‘탈근대 사회’의 도래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근대 이후 세계의 요소를 발견하고 확장하며 현재화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근대 내지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는 그것의 외부들을 창안하고 구성하려는 시도로서 코뮨주의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이러한 질문들과 대결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좌익적 사유가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아니 이러한 대결을 통해 새로운 이론적 사유를 밀고 나갈 수 있다면, 사회주의 붕괴야말로 거꾸로 진정 좌익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는다. 기성의 것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으로서 보수주의와 반대로, 사회적 상황 내지 사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확보된 안정적 요소들에 대해서조차 전복의 힘을 작용시키는 것으로서 좌익적 사유를 정의한다면 말이다. 이전의 사회주의가 결코 사유되지 않은 혁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충분히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할 때, 비로소 혁명에 대해 충분하게 사유하고 혁명을 향해 전위--‘아방가르드’라는 의미에서--적인 실험과 실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5. 문화주의의 시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문화’에 관한 관심이 부상하고, 문화이론이 이전의 ‘경제이론’을 대신할 듯한 이론적 구도가 만들어진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라캉이나 푸코 등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읽히기 시작했으며, 그에 이어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이론이 널리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최소한 외환위기사태가 발생했던 1997년까지 이는 이론적 영역에서 지배적인 경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라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그 공백을 문화이론이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화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거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혹자는 긍정적으로, 혹자는 부정적 내지 냉소적으로.

  일단 현상적인 측면에서 사태가 그러했다는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긍정적인 면이 있었음 또한 사실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갖춘 통일적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에 의해 다른 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닫혀 있던 상황이 해소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대립적 지점이 있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한 사유의 개방은 자본주의 내지 근대에 대한 맑스적 사유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보드리야르나 리요타르가 프랑스 공산당을 왼쪽에서 비판하던 ‘좌파’였으며 그의 이론 역시 그런 좌익적 문제설정에서 시작된 것이었음은 잊혀진 채, 모든 ‘거대이론의 종말’이란 형태로 사소한 것에 집중하게 된 시대의 선언으로 읽히거나, 시뮬라시옹이라는 과잉실재의 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문화가 지배하게 된 시대에 대한 선언으로 읽혔던 게 아닐까? 매체나 문화의 강력한 힘에 도취된 ‘날라리’ 이론. 이는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푸코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갖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잊혀진 채, 경제를 담론이 대신하고 국가권력을 미시권력이 대신하는 문화이론으로 간주되었던 게 아닐까?

  명시적으로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며, 68혁명을 이론화한 것으로 간주되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에 반하는 날라리 문화이론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 시기 이론적 지형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거기에는 이전의 맑스주의와 다른 모든 이론을 맑스주의에 반하는 이론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대답’으로 간주하려는 의지가 일종의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화이론’ 내지 ‘문화주의’란 말이 이러한 의지와 나란히 가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경제이론 내지 경제주의로 간주되었던 유물론과 대비되는 명칭이었다는 점에도 적지 않게 기인하는 듯하다.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이론 역시 이와 유사하게 어떤 근본적 질문보다는 이전의 이론을 대신할 대답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프롤레타리아트 없는 운동의 가능성, 혁명 없는 운동의 불가피성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을까?

  1997년 이른바 IMF사태가 또 하나의 변곡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도 속에서 그것은 잘나가던 ‘문화’의 화려함을 밀치고 ‘경제’가 다시 삶의 일차적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가령 1998년 “진보평론”이 적어도 그 창간의 시점에서는 ‘신/구’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나, 2003년 개최된 제1회 맑스코뮤날레가 백화점식 나열이란 비판을 들을 정도로 넓은 편폭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전의 이론적 지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맑스주의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헤게모니를 얻을 수 없었고, ‘정통’이란 이름의 분할과 배제의 이론적 메커니즘 역시 되살아날 수 없었다. ‘문화이론’이란 이름의 이론들 또한 앞선 시기와 같은 주도권을 유지할 순 없었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확보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어느 하나가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립의 강도가 완화되며 만들어진 이 거리 속에서 경제주의와 문화주의, 맑스주의와 ‘문화이론’을 가르던 경계는 와해되었고, 새로운 이론적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 이론이 대답 아닌 질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맑스주의 진영 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비록 모두가 그랬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혁명에 대해,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맑스주의 붕괴 이후의 좌익적 사유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맑스주의 안에서 새로운 분화와 분기의 지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정보가치를 둘러싸고 노동가치론 자체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하고, 맑스주의에서 노동의 인간학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제국주의를 대신한 제국의 개념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고, 레닌주의적 당조직을 대신하는 네트워크 식의 조직이, 혹은 평의회 식 사회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대신하는 사회주의적 세계화가 새로운 토론의 대상들로 떠올랐다는 것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자율주의나 아나키즘, 푸코나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단순한 거부나 지지의 방식을 넘어서 이론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문화주의’는? 잘 모르겠다.



6. 전선의 이동, 혹은 소수자의 정치학


  박정희 체제 이래 한국의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을 분할하고 결집시키던 적대의 구도는 이른바 ‘민주/반민주’의 대립이었다. 상이한 이해,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어도, 독재정권에 대해 반대하며 투쟁할 의사가 있다면, 모두가 민주/반민주를 가르는 전선에서 민주의 편에 선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는 87년 이후, 혹은 더 뒤로 잡아도 양 김씨의 집권이후에는 유효성이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정치적 대립을 전체화하는 전선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이후의 정치 전반을 규정하는 새로운 전선의 형태는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다. 분명히 정치투쟁, 혹은 계급투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래서 가령 이전에는 관제동원에 지나지 않아 거의 무의미하던 우익단체의 행동이 새로이 ‘자발적’ 운동의 형태를 취하고 기독교 단체들의 우경화가 아주 뚜렷하게 진행되는 한편, 대중운동 역시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로 모아주고 집약해주는 대립의 형태는 뚜렷하지 않았다. 즉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을 대체한 다른 전선의 형태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투쟁은 빈발하고 다양한 형태의 운동과 대결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전선으로 결집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세력들간의 대결과 확장되지 않는 상태, 그래서 지원과 지지의 형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세력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하나의 전선으로 응집되지는 않는 상황, 그것이 우리가 87년 이후 통과한 시기를 특징지어준다. 다양한 투쟁들은 있지만 그 투쟁들이 응축되어 하나의 전선, 하나의 ‘주요모순’으로 응축되지 않는 상황, 그래서 각각의 투쟁들은 각각의 해당지점에서 각개약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상황, 아마도 알튀세르라면 이를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물론 미군반대운동과 대통령 선거로 대중운동이 강력하게 집중되었던 2002년이나, 탄핵을 둘러싸고 국민 전체가 양분되어 대결하던 시기를 들어 응축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2002년의 사태는 대중의 흐름이 강력하게 형성되어 가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월드컵과 반미운동, 대통령 선거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투쟁, 전혀 다른 대립의 지점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응축이 수반되는 과잉결정이 아니라 응축이 없이 다양한 투쟁이 상이한 지점에서 진행되는 과소결정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거기서 하나로 결집된 것은 모순이나 전선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흐름 자체였다. 그것은 다양한 세력이나 투쟁을 응집하는 단일한 전선이 가시화된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흐름의 공간을 통해 단일한 대중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전선, 새로운 대결의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대결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대결해야 할 하나의 중심적인 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종류의 적들과 대결하는 새로운 종류의 대중을, 새로운 종류의 운동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로운 대결의 지점은 다른 곳에서, 그리고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양극화’와 결부되어 있다. 특히 IMF 사태 이후 이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이전과 다른 점은 양극화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두 계급으로의 분해가 아니라, 각각의 내부에서조차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율은 1998년 각각 6.5%와 5.2%였던 것이 2004년에는 9.4%와 4.1%로 벌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이나 일자리와 관련해서 더욱 현저하다. 1998년 중소기업이 고용한 인력은 전산업고용인구의 75.3%였고 그 사람들에게 지불된 임금은 전체임금의 76.2%였던 반면, 2003년에는 고용비중이 87%로 늘어났지만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은 전체 임금의 65.8%로 줄어들었다. 이는 중소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이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으며, 반대로 대기업 고용인력의 임금이 그만큼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 일자리 역시 상위 수준의 일자리와 하위 수준의 일자리가 모두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반면 중간수준의 일자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좀더 분명한 것은 전체 고용인구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매우 급속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4년 8월 전체 노동자의 반이 넘는 56%가 비정규직 형태의 일자리에 고용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급속하게 분화 내지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의 비율은 70%에 이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60% 정도에 머물고 있으며, 4대보험이나 퇴직금, 상여금, 유급휴가 등 다른 급여적 요소들 역시 정규직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다(고병권, “한미FTA와 한국사회의 양극화”, “한미FTA 국민보고서”, 그린비, 2006).

  이러한 양극화는 맑스주의자라면 자본주의 사회 어디서나 발견하던 것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지금 진행되는 양극화는 고전적인 맑스주의 계급이론에서 말하는 양극화와 크게 다르다. 고전적인 계급이론에서 그것은 중간계급인 쁘띠 뿌르주아지가 일부 소수는 부르주아계급으로,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 분해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 지금의 양극화는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간의 실질적인 격차를 만들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그것과 다르다. 중간계급만 분해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자신도 두 층으로 분할--아직은 분해라고 해야 할지, 분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나 중간층 역시 유사하게 양극화되고 있다는 점이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할은 단지 경제적이고 객관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2000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의 배타적인 태도로 아주 유명하다. 이는 현대자동차 등의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해 보여준 배타적인 태도와 더불어 2000년대 노동운동의 지형을 규정하는 아주 근본적인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노동운동 자체도 경제적 양극화의 선을 따라 분할되며 양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간부나 민주노총 간부의 ‘비리’ 사건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이 이젠 이익을 확보하고 따로 챙기는 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노동자 내부에서 정규적인 일자리를 갖고 높은 임금을 받아 안정적인 생활을 확보한 주류적인(major) 노동자와 비정규적이고 낮은 임금, 불안정한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소수적인(minor) 노동자로의 분할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소수적인 노동자의 문제는 단지 노동자 내부에서의 분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힘들고 위험한데 임금마저 낮아 한국인들이 피하는 최하위층 일자리를 담당하는, 이미 40만을 넘어서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에서 소수적인 노동자층의 핵심적인 요소다. 여기에 태생적으로 시장에 취약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해야 하는 농민들, 남성들에 비해 어디서나 2차적이고 저급한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여성 등등의 수많은 소수적인 층, 소수적인 집단들이 여러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수가 많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확보한 이권이나 이득이 많다는 의미에서 ‘다수적인(major)' 층과, 수는 많지만 이권이나 이득이 적다는 의미에서 ’소수적인‘ 층의 대립이 점점더 많은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그 대립의 양상 역시 본격화되고 있다.

