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


2013년 문광부 업무계획에 “지역별 동호회 활동 거점으로 복합 문화커뮤니티센터 조성”이라는 내용이 있다. 생활권 단위에 지역 유휴공간 및 시설을 지역사회 문화동호회 활동의 거점 공간인 복합문화센터를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문광부의 주요 국정과제로 2014년에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이후 확대하려고 계획하고 있고, 예산을 일반회계로 편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양혜원, 지역밀착형 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 운영 및 인력 활용


1. 목표와 기능


○ 사업 목표 : 생활문화예술 참여 기회 제공 및 지역공동체 회복

○ 사업 대상 : 지역주민

○ 사업 내용 : 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의 조성 및 운영

○ 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의 주요 기능

   - 지역주민의 생활문화예술(문화예술체험 및 창작활동) 공간

   - (넓은 의미의)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지역주민의 표현과 소통 공간

○ 사업 특성 :

   - 문화민주주의, 자율성, 공공성, 자생성(지속성)

   - 체험 및 창작 활동

   - 유효공간 리모델링, 기존 문화시설 활용

   - 리모델링 비용, 시설 및 기자재 비용, 운영비/사업비 지원

   - 민간중심의 Bottom-up approach

   - 지역주민 중심의 자율적 운영

   - 전담인력 외 인력 활용


2. 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 조성 모델


○ 신규 건립이 아닌 유휴공간 및 기존시설 리모델링


○ 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 유형

   - 거점형 : 생활문화예술의 거점 플랫폼 (시군구 단위, 500~3,000m2)

   - 지역밀착형(생활형) : 생활문화예술활동 공간 (읍면동 단위, 100~300m2)

      동아리 연습, 발표활동 및 생활문화예술 프로그램 운영

      주민자율형

      지속성과 자생성

      민관자율형 유도


○ 지원내용

구분

 거점형

 생활형

 공간조성(리모델링) 비용

 국비 지방비 매칭(개소당 15억)

국고 지방비 매칭 (개소당 1~3억)

 시설 및 기자재 구입비용

 국고 부담(2~10억)

 국고 부담(개소당 1~2억)

 운영비용

 국고 지방비 분담

 지자체 및 민간 부담, 연차별 차감지원

 교육컨설팅 비용

 국고 부담

 국고 부담


○ 운영조직 및 인력 모델

   - 거점형 : 최소 4인 이상의 상근인력 배치

   - 생활권 문화커뮤니티공간 : 필요할 경우 시설유지관리자 1인을 계약직으로 배치




생활권 문화커뮤니티 공간에는 요구 시 문화예술교육사 또는 문화여가사 등 전문인력 파견 지원



* 거점형-지역밀착형

* 사람 -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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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주인이 <충청리뷰> 이재표 국장이라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na1509&logNo=2016998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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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변증법)

“교육과정에는 매 학년별 교과의 단위와 목표를 규정한 커리큘럼과 그 교과의 내용과 그 순서를 규정한 실라버스가 있다. 선진국은 실라버스를 교사의 소관으로 보지만 우리나라는 이 수준까지 정해서 교과서로 못박아 놓는다.”


* 커리큘럼(curriculum)

(위키백과)

교육과정(敎育課程) 또는 커리큘럼(curriculum)은 일정한 교육의 목적에 맞추고, 교육 내용과 정해진 수업의 교육 및 학습을 종합적으로 계획한 것을 말한다. 보통 학생의 경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학년마다 학습 상황을 시간표로 정리해 두는데 이것도 교육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과정은 단지 교육과정의 분야에 한정하지 않고 보다 넓은 의미로 교육의 목적과 교육 내용, 교수 활동 및 자세까지 확장하여 말할 수 있으며 교육 접근 자세 자체도 커리큘럼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20세기 중반부터 활발하게 언급되고 있다.




* 실라버스(syllabus)

강의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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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문화예술교육2012. 11. 4. 18:1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1.27.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의 Framework - '교육과정'과 문화예술교육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그 한계와 전망

김대원 (경인고 교감)