  이상의 사태를 요약하면, 여러 영역에서 다수자(이른바 ‘주류’)와 소수자간의 분할과 대립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결국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이 현재 한국 사회를 양분하는 주요모순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반민주의 전선’이 ‘다수자/소수자의 전선’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아직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대립이 하나의 전선으로 응축되는 과잉결정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는 이러한 상황을 빠르게 가속화하게 되지 않을까? IMF 이후의 구조조정이 비정규직이나 소수자를 급격하게 양산하기 시작했음을 안다면, 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수반될 한미FTA가 이러한 사태를 매우 강하게 밀어붙이며 다양한 소수자들을 하나로 응집시키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 노무현 정권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이유를 이러한 전선의 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투쟁을 통해 집권했을 뿐 아니라 탄핵사태라는 위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노무현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어떤 개혁도 이루어낸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은 ‘진보’라고 믿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유효하게 실행된 정책은 모두 진보진영에 반하는 ‘보수적’ 정책 일색이었다. 새만금이나 천성산 문제처럼 자신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도 모두 뒤집었고, 언론개혁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하지 못했으며, 국가보안법처럼 거의 다 죽은 악법조차 의회에 과반수를 갖고서도 폐지하지 못했다. 그린벨트를 과감하게 풀어 개발주의를 가속화했고, 스스로 공언하던 아파트 원가공개조차 포기했고 거꾸로 부동산 가격을 이전 어느 정권보다 급속하게 올려놓았다. 미국과 거리를 두던 초기의 입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미군기지의 확장을 비롯한 미군의 새로운 세계전략에 파트너가 되어주었고, 진보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몇 안되는 이라크 파병국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모든 진보진영이 일치하여 반대하는 한미 FTA를 미친 ‘곤조’ 하나로 밀어붙였고, 덕분에 견원지간이던 보수언론이나 보수정치인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믿음 자체는 거짓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왜 노무현은 자신이 선택한 정책이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이 진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서 있는 곳은 예전과 같은 곳 그대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진영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싸우던 곳에 그대로 서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도덕적 정당성’은 단지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이러한 전선 상의 위치에 대한 자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그가 민주진영의 사람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을 만큼 훌륭한 일원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해도(그게 사실인지도 지금은 의문이지만) 사회적 대결의 양상을 규정하는, 즉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전선이 이동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인사라는 것이 ‘진보적’이라고 말할 어떤 이유도 제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양김씨 주변에 있었기에 자동으로 ‘반독재’ 진영에 속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대개 보수파임이 분명해졌으며, 거꾸로 과거 운동권에 속했던 사람들이 보수파 정객이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전선이 이동하는 경우, 민주/반민주의 이편에 있다고 해도, 다수자에 속하는 경우 전선의 저편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한국통신 노조처럼 민주노동운동의 중요한 일부였지만, 소수자들의 적대세력이 된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 의도적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기에,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많은 노조들, 특히 대기업노조들이 그러하듯이.

  여기서 정말 웃기는 코메디는 전선이 이동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어도 보수파가 될 일군의 사람들이, 이제는 진보를 그만두고 보수가 되겠다고 전선 저편 멀리 훌쩍 이동한 것이다. 그들은 새로이 보수파가 되려는 의도를 갖고 이동했기에 자신이 ‘뉴 라이트’이라고 믿지만, 그들이 옮겨간 곳은 민주/반민주 전선의 저편, 즉 ‘올드 라이트’가 서 있던 곳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그들이 제시하는 역사해석 등이 한결같이 낡은 올드 라이트의 그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에서 ‘뉴 라이트’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 진보라고 믿으면서 그 자리에 선채 전선의 저편으로 이동한 사람들, 노무현이나 주류층이 된 노동조합이다.

  여기서 진보적이 되기 위해 ‘소수자’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너무 쉽게 대답을 구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새로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듣지 못하고, 그것을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 대답은 상황이 조금 달라지면 또 금방 잘못된 대답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보기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두 계급으로의 분해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신이 다수자와 소수자로 분할되고 있다면, 그리하여 전투적인 역사를 갖는 민주노조조차 가던 길을 그대로 가는 한 다수자가 되고 만다면, 노동운동이 진보적이기 위해선, 즉 노동운동이 ‘소수적’(이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민주/반민주가 정권이라는 근대적 총체성의 담지장치를 통해 작동하기에 반독재 세력의 결집과 응집이 자연스럽고 용이했지만, 소수화는 여러 영역으로 분할되어 진행될 뿐 아니라 시장의 힘이라는 분산적 권력에 의해 진행되기에 응집과 결집이 어렵다면,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투쟁은 언제나 과소결정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전통적 의미에서 권력의 전복을 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연대나 동맹의 관념이 이제는 계급이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로질러 작동해야 하는 것일까? 등등.

  그렇다면 6월 항쟁이라는 미완의 혁명, 미완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방식으로는 혁명적이기는 물론 진보적이기도 어렵다는 것을 굳이 따로 지적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20주년 기념’의 형식으로 현재를 어떤 식으로 6월 항쟁과 연속적인 지점에 두고 연결하기보다는, 차라리 6월 항쟁과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변환을 포착하는 것이 정작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것이 6월 항쟁의 정신에 더 충실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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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2007. 12. 24. 22:28

  며칠 전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요즘 너무 공부를 안한다고 하자

  이현식 박사가 그랬다.

  "나는 언제 공부를 해봤는지 기억도 안난다"고.

  그때는 그냥 우스개소리로 그냥 지나쳐 들었는데, 이는 공부쟁이들의 투정일 뿐이다.

  이 박사는 지난 여름에는 문학평론집 <곤혹한 비평>을 냈고, (이 책은 2007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년에는 연구논문집인 <제도사로서의 한국근대문학>과 <일제 파시즘 체제 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을 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민예총 문고로 <왜, 지역문화인가>를 냈다.

  '안'공부쟁이로서의 투정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이현식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부드러운 사람이다.

  술술 읽힐 수 있게 쉽게 쓴 이 책은,

  영문학을 공부하는 학부생이었던 그가 한국 근대문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는지

  그리고,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지역과 지역문화에 발을 들여놓게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지역'과 '문화', 그리고 '지역문화'에 대한 폭넓고도 간결한 생각을 전달한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건 아닌가, 조금 우려하면서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키워드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와 실천 가능한 대안 모색이다.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간간이 뒤적여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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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사진2007. 7. 12. 23:30
출처 떠나고 싶은 하루 | 돌돌
원문 http://blog.naver.com/ckdghkdi91/30019641145



 
 
 

 
 

 
 

 
 
 

 
 
 

 
 
 

 
 
 

 
 
 

 
 
 

 
 
 

 
 
 

 
 
 

 
 
 
 
 
 
 
Magnum Photo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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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사진2007. 7. 11. 11:00
사진을 본다는 것

빅 터 버긴(Victor Burgin)| "Looking at Photographs | 번역 : 이영준



글 로 쓰여진 것을 보지 않고 하루도 살 수 없듯이, 사진을 보지 않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러저러한 제도적인 맥락─언론, 가족스냅, 광고─을 통해 사진은 환경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형성하고/ 반영하고/ 변화시킨다. 사진의 일상적인 도구성은 아주 명백한데, 그것은 팔고, 알려주고, 기록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구성이 분명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사진적 재현이 보통의 세계, 바로 그 사진적 재현이1 만들어낸 세계 속에 묻혀버리는 점에 한해서만 분명하다. 최근의 이론은 사진이 “설명할 것 없음”이라는 영역속에서 그 작동방식을 감춰버린 영역 너머까지 사진을 따라간다.

예전에는 사진을 ‘예술’에 비추어서 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교육기관의 타성을 탓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사진의 일상적인 경험이라는 더 큰 부분에 그림자를 드리워 감춰버리는 빛의 원천이었다. 가장 많이 서술되는 이야기는 카메라의 발명이 불러 일으킨 ‘미술사’의 독특한 뉘앙스인데, 그것은 일련의 ‘거장들’, ‘명품들’, ‘운동들’이라는 친숙한 테두리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사진의 사회적 사실은 대체로 건드리지 않는 부분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회화와는 정적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고, 영화와는 카메라를 공유하고 있는 사진은 이 두가지 매체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사진을 이 두가지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마주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회화와 영화는 시간과 돈을 쓰게끔 하는 자발적인 행위의 결과로만 보이지만, 사진은 화랑에서 전시되거나 책으로 팔린다고 해도 대부분은 일부러 선택하여 보는 것이 아니며, 사진을 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진은 분명히 공짜로 볼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사진은 무료로 제공된다. 회화와 영화는 비판적 시선에 대한 대상으로 제시되지만 사진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진을 소통시키는 사람들간에도 별로 언급되거나 이론이 덧붙여지는 일 없이, 무료로 친숙하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진은 언어의 속성을 공유한다. ‘사진의 언어’에 대해 느슨하게나마 얘기한 것이 오랫 동안 흔한 일이었지만, 자연언어 이외의 소통의 수단에 대해서 언어학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체계적인 조사라도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와서의 일이다. 그런 초기의 ‘기호학적’ 연구와 그 결과는 사진 이론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호학 혹은 기호론은 기호에 대한 연구인데, 그 목표는 의미가 생겨나는 체계적인 규칙을 밝히는 것이었다. ‘구조주의적’ 기호론의 초기에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의 요소들>은 프랑스에서 1964년에 처음 나왔다2) ‘자연’언어(말하기와 글쓰기 같은 현상)와 시각적 ‘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을 찾는데 관심이 모아졌다. 이 시기의 연구는 사진이 이 세계 속의 사물을 지시하는데 쓰이는 유사성의 코드, 지시된 의미가 2차적인 의미의 체계가 되는 함의의 코드, 사진 속의 요소들의 병렬과, 연속한 다른 사진들 사이에 나타나는 요소들의 병렬에 덧붙는 ‘수사적’ 코드를 다루었다.3 의미론의 연구결과는 (영어로 된 모든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영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진들이 의존하고 있는 사진의 ‘언어’, (기술적 장치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단일한 의미체계는 없으며, 사진이 끌어 올 수 있는 코드들의 이질적인 복합체가 있을 뿐임을 밝혔다. 각각의 사진은 이런 코드의 다양성에 토대를 두고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 코드의 숫자와 유형은 이미지마다 틀리다. 이중 어떤 것은 (적어도 일차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사진 특유의 것도 있으며,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신체의 몸짓, 표정 등에 관한 코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율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진의 언어’는 언어 자체의 결정요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는 설명이나 제목이 붙어있지 않은 채 사용되는 사진은 거의 볼 수 없으며, 긴 글이 딸려 있거나, 그 위에 글의 카피가 덧붙여진 사진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무런 글이 덧붙여지지 않은 사진 조차도 그것이 보는 이에 의해 ‘읽혀질’ 때는 언어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을 가진 사진은 사회적으로 어둠에 덧붙여지는 의미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우리가 기분이 안 좋은 사람을 은유적으로 ‘우울하다’고 하듯이, 사진을 해석하는 요인들은 언어적이다).

사진을 알아본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사진은 ‘사진적 담론’이라는 차원에서 쓰여져 있는 텍스트이지만 이 담론은 다른 담론들 처럼 그 너머에 있는 다른 담론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진적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 처럼 복잡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가진 영역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인 지점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 이전의 다른 텍스트들이 죽 겹쳐져 있는 것이다. 사진이 전제로 하고 있는 이런 이전의 텍스트들은 자율적이다. 그들은 실제의 텍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만 그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텍스트에 대해서는 몸을 숨기고 있으며, ‘징후적으로’만 읽혀질 뿐이다 (사실, 프로이드의 글에 나타난 꿈에서처럼, 사진 이미지는 간명하다. 사람들이 그 효과를 다듬어서 광고에 사용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기호학은 사진을 대상-텍스트로 취급하여, ‘순수하게 시각적인’ 이미지는 낙원에서나 있을 수 있는 허구일 뿐임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이에 덧붙여서, ‘이미지’의 차원에서 사진에 덧붙여질 수 있는 특수성은 이미지와 그 의미를 의도하는 사회적 행위의 특수성 속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 보도사진은 역사적 연속의 가공되지 않은 연속성을 ‘뉴스’라는 생산물로 전환하며, 가족사진은 그 특질상 가족이라는 기구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한다. 사진을 다루는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주어진 재료는(역사적 연속, 가족 생활의 실존적 경험 등) 특정한 기술적 방법을 쓰고 특정한 사회적 기구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생산물의 유형으로 전환된다. 초기의 기호학이 사진에서 찾아낸 의미있는 ‘구조’는 스스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의 독특한 유형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의 문제는 저자/독자라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구성체와 연관하여 생각되야 하는 것인데, 그 구성체는 실제로는 동시에 공존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별개의 담론들을 통해 다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심리분석은 기호학이 역사적 결정과, 의미의 생산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를 파악하는데 가장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적 단계에서 기호학은 텍스트를 의미의 체계가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서 경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는 결정적인 의미가 생산되는 객관적인 영역으로 보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구조주의적 기호학은 코드화된 메시지와, 코드 ‘바깥에’ 머물면서 그런 메시지들에 코드를 덧붙이고 그것을 해독할 줄 아는 저자/독자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 저자/독자는 도구를 간편하게 집어들거나 내려 놓듯이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보면 심각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말하는 만큼, 언어도 우리를 ‘말한다’. 모든 사회적 제도─법적 제도, 윤리, 예술, 종교, 가족 등─에 걸쳐있는 모든 의미는 차이의 그물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그물망이란 통상의 의미론적 특징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데 따라서 생겨나는 작용인데, 언어학은 이런 의미론적 특징이 언어의 근본적 특성임을 보여주었다. 사회적 행위들은 유아기부터 언어처럼 구조화되는데, ‘자라난다’는 것은 언어 자체를 포함하는, 그리고 언어에 기초한 의미있는 사회적 행위의 복합체 속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상징질서(symbolic order)는 인간이라는 작은 동물이 사회적 인간이라는 존재, 즉 ‘다른 자들’관계의 체계속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 결정되어가는 영역이다. 상징질서의 구조는 개인 주체라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구성물에 방향과 형태를 부여하는데, 상징질서라는 넓은 의미에서 언어가 우리를 말한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징질서 속에 새겨져 있는 주체는 변화하는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문화적 체계 (일, 가족, 등등)안에서 기본적인 성적 충동이 나름대로 형성된 산물이다. 즉, 이런 각각의 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복수의 주체성들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체는 고전적인 기호학에서 생각하듯이 타고난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텍스트의 작용의 결과이며, 끊임없는 형성의 과정이다. 이런 형태의 주체는, 말하는 사람과 코드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을 거부하는 순간, 자신의 역사와 무의식을 초월하는 자율적 자아로서의 예술가라는 친숙한 모습을 내쫓아 버린다.

하지만 ‘초월적인’ 주체를 거부한다고 해서 주체나 그것을 형성하는 제도가 단순한 기계론적 결정론에 빠진다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제도는, 상징질서의 산물이면서, 또한 이 질서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기호론의 초기 저작들, 특히 바르트의 글들은 우리 사회의 사진으로 찍힌 모습의 의미를 지배하는 주도적인 신화의 언어적인 구조를 밝히려고 하였다. 더욱 최근의 이론은 사진속에 ‘언급된’ 것을 이데올로기가 전유(appropriate)하는 구조에 대해서 뿐 아니라, 언급을 수행하는 와중에 끼어 들어가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검토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이런 연구는 기술적인 장치 자체 속에서 구성되는 대상/주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4 사진의 의미체계는 고전적인 회화에서 같이, 장면과 보는이의 시선, 즉 대상과 그것을 보는 주체를 동시에 묘사한다. 사진의 이차원적이고 유사적인 기호는 기본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조를 가진 장치속에서 형성된다. (1826년에 니엡스가 최초의 사진을 찍은 카메라 옵스큐라는 렌즈에 의해 생긴 이미지를 거울을 통해 유리 스크린 위에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바로 현대의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의 방식이다.) 어떤 대상을 묘사하건 간에, 그 묘사의 방식은 독특한 ‘시점(point-of-view)’을 내포하는 기하학적 투사의 법칙을 따른다. 보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실은 카메라가 차지하고 있는 시점이다. 재현의 체계는 시점에다 프레임(이젤 회화와 벽화를 통해, 상인방 건축의 관습 속에 묻혀 있는 원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산)을 더한다. 프레임이라는 매개기구를 통해 이 세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일관성으로, 일련의 그림들, ‘결정적인 순간들’로 조직화된다.

재현의 구조─시점과 프레임─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 ‘시점’의 ‘마음의 프레임’). 어떤 텍스트의 체계보다도, 사진은 ‘거부할 수 없는 제의’로 나타난다. 사진장치의 특성은 수동적인 수용성을 능동적인 (비판적인) 읽기로 대체함으로써 사진 찍힌 대상이 사진 자체의 텍스트라는 성질을 감추도록 주체를 배치한다. “무엇일까요?”식의 퍼즐 사진(친숙한 대상을 이상한 각도에서 찍은 것)을 보면 우리는 몇 가지 가능한 대안들 중에서 골라야 한다는 것, 이미지 자체는 가지고 있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일단 사진 속의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사진은 그 순간 우리에게는 어떤 것으로 전환되어, 더 이상 밝고 어두운 톤과 불확실한 선과 애매한 모양을 지닌 혼란스러운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정체성, 즉 존재를 투여할 수 있는 어떤 ‘물건’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진에서 이러한 해독(decoding)과 투여는 즉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가 사진 속의 장면에 부여하는 전체성, 일관성, 정체성 등의 속성은 투사(projection)된 것이며, 빈곤한 현실을 거부하고 상상적인 완전함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상적인 대상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상상적’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보여지는 것,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실재계에 유사적이고 상상적인 것을 부여(investiture)하는 것은 자아의 구성에 있어서 초기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그것은 자크 라캉이 말했던, 인간의 형성에 있어서의 ‘거울 단계’라는 계기이다.5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자신의 몸을 조각나 있고 중심이 없는 어떤 것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이상적인 자아라는 형태를 통해 자기 신체의 잠재적인 통일성을 다른 신체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다가 투사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못하며, 아이는 그저 남일 뿐이다. (자신과 남의 분리는 나중에 언어의 세계, 즉 상징질서가 열릴 때 성의 구분을 알게 될 때 일어난다) 자기 정체성의 개념에 꼭 필요한 통일된 신체라는 생각이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현실을 거부함으로써만 생겨난 것이다 (불일치성, 분리의 거부).

어린이의 발달에 있어서 거울단계와 연관하여 두 가지 사실이 최근의 기호학 이론의 관심을 특히 끌었다. 우선, 심리학이 관찰한 바와 같은, 정체성의 형성과 이미지의 형성간의 상호관계는 (이 나이에 어린이의 시각은 신체적 행동의 능력을 앞선다.) 라캉을 주체성의 형성에 있어서 ‘상상적’ 기능에 대한 논의로 이끌었다. 둘째로, 어린이가 ‘상상적 질서’ 속에서 안정된 일관성에 입각하여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은 오해(misrecognition)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에 대하여 눈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렇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맥락에서, ‘시선’ 자체는 최근에 이론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자엠스 자셰가 1941년에 찍은 <자기 정원사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웨이블 장군>을 예로 들어보자. 이 35년 된 사진 속에 새겨져 있고 사진설명 (장군이 자기의 정원사를 지켜본다)속에 고정되어 있는 부계적(父系的) 제국주의의 즉각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오늘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 대상-텍스트를 1차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이루고 있는 대립하는 함의들이 드러날 것이다.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서양/동양이라는 대립 속에서 후자는 근본적인 ‘타자성’의 흔적을 감싼다. 혹은, 두 사람은 자본/노동의 대립관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명백함이 들어서는데, 이 장면의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그런 분석을 지나친 반응으로 치부해버려 그 효과를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잉여의 생산은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힘은 바로 그 순진함에 있다. 즉, 우리가 사진에서 어떤 것이던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확신은 보는 행위 자체에 있어서 우리가 끌려 들어가는 공모관계(complicity)를 은폐한다. 최근의 영화이론의 성과를 따라서,6 그리고 그 용어들을 받아들여, 우리는 사진 속의 네가지 기본적인 시선의 유형을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사진 찍을 만한’ 사건을 사진 찍는 카메라의 시선, 사진을 보는 이의 시선, 사진 속의 사람들(배우들)이 교환하는 이미지 텍스트 내부의 시선 (그리고 대상을 향한 배우들의 시선), 카메라를 향한 배우의 시선이 그것이다.


리 프리드렌더, 힐크레스크, 뉴욕 1970


자 셰의 사진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장군은 정원사를 바라보며, 정원사는 마치 이에 복종하듯이 자신의 응시를 땅으로 향한 채 장군의 시선을 받아들인다. 이미지를 더욱 더 읽어보면, 장군의 시선은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듯이, 즉 사진을 보는 주체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재현은 카메라의 시선을 주체의 시점과 동일시한다). 직업적인 모델이 아닌 사람들이면 누구나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이 정면의 응시는 우리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볼 때 흔히 보게 되는 응시이며, 우리는 그에 대해 나르시시즘적 동일시가 담긴 응시로 응수하게 된다 (사진 이미지에 있어서 그런 동일시에 대한 주요한 반대는 관음증이다). 장군의 시선은 우리의 시선과 일직선으로 맞서고 있으며, 정원사의 시선은 이 선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림자 속에 숨겨진 정원사의 얼굴은 (노동자는 여기서 문자그대로 아무 개성이 없다) 이미지를 보는 주체로부터 장군(상상적 동일시 속에서의 우리 자신의 힘과 권위)을 차단해버린다. 이런 움직임의 느낌은─절단하는 도구인─잔디 깎는 도구에 의해 더욱 확대되는데, 이 도구는 낫에 대한 연상, 그리고 그 위치로 말미암아 (사진은 우연의 일치 위에 지어진 텍스트이다) 남근(상호관계: 흑인의 성에 대한 백인의 공포/ 거세공포) 에 대한 연상을 응축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과도한 읽기에서 물러서서 이미지의 있는 그대로의 내용으로 주의를 돌려도 (실제로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같은 형상을 만나게 된다. 노동자는 장군과 그의 정원 ‘사이에 끼어 들며,’ 흑인은 문자 그대로 훼방을 놓는다. 여기서는 대략적으로만 시사될 뿐인 그런 중층적 결정은, 경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대상-텍스트의 함의들과 더불어, 정원사를 이단적인 것으로, 하나의 위협으로, 자기 자신의 땅에 대한 침입자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고려는 이데올로기의 중층결정에 있어서의 경험적인 것을 넘어선다.

재현(이데올로기적 의미의 생산에 있어서 주체를 공모관계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의 효과는 재현되는 단계(대상-텍스트로서의 사진이라는 단계)가 재현하는 단계(보는 주체의 단계)와 ‘매끈하게 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결합은 자셰의 사진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안에 쓰여진 이데올로기는 토대7가 되는 중심성이라는 주체의 위치로부터 읽혀진다. 리 프리들랜더가 찍은 <힐크레스트, 뉴욕> (1970)에서는 바로 이런 위치 자체가 공격받고 있다. 공격은 두가지 주요한 지점에서 비롯되고 있다. 첫째, 주체를 불러들여 스스로를 완성하는 원근법은 애매한 인물/배경 관계에 의해 부분적으로 흐트러져 있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의식적인 노력을 동원해야만 일관되고 단일한 위치/(모습)로 구성될 수 있다. 둘째, 이미지의 가운데에 있는 거울이라는 장치는 근본적인 애매함을 불러 일으킨다. 잘라진 머리와 어깨가 프레임의 밑바닥-중간에서 올라온다. 재현의 체계는 우리의 시점을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시키도록, 즉 거울에 비친 정면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훈련시켜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사진가의 모습이 비친 것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비친 모습─1/4로 쪼개진 인물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상적) 자기’/‘타자’의 상태 속에 있다─을 보고 있는지 확증해줄 아무 증거가 없다. 프리들랜더의 사진에서는 사진의 기술적인 장치와 현실 속의8 현상적인 흐름이 카메라의 주체적인 효과─통일되고 확실한 주체의 통일된 응시에 기초한 일관성─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거의, 그러나 아직 미치지 못하는─이미지는 (따라서 주체는) “잘 구성되어” 있다 (약간 다르기는 해도 자셰의 사진과 비슷하게). 우리는 ‘좋은’ 구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미술학교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알고 있다─왜 그것이 좋은 구성인지는 모른다. 이미지의 구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기껏해야 (형태심리학에서와 같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 것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사진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처음에 시작할 때 말한, 우리 나름의 사진의 사용이라는 주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진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오래 바라보면 우리는 낙심하게 된다. 처음 봤을 때 즐거움을 주던 사진이 점차로 하나의 장막이 되어,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보고자 열망하게 된다. 사람들이 사진을 너무 오래 동안 들여다 보지 않도록 배치하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장면(보여진 것)에 대한 우리의 통제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사진을 사용한다 (스톱워치를 가지고 방문객을 따라다녀 본 국립박물관의 관리는 한 사람이 하나의 그림 앞에서 평균 10초 동안 서 있는 다는 것을 알아냈다─그것은 할리우드 영화에서의 한 장면의 평균 길이와 비슷한 시간이다). 하나의 이미지 앞에서 오래 동안 있으면 시선에 대한 상상적 통제를 잃을 위험이 커지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원래 그 시선이 소속된, 이미지에는 나타나지 않는 타자─즉 카메라─에게 놓치게 된다. 그러면 이미지는 더 이상 토대가 되는 중심성을 확증해 주는 우리의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며, 우리의 응시를 피하면서, 이미지와 타자와의 연대관계를 확증한다. 우리가 이미지에 사로 잡혀 있는 그 틈새에 소외가 침투해 들어올 때, 우리는 응시를9 피하거나 페이지를 넘김으로써 우리의 시선에 다시금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 (‘지배하고자 하는 충동’은 바라보는 것에 대해 성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현상인 절시증(scopophilia)의 한 요인이다.)
 
사진을 너무 오래 동안 보는데서 오는 어색함은 체계적인 속임수인 원근법적 재현의 체계에 대한 의식에서 생겨난다. 렌즈는 실제의 공간과의 상상적 관계 속에서 한 장면의 기하학적 원점으로서의 주체를 설정하는 투사의 법칙에 따라 모든 정보를 배치하지만, 사실이 침투해 들어 와서 최초의 반응을 해체한다. 눈(나)은 이미지에 나타난 공간 속에서 움직일 수 없으며, 눈은 단지 프레임이 있는 곳까지만, 공간 위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눈이 프레임의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을 막아 주는 ‘구성상의’ 장치를 포함한 여러 가지의 전략은 주체가 어쩔 수 없이 프레임의 규칙을 알아차리는 것을 지연시킨다. 따라서 ‘좋은 구성’은 시점에 대한 상상적 통제, 즉 우리의 자기-내세움(assertion)을 연장해 주는 도구일 뿐이다. 즉 그것은 프레임의 자율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이며, 프레임이 상징하는 타자의 권위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구성’은 (그리고 구성에 대한 지겨운 담론들--형식주의적 비평들) 상상적 힘, 사진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진정한 힘을 연장하는 수단이며, 구성이 시각 예술 전반에서 가치의 기준으로, 여러 가지 합리화를 거치면서 오래 동안 살아남은 것도 이런 이유10에서일 것이다. 최근의 어떤 이론은11 영화를 ‘소망을 충족해 주는 기계’에 대한 작업의 정점으로 치기도 하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사진은 이 작업에 있어서 한 역사적인 순간일 뿐이다. 극장의 어두움은 관객을 인위적으로 ‘퇴보’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치부되었으며, 영화는 최면술과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욕망이 그 자신을 위해 만들어 낸 장치가 국제상황주의자(Situationists)들이 구경거리(spectacle)라는 이름을 붙인 서구사회의 모든 측면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구경거리란 역사주의적 진보 속에서의 상호 고립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상호 교환 속에서 통합되어 있는 시각적 장을 이루는 국면들을 말한다. 욕망은 상상적인 충족을 위한 물질적인 어두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백일몽도 최면술과 같은 면을 지니고 있다.

상상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에 필수적으로 따라 다니는 오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사진이 차지하는 실제 역할 때문에, 상상계에 묶여 있는 사진을 회복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진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19세기의 미학, 그리고 사진에 대한 대부분의 저술들에 맞서서, 기호학은 사진이 ‘순수한 형식’으로 축소될 수도 없으며, ‘세계로 향한 거울’도 아니고, 작가의 존재로 향하는 통로도 아님을 밝혀냈다.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진이 작업의 장소이며, 독자가 알고 있는 코드를 동원하고, 코드에 의하여 동원 당하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구조화되고 구조화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의미체계들이 표면상의 ‘내용들’을 서로 ‘소통’하는 바로 그 와중에서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 속의 여러 가지 의미의 체계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진 이론이 주체 생산의 복합적인 결정과정 전체가 사진을 통하여 조율되고 규제되는 와중에서의 주체의 생산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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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여기서의 재현(representation)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반영한다는 식의 재현이 아니다. 사실 재현이라는 말도 부적절한데, 우리말에는 아직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버긴이 말하는 재현이란 이미 있는 대상을 반영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구성되는 이미지이다. 사진이 어떤 것의 재현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진이 어떤 물건의 모습을 그대로 찍어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사진기라는 특수한 기계를 통해, 인간의 시선이라는 역사적인 구성물이 사진이라는 특수한 관습을 통해야만 알아 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새로운 재현의 개념에는 최근 시각문화이론에서 다루는 모든 쟁점들이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코드, 주체의 형성, 의미의 제도와 그 담론 등 비교적 새로운 주제들을 압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재현은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가 어떤 문화, 역사, 사회, 정치적 맥락을 통해 구성되었는가하는 문제이다. 나아가, 재현의 개념에 있어서는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지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로지 재현을 통해서만 현실을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현실은 재현을 통해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구성의 산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시각적 재현 뿐 아니라 언어적 재현, 청각적 재현, 촉각적 재현, 관습적 재현 등 아주 넓고 다양한 재현의 영역은 현실이 재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만질 때의 촉감은 단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손의 감각이라는 문화, 역사적 구성물에 의해 결정되는 재현의 일부분이다. 시각적인 것에 있어서도, 우리의 시선은 역사,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재현은 이러한 신체라는 장치를 통해서 가동되는 구성물이다.
2: 영어로는 Jonathan Caper가 1967년에 출간했다.
3:이런 연구들이 사진에 적용된 것에 대해 알려면 Victor Burgin, “Photographic Practice and Art Theory” Studio International, July/August 1975를 볼 것.
4:Jean-Louis Baudry “Ideological Effects of the Basic Cinematographic Apparatus,” Film Quaterly [Winter 1974], p.75.
5 :“The Mirror-Phas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New Left Review, 51, [September/October 1968].
6;최근의 영화이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언급이 그것에 얼마나 덕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을 다루는 영어로 된 잡지로는 Screen이 있다(특히 Laura Mulvey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Screen, v.16, no.3, [Autumn, 1975]을 볼 것).
7 :여기서 토대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재현을 가능케 해주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역자주)
8 :역자주: 원어는 날 것을 의미하는 raw이지만 여기서는 ‘가공되지 않은 현실 그대로의’라는 의미로 본역하였다.
9 :이제까지 시선은 look의 번역어였는데, 응시는 gaze의 번역어이다. 이는 자크 라캉의 regard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개념적인 분화이다.
10 :Guy Debord를 포함한 일군의 학자들. 자본주의 사회를 구경거리의 사회라고 비판했다.
11: Jean Louis Baudry, “Apparatus,“ Camera Obscura [Fall 1976].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70&page=1&showPublish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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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사진2007. 7. 11. 11:00

사진과 예술 - 위상의 재편성을 위하여 -

이 영준(사진평론)


오늘날 많은 한국의 사진가들이 사진을 제대로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가 없다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 또한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이 없다는 것(현재 ‘사진영상의 해’를 기하여 추진되고 있는 사진사박물관의 의의와 미래의 파급효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에 대해서도 한탄을 하며 사진도 회화나 조각같이 버젓이 미술관의 공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그 하나는 한국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이 이제는 어느 정도 스스로를 미술관이라는 제도 속으로 편입해도 좋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1990년대 말의 한국에는 내세울 만한 사진가도 많고 (이제 사진계에는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스타급의 사진가들이 일정한 층을 이루고 있다) 사진의 어법도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자신감이란 사진이 이제는 독자적인 예술로서 자리를 굳혔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두 번째 요인은 간단치가 않다. 그것은, 기존의 갤러리나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예술권력의 생산, 재생산 구조에 사진도 동참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예술의 장르들이 미술관, 큐레이터, 비평가, 딜러들의 연합적인 노력에 의하여 오늘날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듯이, 사진도 그러한 지위를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사진이 그렇게 되려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몇 가지 있다.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겠다는 의지를 가진 공간이 있다고 해서 사진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는 큐레이터가 있어야 한다. 과연 한국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반성해 보면 사진이 미술관에 들어간다는 것에 어느 정도의 용이함, 혹은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는 비평가가 얼마나 되는가, 있다면 그들은 사진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환영하고 있는가를 따져 봐야 한다. 또한 사진이 그저 전시만 되었다가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매매가 이루어지려면 사진전문 딜러나, 사진매매를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있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이 부정형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미술관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는 것, 나아가 사진의 예술성이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현재로서는 한국의 사진에서의 예술권력은 회화나 조각에서와 같이 제도적으로, 담론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작가들의 서열, 위계질서에 의존하고 있는 단순한 구조이다. 아직도 예술로서의 사진의 위상은 한국에서는 불안한 것이다. 그것은 사진 자체의 질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예술권력의 문제는 예술이 그 특유의 미적 담론으로 말미암아 설득력을 가지는 바로 그런 구조를 어떻게 획득하느냐의 문제인데, 사진의 미적 담론은 무엇인가, 나아가 사진을 미적, 예술적으로 규정해 줄 수 있는 별개의 담론의 체계가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담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진이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곧바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은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감추는 공간이고, 열려 있는 공간이지만 닫혀 있는 곳이며, 자유로와 보이지만 규율과 권력이 작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이제까지 미술이 감수해야 했던 그런 모든 조건들을 감수하면서 미술관에 들어갈 것인가는 깊이 따져 봐야 할 문제이다. 결국 미술관은 이미지를 다루는 다른 모든 기관들처럼 규율적 권력을 행사하는 곳인데, 예술작품이 거기 수용된다는 것은 그런 권력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하면 그런 권력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런 길들여지는 절차는 절대로 폭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무언가 진리를 뒤에 감추고서 겉으로는 허구적인 것만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또 “예술의 진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즉 예술이라는 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의 작용이다. 결국 사진이 미술관에 수용되야 한다거나 갤러리에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런 예술권력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예술권력이 새로운 대상을 받아들일 때 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학교에서의 신입생, 훈련소에서의 신병, 감옥에서의 신참을 받아들일 때 하는 일들과 비슷하다. 즉 그들의 기이함, 모남, 튀는 성질들(영어로 ‘이디오신크라시’(idiosyncracy)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깎고 다듬어서 수업 받을 수 있는 사람, 훈련받을 수 있는 사람, 교화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꾼다. 즉 사회 속에서의 규율적인 기관들은 주체를 생산하되, 규율적으로 통제하는 식‘으로만’ 주체를 생산한다. 미술관도 작품에 대해 같은 일을 한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예술품들은 얼핏 보면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인 것 같지만 미술관의 제도적 테두리 안에서만 그런 것이다. (이 불의 썩는 냄새나는 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원폭투하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전시하려고 했을 때 일본인들을 원폭의 희생자로 다루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아 보라.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도시와 영상전’에서 사진 속의 성기의 이미지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상기해 보라.) 이런 사례들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개념적으로도 끝이 없다. 왜냐하면 미술관 하나 하나는 ‘이디오신크라시’를 배제하는 방법과, 철학과, 코드를 가지고 일상적으로 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라는 행사와, 거기에 따라붙는 평문, 카탈로그, 전시제목 등의 텍스트들은 큐레이터의 전문가적 권위와 더불어 사진이라는 텍스트의 의미에 제한을 가하고, 그 해석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함으로써 사진의 의미 자체에 규율을 가하고 길들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을 지냈던 존 사코우스키일 것이다. 그는 1960년대에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거울과 창>이라는 전시에서, 그리고 1965년도에 출간된 <사진가의 눈>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의 모더니즘 사진의 규칙을 명확하게 밝혀 놓았는데, 최근의 평론가들은 이 때의 사코우스키의 전시방식이 사진의 풍부한 내러티브를 협소화하고, 이미지의 자율성과 투명성을 강조하고, 사진가의 유아독존적인 주체성을 강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적 규범에 사로잡힌 큐레이터의 시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큐레이터의 권력이 한 시대의 사진의 흐름을 일정한 내러티브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프레임을 씌운다는 점이다. 사코우스키에 대한 비판에서 드러나지만,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예술”의 내용은 바로 이런 식의 배제의 규칙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 대한 고려없이 순진하게 사진도 미술관에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의미없는 진술이다.
사실 예술로서의 사진의 위상은 사진이 발명된 이래로 불안한 것이었다. 사진의 역사는, 사진이 예술의 위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사진은 그 자체의 전통의 부재로 말미암아 다른 예술 장르와의 기생적인 관계를 통해서 예술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진은 그림의 망령에 시달려 왔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실 사진은 회화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듯 회화를 아버지처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모방과 반항을 되풀이 해 왔다” 이런 모방의 좋은 예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회화주의 사진, 반항의 예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나 에드워드 웨스턴 등에 의해 이루어진 스트레이트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기에 사진은 제도적으로나(19세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미술전시의 일부로 열렸던 사진의 전시; 회화를 복사한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초기의 사진가들; 뉴욕현대미술관의 사진부 개설, 이후 사진을 모더니즘 예술의 일부로 확립해 준 중요한 전시 등), 담론적으로나(초기 초상사진의 미학, 규범, 코드, 소유형태들; 회화주의(pictorialism)같은 사조,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미술이나 문학의 한 형태로서의 사진; 그녀가 자신을 한 사람의 작가로 프로모션한 방식 등) 기생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진가들은 사진이 미술품처럼 팔리거나, 미술관에서 기존의 미술품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을 사진의 지위격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의 중요성과 특성은 여타의 다른 예술과는 다른 제도적, 담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데 있다. 사진은 회화같이 미술관의 벽면에 전시됨으로서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술관과, 다른 시각적 활동영역간의 위계(hierarchy)의 수립이다. 미술관은 인간의 시각예술의 활동이 들어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신전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미술관이 다른 제도적 장치들에 비해 높은 위계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진은 회화나 조각처럼, 하나의 물건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예술작품과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사진은 음악이나 연극처럼 수행(perform)되는 것, 나아가 그 수행의 와중에서 관객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예술로서 간주돼야 할 것이다. 즉 보도, 다큐멘타리, 대중소비, 기록, 관찰, 신분증명, 법적 증거 등의 다양한 영역에 퍼져 있는 사진들은 그것이 대상을 기계적으로 찍은 객관적 이미지라는 사실 때문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이 요구하는 아주 이질적이고 상이한 담론들(뉴스, 진실, 재미, 여가, 과학, 수사, 정찰, 행정) 속에서 사진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그 가치를 부인하는 요인들(어떤 특정한 사진을 가짜라고, 아니면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는 주장들)과 끊임없이 타협, 절충을 벌이며 나름대로의 실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진의 의미는 기호학에서 말하듯이 텍스트 안에 쓰여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가지고 수행되고 작동되는 것이다. 미술도 이런 타협을 하지만 그 공간은 대체로 미술관 안에 한정되어 있는데 반하여 사진의 작동범위는 훨씬 더 넓다.


버티용 카드 1913 <프랑스 경찰의 범죄자 관리시스템인 버티용 시스켐을 사용하는 미국 산디에고 경찰화일

따라서, 사진이 기존의 예술제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수행성에서 오는 의미들을 포기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지 따져 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우리는 예술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학의 역사에서 말하는 예술의 정의를 들이대어 사진의 예술성을 따지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을 뿐 더러,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진이 예술이라고 했을 때 그 예술은 일정한 제도적 틀 안에서 수행되는 예술이 아니라, 그런 틀의 바깥에, 혹은 그 틀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록으로서의 사진, 증거로서의 사진, 관찰의 수단으로서의 사진, 정체성의 식별이나 확인의 수단으로서의 사진을 말한다. 물론 이런 사진들이 작동하는 공간은 철저하게 비예술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의 일반적인 조건이 그러하듯이, 예술로서의 사진은 바로 그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말할 때는 우리는 예술의 정의 자체를 넓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미술관, 극장, 연주장 등 예술의 공간으로 확립된 곳에서 수행되고 보여지는 활동 뿐 아니라, 인간의 지각과 감각을 다루고, 기존의 인간의 감각과 연관된 영역들에 개입하는 활동을 말한다. 특히 전시 뿐 아니라 출판, 홍보, 조사, 기록, 관찰같은 폭넓은 인간활동에 관여하고 있는 사진은, 바로 그런 점들을 빼버리고 예술로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포괄한 예술로서 거론돼야 한다. 물론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기존의 예술에서도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이나 문학같은 장르에서의 경계의 무너짐이나 재설정과, 사진에서의 그것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조지 스펜서 <나 자신을 사진속에 넣기> 1985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술을 말하면서도 예술이 아닌 다른 활동의 영역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예술로서의 사진을 논의한다는 것은 사진을 기존의 예술의 경계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예술을 경계의 문제, 혹은 어떤 특정하게 예술품으로서 정의된 물건을 생산하는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술은 언제나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간의 경계를 허물거나 재설정하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 경계가 재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20세기의 모더니즘이 확립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따라서 경계지워진 영역으로서의 예술,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이고, 한시적이며, 공간적으로는 뉴욕이나 파리같은, 서구의 몇몇 모더니즘의 수도들이라는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사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진을 하나의 제도로서의 미술관, 담론의 장치로서의 미술관의 일부로서의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술관이 어떤 대상에 작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과정,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 작품 뿐 아니라 관객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교육, 통제, 훈련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은 자연스럽게 가치중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기구가 아니다.
사실 작가들도 위와 같은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미술관의 가치, 미술관이 부여하는 가치의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이 예술이라는 아우라에 싸여 비가시화한다는 것이다. 즉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 화상, 언론 사이에는 끊임없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전시라는 형태를 통해서 보여지는 작품에서는 그런 흔적들은 보이지 않도록 청소가 되어 있다. 미술관의 흰 벽이나, 작품의 프레임 등과 같은 장치들은 그런 흔적을 비가시화하고 가치중립적으로 만드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미술관은 가치를 분류하고 위계등급을 매기는 곳이며, 작품의 진정성은 작품이라는 물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제도적인 인정의 체계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다. 또한 미술관이라는 기관은 길들이는 곳이다. 작품이나 관객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위험한 시선, 위험한 의미를 길들이는 곳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길들이기의 수단은 미술, 예술이라는 미학적 교양이라는 코드들이다. 그런 코드에 깃들어 있는 규율적 질서는 디스플레이의 수사, 혹은 디스플레이라는 수사를 통하여 내면화된다. 또한 미술관은 지식과 권력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산에 대해서나,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집단적인 기억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큐레이터의 권력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순간은 어떤 전시가 미술사의 획을 긋는 중요성을 인정받을 때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업적이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미술사라는 지식을 낳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즉 지식은 권력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관의 권위가 궁극적으로 고정되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 미술관의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다. 미술관의 규율과 경계짓기의 관습을 거부, 재검토, 재편성하는 작업들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으며, 새로운 전시의 형태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전의 이론가들은 이미 예술로서의 사진의 어떤 측면이 저항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예술로서의 사진에 따라 다니는 해로운 관념은 아직도 예술작품이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이라는 믿음이다. 벤야민의 예측과는 달리, 사진과 영화의 출현으로 인해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예술제도는 예술품, 작가의 아우라를 강화시키는 여러 가지 전략들,수사들을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아우라는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술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수시로 그 전략과 모습을 바꾸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기술복제수단으로서의 사진이 아우라의 붕괴를 가져 왔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형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사진과 영화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예술에 아우라, 즉 복제 불가능한 일회적 현존성이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품이란 것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박물관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즉 진품이라는 개념은 가짜라는 개념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제도적 장치 없이 그런 개념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에까지 진품이라는 개념, 혹은 진짜의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확장될 때 예술로서의 사진도 두터운 아우라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 아우라의 두께는 회화나 음악 등 다른 더 오래 된 예술의 장르 못지 않다. 사진가들은 작가의 명성과 권위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사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진품으로 추앙 받는다. 그들은 또한 진품성의 유지를 위해 네거티브 필름을 파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우라에 대한 이의제기와, 그것의 유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문화정치적인 갈등이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옳게도, 미술관이 아우라를 회복하려는 시도 그 자체를 미술관의 위기로 보았다. 그는 예술사진의 승리도 그런 위기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다. (크림프,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진”, 더글러스 크림프, 『현대미술의 지형도』 이영철 엮음, 시각과 언어)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사실은 예술로서의 사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사진은 확실치 않은 예술이다. 예술가가 대상에 투사하는 힘, 혹은 그 결정체로서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무질서하고 우연적이며, 혼돈에 가득 찬 것이라는 점에서 사진은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예술이 아니다. 다른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겠으나 사진의 경우 이미지와 대상의 물리적인 밀착성에서 오는 객관성의 외양과 확실성의 외양 때문에 그 불확실성은 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불확실한 사진에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요인은 텍스트의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작가라고 하는 관념이다. 그것은 예술사진에 깃들어 있는 독창성이라는 망령과도 연관되어 있다. 사실, 이미지의 뒤에 있는 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재현에 의해 시작된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한에 있어서, 원본은 항상 연기된다. 재현은 원본의 부재 속에서만 일어난다. “사진은 노출이 이루어지기 전에 전부 구상되어야 한다”는 웨스턴의 말은 재현의 뒤에 뭔가 선험적인 것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그런 선험적인 어떤 것은 그의 마음속에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그것은 세계 속에 있으며 웨스턴은 그것을 복사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글러스 크림프, 위의 글, p.319) 사진이 가지고 있는 외관상의 진실성이 여러 가지 장치(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공모관계 속에 일치시키는 재현의 장치,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러티브, 수사학, 이데올로기 등, 사진을 분류, 정리하는 체계로서의 아카이브, 규율적 제도로서의 미술관)에 의존하고 있음을 은폐, 혹은 비가시화 하는 한에 있어서 사진의 객관성과 진실성이 사진의 예술성의 토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거짓의 생산에 동참하는 것이다.


조 스펜서<나 자신을 사진 속에 넣기> 198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에비게일 솔로몬-고도가 자신이 옹호하는 작가들에 대해 말하면서, “예술사진이 정확히 모더니즘적인 예술형식으로서의 그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때 보여 주었던 경건함과 예의바름에 직접적으로 도전했던 방식들 때문”에 그들을 옹호한다고 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단순히 그들 예술가들(빅터 버긴, 새라 찰스워드, 바바라 크루거, 셰리 레빈, 신디 셔먼 등)의 태도 자체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대항하고 있던 사진의 권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즉 다시 솔로몬 고도의 말을 빌자면, “사진이 완전히 아우라적이고 주관화된 자율적 순수예술로서 제도적으로 강화되고 정당화되는 것과 같은 병적인 징후”는 20세기 후반 고급예술로서의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모습이다. 그 권력이란 미술관 권력, 작가권력, 작품권력, 비평권력 등인데, 이 모든 권력은 고도의 전문지식, 기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고 있고, 그것들을 다시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는 생산적인 권력이다. 즉, 사람을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특정한 형태로 태어나게 하는 권력이다. 예술로서의 사진 속에는 그런 권력이 삼투해 있다.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사진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를, ‘이러이러하게 하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필요충분조건을 밝히는 것은, 그 조건이 설사 아무리 논리적으로 명확한 것이라 해도, 경계의 논리를 다시금 되살린다는 점에서 별 의미가 없다. 단지, 그것은 사진이 제도적인 틀 속에서 보여지는 방식과, 그 속에서 소통되는 의미에 대한 재구성과 재검토를 포함하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만약 예술이라는 것을 경계의 문제가 아니고, 거꾸로 개입의 문제로 본다면 사진이 어떤 영역에 개입해야 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즉, 미술관에 대해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고 그 밖에서 미술관의 작동방식에 개입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또한 보다 더 큰 테두리, 즉 출판, 보도, 증명, 기록, 감시, 관찰 등의 영역에서 사진이 보여지는 방식들이야말로 사진이 개입해야 하는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런데 그 보여지는 방식이란 것이 간단치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사진에 어떤 코드가 작용하고 있는가 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선은, 사진적 재현의 구조 전체가 문제인 것이다. 즉, 우리가 사진을 본다는 것은 이미지 속의 시선, 혹은 카메라의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의 일치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런 관계를 빅터 버긴은 두 시선간의 공모관계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공모관계에서 이데올로기적 작용이 일어난다. 사진이 전달하는 내용 속에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사진 속의 시선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시선의 역사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며, 사진을 보는 주체도 그런 시선의 역사와 더불어 구축된 것이라는 사실이 사진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큐멘타리나 보도, 증명사진에서 사진의 존립근거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는 사진의 진실성(facticity)과 증거능력을 가능케 하는 부분도 개입의 영역이다. 이는 푸코가 말한 진리의 체제(regime of truth)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진의 진실성이 사진이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진리(truth)를 생산하는 담론적인 체제 전반의 문제이다. 즉 사진의 규격에서부터 사진을 찍는 방식, 태도, 어법에 대해 부여되는 코드, 그 코드가 통용되는 제도적 실천이 사진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혹은 진실성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체제에 의해 확증되고, 진리의 담론 속에서 실천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 대한 검토 없이 사진을 진실 되게 찍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다큐멘타리적 사고방식은 아주 소박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진들의 구체적인 실천, 기능방식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진이 감시카메라, 정찰, 주민등록체제 등을 통해 감시와 관리의 기능을 하는 것, 그리고 사진이 그런 경우에 증거로서 작용하는 체제는 일상속에서의 사진의 의미의 아주 큰 부분이다.
또 다른 개입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문제들과도 연관되는 영역인데, 사진과 정체성의 문제이다. 즉 어떤 종류의 사진적 표상(representation)과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의 규정을 따라, 정체성이란 ‘외적인 이미지를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진, 건축, 자연환경, 의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문화적 표상들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표상에 자신을 맞출(align) 것인가 하는 전략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정체성의 전략, 혹은 정체성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이미지는 항상 고도의 선택적인 판단의 결과이며,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게끔 만드는 그 구조는 바로 성적,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과 밀접히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요인들에 대한 고려 없이 ‘사진은 만국 공통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이다. 모든 사진이 모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체성에 따라 다르게 어필하며, 거기에는 자신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정체성의 전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조 스펜서<나 자신을 사진속에 넣기> 1985


따라서 개입의 영역들은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이들 모두에 공통되는 개입의 전략이나 방법, 코드가 있을 수는 없다. 각기 다른 영역에 다른 전략이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개입이 없이는 더 이상 예술이라는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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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참고로 삼았거나 논의한 사진 이론의 갈래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문헌목록과 함께 정리했으므로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이론의 중요한 갈래를 든다면 그 초기적인 형태로서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성에 대한 해석과 문화산업비판과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론으로부터 세례를 많이 받았으면서 이들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는 존 버거와 수잔 손탁을 들 수 있다. 두 사람 다 벤야민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버거는 어떻게 하여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킨 체험의 단절과 파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사진적 실천은 무엇인가에 대해, 손탁은 벤야민과 바르트를 절충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문헌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지음, 반성완 옮김, 민음사
『시각과 언어1--산업사회와 미술』 최민, 성완경 옮김 열화당
『이미지와 글쓰기--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롤랑 바르트 지음, 김인식 편역, 세계사
『신화론』 롤랑 바르트 지음, 정현 옮김, 현대미학사
『텍 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동문선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존 버거 지음, 편집부 옮김, 동문선
『말 하기의 다른 방법』 존 버거, 장 모르 지음, 이희재 옮김, 눈빛
『사진이야기』수잔 손탁 지음, 유경선 옮김, 해뜸


한 편, 사진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는 심리학, 해체주의, 담론이론 등으로부터의 영향을 통해 좀 더 넓은 상호텍스트성의 바다로 나아간다. 이제 사진은 단순히 읽어야 할 기호나 사회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문화적 표상이며, 철학, 역사학, 비평이론 등 인문학의 폭넓은 주제들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또한 오늘날 보여지는 바와 같은, 사진에 대한 관심이 단지 매체에 대한 지식의 양이 순차적으로 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와서, 장르 간의 경계의 해체, 심지어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의 해체, 기계적인 이미지 생산방식에 대한 새로운 반성, 매체와 설치 등을 중시하는 작가들의 경향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 여기서는 신체라든가 감시, 욕망, 시선 등 이전의 이론에서는 다루지 않던 주제들이 논쟁의 핵심이 된다. 다음의 저술들은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현대미술의 지형도--비평, 매체, 제도분석』 이영철 엮음, 정성철 외 옮김, 시각과 언어
『문화연구이론』 정재철 편저, 한나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존 스토리 지음, 박모 옮김, 현실문화연구
『프 로이트의 문학예술이론』 허창운 외 지음, 민음사
『알기 쉬운 자끄 라깡』 마단 사럽 지음, 김해수 옮김, 백의
『라깡의 욕망이론』자크 라깡 지음, 권택영 옮김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유종완 외 옮김, 민음사
『포 스트모더니즘론』 정정호, 강내희 편, 문화과학
『포스트모던 문화--현대이론서설』 스티븐 코너 지음, 김성곤, 정정호 옮김, 한신문화사
『데리다와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마단 사럽 외 지음, 임현규 편역, 인간사랑
『권력과 지식--푸코와의 대담』 콜린 고든 지음, 홍성민 옮김, 나남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나남
『담 론의 질서』 미셸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샛길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미셸 푸코 외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
『육 체의 문화사』 스티븐 컨 지음, 이성동 옮김, 의암출판


이런 모든 논의의 갈래들을 포괄하면서, 사진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서구에서 일어나는 가장 집약적인 논의는 다음과 같은 이론모음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빅터 버긴이 편집한 Thinking Photography (London: MacMillan, 1982)는 이런 경향의 책으로는 교과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기호학, 심리분석, 마르크스주의, 권력이론 등 서구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지적인 흐름들이 사진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고 있다. 사진이론에 대해 알아보자면 다음의 책들은 필수적인 것들이다.
Bolton, Richard. [ed.]. The Contest of Meaning: Critical Histories of Photograph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9.
Squires, Carol. [ed.] The Critical Image--Essays on Contemporary Photography. Seattle: Bay Press, 1990.
Petro, Patrice. [ed.] Fugitive Images--From Photography to Video.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Evans, Jessica. [ed.] The Camerawork Essays--Context and Meanign in Photography. London: Rivers Oram Press, 1997.
Spence, Jo and Patricia Holland. [eds]. Family Snaps: The Meanings of Domestic Photography. London: Virago, 1991.
Wallis, Brian. [ed.]. Art After Modernism: Rethinking
Representation. New York: Godine,1984.
Doane, Mary Ann, Patricia Mellencamp and Linda Williams. Re-Vision: Essays, in Feminist
Film Criticism. Frederick, MD : University Publications of America, 1984.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69&showPublishNo=4&page=1&whichPage=1&writer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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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부/사진2007. 7. 11. 11:00

현 대 사 진 의 길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 영역: John E. Bowlt | 영문중역: 양현미



보리스 쿠쉬너(Boris Kushiner)의 “공개 편지”에 대한 답변인 이 논문은 로드첸코가 사진을 통해 시각적 사유방식을 “혁신”시킬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매우 정교하게 진술해 놓은 것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관이 지각상의 습관들과 회화형식의 관례들로 인해 어쩔 수없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뒤흔들어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줄 시각적 충격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사진이 회화로부터 물려받은 시각적 전통들은 도시화된 기술적인 세계를 묘사하는데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카메라만이 동시대의 삶을 반영할 수 있다”라고 로드첸코는 주장한다. 로드첸코는 그의 목표가 개인적인 사진예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신문사진의 변혁을 고무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광범위한 관중에게 새로운 시각적이고 지각적인 습관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쿠쉬너에게

당신은 “상향시점(from below up)과 하향시점(from above down)”에 관하여 흥미로운 문제를 지적했으며, 이러한 사진의 시점들이 나에게 “전가되어온” 만큼(만약 Sovetskoe foto지의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해도 좋다면), 이에 응수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실 나는 다른 모든 시점들보다 이러한 시점들의 사용을 지지하는 바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모든 나라의 미술사나 회화사를 보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회화들이, 약간의 극히 작은 예외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배꼽 높이나 눈 높이에서 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화와 원시 회화들에서 외관상 받은 인상을 새의 시점으로 간주하지 말아라. 많은 인물들을 담을 수 있도록 수평선을 올려놓은 데 불과하며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눈 높이에서 제시되어 있다. 함께 보면 전체는 현실에도 새의 시점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위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각각의 인물은 정확하게 정면 시점과 측면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그들은 인물 위에 인물이 놓여있지 사실주의 회화들에서처럼 인물 뒤에 인물이 놓여있지 않다.
중국 미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그들은 한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어떤 대상의 가능한 모든 사선들(declivities)은 운동의 순간(단축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관찰의 시점은 언제나 중간 높이이다.
사진이 실린 오래된 잡지들을 살펴보라─그러면 당신은 똑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가끔 다른 관점들을 접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에 불과하다. 가끔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새로운 시점들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 잡지들을 많이 사며 사진을 모으지만, 이런 종류의 사진은 전부 합쳐서 약 36점 모았을 뿐이다.
이런 위험한 스테레오타입 뒤에는 인간의 시각적 지각을 교육시키는 편향되고 인습적인 관례, 시각적 이성의 과정을 왜곡하는 일방적인 접근방식이 놓여있다.
회화적 창안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Vereshchagin의 회화1나 Denner의 초상화들2처럼 처음에는 어떤 것을 “실물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욕망이 있었다─그들은 프레임 밖으로 막 기어 나올 것 같았으며 피부 구멍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화가들은 칭찬 받기는 커녕 “사진가” 같다고 비난받았다.
회화적 창안의 두 번째 길이 세계에 대한 개인주의적이며 심리학적인 관념의 뒤를 이었다. 정확하게 동일한 유형의 변형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벤스 등의 회화들에 묘사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사용했고, 루벤스는 자신의 아내를 사용했다.
세 번째 길은 양식화, 회화를 위한 회화였다: 반 고호, 세잔,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그리고 마지막 길은 추상, 비대상성이었다: 그때 사실상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관심은 과학적인 것이었다. 구성, 질감, 공간, 무게 등.
그러나 새로운 시점, 원근법, 그리고 단축방법을 탐색하는 길들은 전혀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회화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AKhRR3의 견해대로라면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아직 어느 누구도 시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사진─새롭고, 신속하며, 구체적인 세계의 반영체─은 반드시 세계를 모든 관점에서 보여주고 모든 방면에서 볼 수 있는 국민의 능력을 계발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사진은 이것을 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때에 “회화적 배꼽”의 심리학이 시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현대의 사진가를 꾸짖고 있다.
그것은 Sovetskoe foto의 “사진-문화의 경로들”과 같은 사진잡지의 무수한 논문들을 통해 성모와 백작부인들을 그린 유화 같은 모델들을 제공하면서 그를 가르치고 있다.
만약 대천사, 그리스도, 그리고 군주들의 구성에 능한 세계의 권위자들이 제시한 사례들로 인해 시각적 이성이 방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소비에트 사진가 또는 기자를 갖게 될 것인가?
내가 회화를 버리고 사진을 시작했을 때, 나는 회화가 자신의 무거운 손으로 사진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당신은 현대 사진의 가장 흥미로운 시점들이 하향시점과 상향시점이며 배꼽 높이가 아닌 다른 것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사진가는 회화로부터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기가 힘들다. 나의 사고과정은 시각적이며, 단편적인 아이디어들만 떠오른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에 관해 쓴 적이 없었으며, 사진, 그것의 임무와 성공에 관한 논문은 하나도 없다. 모홀리 나기(Moholy-Nagy) 같은 좌파 사진가들 조차 “내가 작업하는 방식”, “나의 길” 등과 같은 개인적인 논문을 쓴다. 사진잡지의 편집자들은 화가들을 초빙해서 사진의 발전에 관해 글을 쓰게 하고 있으며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신문사진가들을 다룰 때도 아둔하고 관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문사진가들은 그들의 사진을 사진잡지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으며 사진잡지 스스로 일종의 미술계(Mir iskusstva, The World of Art)4로 변화하고 있다.
Sovetskoe foto에 실린 나에 대한 편지는 우스꽝스러운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사진에 투하된 일종의 폭탄이다. 나를 깎아내리면서, 그것은 또한 새로운 시점들을 사용하고 있는 사진가들을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다.
Mikulin이 대표로 있는 Sovetskoe foto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너희들은 “로드첸코처럼” 작업하고 있으며 따라서 너희의 사진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문화화되어 있는가 보여주기 위해, 잡지들은 현대 외국 사진가들의 사진 한 두점을 싣고 있다─미술가의 사인도 없고 출처도 명시하지 않고 말이다.
이제 본래 문제로 되돌아가자.
다층건물들로 이루어진 현대도시, 특수하게 디자인된 공장들과 설비들, 2층이나 3층 규모의 상점 창문들, 전차들, 자동차들, 조명장치가 된 표지판과 간판들, 쾌속선들과 비행기들─당신이 자신의 『서구에서의 103일(On Hundred and Three Days in the West)』5에서 그토록 멋있게 묘사했던 그 모든 것들이─시지각의 평균적인 심리학을 바꾸어놓았다(약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카메라만이 동시대의 삶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적 합리성이라는 구시대적인 법칙들은 사진을 그들과 동일한 복고적 원근법을 지닌 일종의 낮은 등급의 회화, 에칭, 또는 판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 힘 때문에 미국에서 68층 건물 사진을 배꼽 높이에서 찍게 된다. 그러나 이 배꼽 높이는 34층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접해 있는 건물 안으로 기어올라가 34층에서 68층짜리 거인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만약 인접한 건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동일한 정면의 부분적인 광경을 얻게 된다.
길을 걸어갈 때 당신은 건물들을 위로 쳐다본다. 위층에서는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들과 보행자들을 내려다본다.
당신이 전차 창문이나 자동차에서 힐끗 바라보는 모든 것, 당신이 극장의 청중석에 앉아 내려다 볼 때 얻게 되는 광경─모든 것이 고전주의적인 “배꼽” 시점으로 변형되거나 정돈되어 버린다.
그가 맨 위층 관람석에서 『Uncle Vanya』를 내려다 볼 때, 관객은 그가 보는 것을 변형시킨다. 그의 마음 속의 중간-시점(mid-view)에 따라 『Uncle Vanya』는 실제의 삶처럼 전개된다.
내가 파리에 있으면서 에펠탑을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6 그러나 버스를 타고 매우 가까이 지나갔을 때 나는 창문을 통해 철근으로 된 저 선들이 좌우로 위로 뻗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시점은 나에게 그것의 규모와 구조에 대한 감동을 주었다. 배꼽 시점은 당신이 본 모든 엽서에 지겹게 찍혀있는 달콤한 얼룩같은 것을 제시해 줄 뿐이다.
당신 은 공장의 모든 것을 자세하게─안에서, 아래로, 위로 조사하는 대신 왜 공장을 멀리서 그리고 중간 시점에서 보려고 애쓰는가?
현실에서 원근법이 왜곡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카메라 자체가 원근법을 왜곡하지 않게 되어 있다.
만약 거리가 좁아서 옆으로 물러날 공간이 없다면, “법칙들”에 따라 당신은 아마도 렌즈가 있는 카메라 앞면을 들어올리고 뒤를 기울일 것이다 등등.
이 모든 것은 “알맞는” 투시원근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들어 비로소 일명 아마추어 카메라들에도 광각 렌즈들이 사용되게 되었다.
수백만장의 스테레오타입 사진들이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들 간의 유일한 차이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좀더 성공적이거나 어떤 것은 에칭을 모방했거나 다른 것들은 일본 판화를 그리고 나머지들은 여전히 “렘브란트” 작품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건들을 담은 사진들은 신문사진이라고 불리는 반면, 풍경, 두상, 나체여인들을 찍은 사진들은 예술사진이라고 불린다.
신문사진은 저급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응용사진, 이런 저급한 종(種)이 사진에 혁명을 일으켰다─잡지와 신문 간의 경쟁을 통해서, 사진에 필수적인 많은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종류의 빛과 모든 시점에서 어떻게 해서든 사진을 찍는 것이 필수적인 순간에 이를 수행함으로써.
이제 새로운 투쟁이 생겨났다: 순수사진과 응용사진 간에, 예술사진과 신문사진 간에.
사진-보도에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역시, 바로 이런 진정한 활동 속에서도, 스테레오타입과 거짓된 리얼리즘이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놓았다. 나는 야유회를 갔다가 기자들이 춤을 각색하고 그림 같은 일군의 사람들을 언덕에 배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림 같은” 무리에 서둘러 끼여든 소녀들이 어떻게 차에 숨어서 그들의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했는지 재미있다.
“자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주제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사진가가 아니라, 카메라에 잡히는 것이 주제이다. 그리고 사진가는 회화의 법칙에 따라 올바른 자세를 그에게 제시한다.
여기에 『Die Koralle』라는 잡지에 실린 사진 몇 장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연대기, 한편의 민족지, 하나의 기록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가가 따라오기 직전까지 이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으며 자기 자리에 있었다.
사진가가 그들을 갑자기, 모르는 사이에 찍었다면 그가 포착했을 장면들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모르는 사이에 사진을 찍는 것은 어렵다. 반면에 포즈를 잡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빠르고 쉽다. 그리고 당신의 고객도 오해를 하지 않게 된다.
잡지들에서 당신은 작은 동물들과 곤충들을 실물 크기보다 더 크게 확대해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를 그들에게 가깝게 들이댄 사람은 사진가가 아니다.
카메라에 등장한 것은 그들이다.
새로운 사진의 주제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의 전통에 따라 찍히고 있다.
모기들은 배꼽 높이에서 레핀의 Zaporoahtsy8의 회화적 법칙에 따라 찍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는(see)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쳐다보는(look at) 관점에 따라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인 대상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플라흐(Flach)의 다리에 대해 쓰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꼽 높이에서 찍힌 것이 아니라 지표면 높이에서 찍힌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당신은 카우프만(Kaufman)과 프리드리앤드(Fridliand)의 슈코프(Shukhov) 라디오 타워 사진들이 나쁘다고, 타워들이 정말 뛰어난 구조물이라기 보다는 빵바구니를 닮았다고 쓰고 있다. 나도 정말 동의한다. 그러나..." 만약 대상이 새롭고 당신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면, 어떤 시점이라도 대상의 진정한 모습을 침해할 수 있다.
프 리들리앤드만이 여기에서 실수를 범하고 있지 카우프만은 아니다. 카우프만의 사진은 다양한 시점에서 타워를 찍은 여러 개의 프레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러한 광경들은 움직인다. 카메라가 돌고 타워 위에서 구름들이 떠다닌다.
Sovetskoe foto는 “사진-회화”가 마치 독특하고 영원한 어떤 것인 양 이야기한다.
정반대이다. 우리는 마치 주제를 포위하기라도 하듯이─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여러 개의 다른 시점에서 그리고 다른 사진에서는 다양한 위치에서 주제를 찍어야 한다. 사진-회화를 만들지 말고 기록적 (예술적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사진-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요약하면, 사람들이 새로운 시점에서 보는데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친숙한 주제들을 완전히 예기치 못한 관점에서 그리고 완전히 예기치 못한 위치에서 찍는 것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주제들은 또한 주제의 완전한 인상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찍어야 한다.
끝으로 나는 나의 주장을 예시해줄 수 있는 몇 개의 사진들을 동봉한다.
나는 일부러 같은 건물의 사진들을 골랐다.
첫 번째 것은 미국 앨범 『아메리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진들은 가장 스테레오타입의 방식으로 찍혀져 있다. 그들을 찍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인접한 건물들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정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모두 올바른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 미국을 이런 식으로 보도록 키워졌다.
실제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동일한 건물의 두 번째 세트의 사진들은 독일 좌파 건축가 멘델슨(Mendelsohn)9의 것이다. 그는 거리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직한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 소방수가 있다. 매우 사실적인 시점이다. 만약 당신이 창문을 내다본다면 그를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얼마나 충격적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사물들을 자주 쳐다보지만 그들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쳐다보는(look at) 것을 보지(see)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의 특이한 원근법들, 단축법들, 위치들을 보지 않는다.
평범한 것, 용인된 것을 보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은 시각의 세계를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적 논법을 혁신해야 한다.
“배꼽 시점을 제외한 모든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 전부 수용될 때까지.”
“그리고 오늘날 가장 흥미로운 시점들은 그러한 하향시점과 상향시점 그리고 그들의 대각선들이다.”

8월 18일, 1928년



1 Vasilii Vasilievich Vereshchagin(1842~1904), 사실주의 화가이며 세부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한 전쟁 장면과 민족지적인 구성으로 유명했다.
2 Balthasar Denner(1685~1749)는 정확하기로 유명한 초상화가이자 미니어처 화가였다. 그는 살색을 묘사하기 위해 초상화에 특수한 유약을 사용했으며 이런 이유에서 “Porendenner”라는 별명이 붙었다.
3 AKhRR: The Association of Artists of Revolutionary Russia. 혁명러시아예술가연맹
4 World of Art는 1890년대에 Sergei Diaghilev와 Alexander Benois가 성페테르스부르그에서 이끌던 일군의 미술가들, 미학자들, 작가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은 장식미술에 특별한 관심을 쏟음으로써 러시아 미술의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하려고 하였다. 이 단체는 The World of Art라는 이름으로 잡지(1898~1904)를 발견했고 일련의 전시들(1899~1906)을 조직했다. 1906년에 시작된 분열을 겪은 후에, 동일한 이름을 견지해온 그룹이 1910년~24년 동안 전시 활동을 재개했다.
5 Boris Kushner는 묘사들과 일화들을 담은 이책, Stotri dnia na Zapade을 1928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했다.
6 1925년 3월 19일~6월 10일 까지 이루어졌던 로드첸코의 파리방문은 국제장식미술엑스포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럄oratifs와 같은 시기였다. 그는 소비에트관을 위해 노동자의 독서실을 디자인했다. 파리에서 보낸 그의 편지들은 Novyi lef, no.2(1927)에 실렸다.
7 Die Koralle는 베를린에서 1925년~41년에 출판된 도판이 있는 대중적인 과학잡지였다.
8 The Zaporoahtsy(1878~91)는 사실주의자 Ilia Efimovich Repin(1848~1930)이 그린 화려한 회화로서 Zaporzhe Cossacks가 터키의 Ottoman이 그의 제국과 연합하자고 청하는 것을 거절한 일화를 그린 것이다.
9 Mendelsohn에 대해서는 pp.221(출전)의 상단을 보시오.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51&showPublishNo=4&page=1&whichPage=1&writer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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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웹진 땡땡

          http://www.arte.ne.kr/webzine/webzine_view.asp?idx=46

 

 

미술평론가 박신의 선생님

정리 : 신정수
(웹진 콘텐츠팀, yamchegong@naver.com)





전효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계신데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이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기억하기로는 작년에 문예진흥원 심사 이후에 약간의 ‘시비’가 있었고,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했던 것에 대해 나는 ‘다모 폐인’이다 이런 식으로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지요. 선생님 개인을 정의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박신의: 어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벨기에 현대만화전을 위해 내한한 벨기에 만화작가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제 명함만 보고는 어떻게 만화 자리에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저보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일단 그들에게 저는 만화를 예술로서 접근한다고 했고, 그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 비디오아트,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영역까지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모든 예술적 성과를 함께 나눠 갖기 위해 효율적인 예술제도와 매개장치를 연구하고, 문화정책을 고민한다고 하였더니 금방 이해하더군요. 문제는 장르나 전공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문화적 관심의 확장과 사회적 연속성을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다면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전문성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고 봅니다. 지난 해 문예진흥원 지원 심사를 할 때 어떤 분이 저를 80년대 방식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구분하면서 색깔론 비슷하게 몰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저는 ‘다모폐인이다’라고 대답했어요. 당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문화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 아니겠어요? 저는 직업상으로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예술경영을 가르치고 미술평론과 전시 기획을 하고, 문화정책과 문화기획 전반을 다루는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미술평론가’라는 지위를 택하고 싶어요. 미술의 확장과 문화적 힘을 믿는 사람, 늘 당대적 담론에 반응하며 현장감을 가지고 문화적 실천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의 ‘미술평론가’ 말입니다. 또 겸손하고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직함이기도 하잖아요?

전효관: 미술평론가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계시잖아요?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신 건가요?

박신의 : 물론 미술평론이라는 활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저로서는 평론 작업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의식과 쟁점을 풍부하게 살려주는 작업이라고 봐요. 그리고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사회적 지위, 그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실천력을 살려주고, 이를 많은 사람들이 나눠갖도록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러니 미술평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예술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되고, 또 사회적 실천도 고민하게 되죠. 그런 과정이 결국 예술작품을 매개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살피는 일이 되면서 사회적 개입이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요.

전효관: 제가 책이나 글로 보면서 아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관심 영역과 관심의 확장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신의: 정말 그래요. 저는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여러 영역의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치지요. 경희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학과를 맡다보니, 또 제가 경영대학원 소속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된 것도 있어요. 최근 저는 문화예술기반시설에서의 인력문제를 다룬 연구를 하면서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하신 분들과 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노동의 문제와 경영의 문제에서 문화 영역을 덧붙여 냈지요. 또 도시계획 연구자들이 새로운 도시계획 개념으로 문화기획(Cultural Planning)을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쟁점이 드러나게 되면서 제가 그 부분에 합류하게 된 것도 같은 경우지요. 이런 식으로 문화예술 외부의 영역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제가 여러 일을 하는 것이 된 셈인데, 사실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문화부분이 고려되지 않다가 이제야 문화가 들어오는 시점이 된 것이라는 변화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미술사를 통해 그런 간학문적인(interdisciplinary) 측면을 훈련받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저는 미술사를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입장인데, 예술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적 구조를 보고, 욕망을 읽으며, 모순을 관찰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겐 미술사가 단순히 지식체계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사유 모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을 해석하고 해체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전효관: 미술의 위기, 이에 관한 대응들과 관련된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박신의: 요즘에는 ‘미술’이 너무 위축되어, 미술교과모임의 미술 선생님들도 미술이라는 이름 대신 ‘시각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시각문화’는 저 역시 80년대 말부터 미술이 시시각각 변하는 시각문화 혹은 영상문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하게 제안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미술을 대체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시각문화 관점에서 ‘새로운 미술교육’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만일 미술의 위기를 말한다면, 저는 미술교육을 실행하는 ‘제도의 위기’이지 그 자체의 위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술이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보수적인 제도적 틀에 안주하는 것 역시 미술제도의 위기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지요. 저는 미술을 제대로 교육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틀로 미술을 갱신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판단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전효관: 선생님께서 미술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시대 환경 변화에서 미술의 대응이 약했다고 봅니다. 한국, 외국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미술은 쇠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역별로 넓혀가려는 자체 노력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박신의: 지난 해 11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문화정책회의에 참석하면서, 저는 프랑스 미술대학 교육 프로그램 혁신을 주제로 미술학교 방문을 신청해서 간 적이 있어요. 이미 프랑스에서는 변화하는 매체 현상에 대응하면서 미술교육을 시각문화 중심으로 바꿔가고 있었어요. 5년 기간의 미술학교 기간 중 1학년과 2학년의 기초과정을 마치면 3년 차부터는 사진과 비디오, 3-D 디자인 및 영상, 음향작업 등을 배울 수 있게 해요. 다시 말하면 그리고, 만들고, 표현한다는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바탕으로 기술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미술교육의 범주로 포괄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하면 한국의 미술교육은 여전히 낡은 미술개념을 고수하는 입장이지요. 저로서는 새로운 세대들이 게임과 디지털 카메라에 익숙한데, 이들에게 여전히 그리고 만드는 작업만을 교육한다면, 미술교육 자체가 억압이 된다고 봐요. 게다가 뉴미디어라는 것이 여전히 예술적 표현과 생각의 기록과 질문을 던지기 위한 ‘도구’인 한, 결코 미술을 대체하는 요소가 아니겠지요. 오히려 뉴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교육적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전효관: 미술사에서 그런 선례가 있을까요?

박신의: 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 구성주의와 생산주의 예술, 그리고 그 흐름을 서구의 바우하우스에서 받아들인 라즐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의 예술 개념을 모델로 두고 있어요. 생소하실지 모르겠는데, 모홀리-나기는 우리가 잘 아는 파카 만년필을 디자인 한 사람이에요. 그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 바우하우스를 운영하는 데 보탰다고 하지요. 그는 회화에서 조각, 사진, 영화, 건축, 디자인 분야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이어서 오늘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컴퓨터를 가지고 많은 작업을 했을 겁니다. 또한 독일 바우하우스와 미국의 바우하우스를 이끌기도 한 훌륭한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요. 그는 바우하우스 총서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1924년에 발표한 사진과 영화 등의 미디어에 대한 예술적 사고는 차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로 남고 있답니다. 제가 이 예술가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큰 의미를 두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다면적 능력을 믿는다는 점이고, 또 예술이 한 사회의 문화생산에 기여함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미디어 발달에 대해 능동적인 대응을 보여준 태도에 있구요. 저는 예술이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까운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미디어 역시 그런 생체리듬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전효관: 이제 문화예술교육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죠.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박신의: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의 생체리듬을 일깨워주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답하고 싶어요. 다시 말하면 생체리듬이란 열려진 것이어서, 이를 통해 인간은 다면적인 활동과 복합적인 자기 개발이 충분히 가능한데, 오히려 학교교육이 그 가능성을 닫아버렸다고 보는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최근 문화예술교육의 실행을 위한 연구작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수혜 개념에 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실제로 어떤 문화예술이고, 어떤 교육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 부분이 아쉽더군요. 저는 예술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편이고, 또 그래서 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갖고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발견’이라는 교육 효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생체리듬을 찾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는 전 과정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예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에서 우월함이 있다고 봐요.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나 계량적인 방식으로 따져보면, 월드컵과 촛불시위로 모인 사람들의 엄청난 공감대와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생체리듬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게 마련이지요. 엄청난 상상력이 수반된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계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는 인간에 대한 신뢰의 기초를 예술가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란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가 없이도 사회가 돌아갈 법도 한데, 왜 그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갖는 걸까요. 그리고 왜 그 결과물을 나눠 갖자고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그럴까요. 그것은 세계를 바꿔갈 수 있는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일 저보고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라면, 제 모델은 바로 이런 구조를 갖습니다.

전효 관: 선생님 말씀에 재미있는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인간의 이성 능력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내 휴머니즘은 어떤 에너지에 대한 신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박신의: 사회는 설득력 있는 ‘공감대’로 인해 바뀌지, 측량 가능한 ‘수치’로 바뀌지는 않거든요. 아시잖아요. 아주 소수라도 내용의 핵심과 설득력을 가지면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된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앞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어요. 선생이 말하는 에너지를 믿는 휴머니즘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래서라도 문화예술교육의 경우도 어떤 예술인가, 어떤 교육인가를 먼저 논의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예술교육을 단순히 예술 향유의 기회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일테면 국립현대미술관을 무료로 입장하도록 한다거나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어린이 그림대회를 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기회 확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에너지를 찾아가도록 하는 교육말입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말하는 ‘예술과 삶의 결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술가라는 전문집단만의 예술을 거부하는 의미이거든요. 그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찾는다는 행동도 일반 대중의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다는 의미이구요. 저는 예술가와 아마추어의 생체리듬을 찾는 공동의 프로젝트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이 행해지길 바라고, 그런 가운데 진정한 에너지가 사회의 힘으로 쌓이는 과정을 보고 싶은 겁니다.

전효관: 어떤 과정과 사례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부연해서 설명해주세요.

박신의: 새로운 예술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네요. 흔히 새로운 예술하면 형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지만, 저로서는 작품 제작의 방법, 작품 감상의 방법, 작품이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법, 작품이 소통하는 경로의 문제에서 새로운 접근을 갖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현대미술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을 감상한다는 개념은 매우 약화되었지요. 현대미술의 혁명은 개념 예술, 즉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예술이 등장하면서 주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어요. 예술가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주고 대중들이 참여하면서 작품을 같이 만들어 가는 개념이 가능하지요. 현재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만날 수 있는 개념미술의 한 사례를 들어볼께요. 공원에 가면 헤드폰이 걸려있고, 누구나 헤드폰을 끼면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와 공원을 산책하도록 가이드를 합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실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헤드폰에서 동일한 바람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립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무심코 지나는 바람소리를 의식적으로 듣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목소리는 오른편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 멈춰 왼편 아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따라하면 그 아래에서 자그마한 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죠. 이렇듯 예술가는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어떤 ‘주의력’을 제공합니다. 그 주의력이 사회의 모순을 읽는 주의력이 되고, 휴머니즘을 헤아리는 주의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가끔 예술가들을 정의할 때, ‘주의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주의력이 왜 중요한지, 왜 그것을 존중해야 하는지, 한번 같이 생각해 볼까요?

전효관: 현실적인 딜레마가 있을 수 있지요.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버린 공간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해야 하고, 그런 교육을 해줄 예술가의 결합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특히 문화예술교육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말이죠.




박신의: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개념과 철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방안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리라 봅니다. 학교 교육이 바뀌면서 가능할테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예회관, 문화의 집 등의 문화기반 시설을 통한 교육, 공공성을 살린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등이 모두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에는 기획자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봐요. 최근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인력풀을 만든다고 하던데, 인력풀을 직접적인 교육자로서 예술가에 집중하지 말고, 매개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자가 포함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전효관: 문화교육, 예술교육 명명법이 다르고, 그 명명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요. 관객 개발의 입장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부터 교육개혁의 맥락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도 있지요.

박신의: 저는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을 나누는 입장에는 전적으로 반대입니다. 전문인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고, 대중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은 예술 개념을 전통적인, 혹은 모더니즘적 구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예술인을 위한 교육도 매우 중요하지요. 그것은 한 사회의 경쟁력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문인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교육 자체로 전제된다는 것은, 교육 개념에서 대중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이 문제를 새로운 예술에서 풀었지만, 실제로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문화예술교육, 즉 대중을 새로운 예술행동의 주체로 유도하면서 도시문화를 바꾸는 것, 문화환경을 바꾸는 것도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강의식 개념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제 수업은 일종의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고 봐요. 다시 말하면 프로젝트는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협업으로 생각을 바꿔가고 현실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해 가는 것이지요. 문화예술교육의 프로그램을 고민할 때에도 ‘프로젝트’ 모델을 고민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에 대해서라면, 뭔가 모험을 하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육의 효과가 엄청난 것임에도, 그것을 통해 전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감히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예 이번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위험한’ 일을 저질러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생체리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이에요.

전효관: 현실적으로 사회적 사실로는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를 접근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언젠가 선생님과 같은 토론회에서도 문화의 민주주의, 예술의 질 문제 이런 것이 쟁점이 되었지요.

박신의: ‘문화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프랑스 문화정책에 기조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도 전문 예술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술이 바탕이 되고, 예술이 사회화되는 것이 문화이며, 그 문화가 사회적, 제도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문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만일 이것이 편의적으로 해석되면 예술의 힘을 배제할 수 있다고 봐요. 직업적으로, 제도적으로 전문가와 아닌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갖는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화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여야 한다고 봅니다.

전효관: 사회 참여를 통해서, 정책 개입을 통해서 느끼시는 점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박신의 : 저는 정책평가위원회에서 정부 업무와 정책에 접하면서 궁극에는 모든 사회문제가 ‘문화적으로’ 밖에는 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카드대란이나 유해식품, 청소년 범죄와 모든 사회문제들이 언제까지 형사처벌 강화로만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외교력과 통일의 문제도 문화적 접근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난 주말에 KBS TV를 통해 일본의 한류 열풍을 르포르타주한 프로를 아주 인상깊게 보았는데, 그런 실질적인 문화현상과 교류가 노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만난 현실 정치적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화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회의 치유를 이루어보자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인식 수준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저는 문화는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기득권자들, 혹은 진정한 좌절감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문화는 여전히 향유할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라도 대중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문화가 마음에 닿아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기대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효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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