1. 서론


학교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은 필연적으로 교육과정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학교 교육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은 학생들에게 ‘어떠한 교육 목표를 어떠한 교육 내용과 방법을 통하여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이며, 교육과정은 학교 교육에 있어서 ‘왜, 무엇을, 어떻게, 어느 수준과 범위로 가르치고 평가하느냐’를 문서로 계획한 교육 설계도이다. 즉 교육의 목표 내용, 방법이나 운영방식, 평가를 포괄하는 의도된 교육계획이므로 학교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은 교육과정 안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은 교육 내용을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기준’, ‘지역 수준의 교육과정 편성‧운영 지침’, ‘학교 수준의 교육과정’ 등 세 가지 수준의 교육과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초․중등학교의 교육목적과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초․중등교육법에 의거하여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문서로 결정, 고시한 교육내용에 관한 전국 공통의 일반적인 기준이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다. 이 기준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정책으로 초․중등학교에서 편성, 운영해야 할 학교 교육과정의 교육목표, 내용 방법과 운영, 평가 등에 관한 국가 수준의 기준 및 기본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떠한 수준이든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 발표자는 그동안 10여년간 교육부에서 국가 교육과정에 대한 기획과 관리를 담당했던 실무자로서의 경험과 학교 현장에서 교육을 실천하는 입장에서 문화예술 교육과정의 가능성과 실천 방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국가 교육과정과 문화예술교육


1)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의 문화예술교육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해방이후 7차에 걸친 개정이 있었고, 1997년 개정된 7차 교육과정 이후 수시개정체제로 변화하면서 현재 2009개정 교육과정까지 부분적인 개정이 이루어져 왔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크게 총론과 각론(교과 교육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총론은 교육과정의 성격, 추구하는 인간상, 구성방침, 편제와 시간(단위) 배당기준,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중점사항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론은 각 교과별 성격, 목표, 내용, 교수․학습방법, 평가 등이 제시되어 있다. 개정된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의 추구하는 인간상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이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다음과 같다.
가.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의 발달과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나. 기초 능력의 바탕 위에 새로운 발상과 도전으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
다. 문화적 소양과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
라.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


<중간 생략>


2) 국가 교육과정 개정 절차


3. 문화예술 교육과정에 대한 전망


1) 문화예술 교육과정 수립을 위한 교과적 접근

2) 문화예술 교육과정 수립을 위한 비교과적 접근

3) 문화예술 교육과정 수립을 위한 정책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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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1.27.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의 Framework - '교육과정'과 문화예술교육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의 명암

김선아 (한양대 교수)


1. 들어가며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무엇을 담고 있을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이 있다. 반면에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현실 속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떤 파급 효과를 가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교육과정이 문화예술교육에서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마술적 힘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점검해야 할 것은 공식적 교육과정이 문화예술교육에 가져올 수 있는 불행과 희망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에 과연 교육과정이 필요한가?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수립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을 수립함으로써 혜택을 받는 것은 누구인가? 누가 문화예술교육의 교육과정을 원하는가? 혹은 원하지 않는가?

본 연구는 비판교육학과 예술교육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토대로 교육과정의 성격과 예술교육의 역할을 살펴보고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가지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문화예술교육에 있어 단일화된 혹은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과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나름대로의 필요성과 가치를 지닌다는 대립된 입장을 가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각들을 탐구하여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에 대한 담론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2.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무용론


명제 1. 다양성과 맥락성을 가지는 문화예술교육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보편성, 합리성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의 수립은 가능하지 않다.


문화예술교육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맥락적인 차원에서 개별적인 경험에 기초하는 반면, 교육과정은 보편성, 합리성,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문화예술에서 문화와 예술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이것이 단순히 문화와 예술의 병렬된 개념인지, 교집합인지, 아니면 온전하게 통합되어 문화교육 혹은 예술교육과 구별되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 용어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에 관한 교육과정을 수립한다는 것이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1) 공식적 지식


교육과정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논의하다보면, 사람들 간에 서로 다른 교육과정을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분명한 교육적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위한 교육의 내용을 구성하여 명시한 것이 공식적 교육과정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르쳐질 때에는 의도하지 않는 것이 학습되기도 하며, 교육과정에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신념, 가치, 태도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공식적 교육과정은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명료한 내용 체계를 중심으로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합리주의적 논리에 따른 교육과정은 단순하고 명료해 보일지라도, 현장에서 적용될 때에는 괴리감과 모호함이 나타난다.

잠재적 교육과정은 교육 문화 혹은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를 통하여 경험적으로 체득되는 사회화, 가치, 문화적 관습, 권위에 대한 복종, 계층구분의 강화 등에 관심을 둔다. 교육과정은 그것 자체로 전달되고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들 즉 교육의 주체들에 의해 선택되며 해석되고 내재화되는 것으로서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특히 교육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학습자 자신의 신념, 가치, 경험에 비추어 주관적으로 표현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문화예술교육의 특성상 잠재적 교육과정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교육과정을 수립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 목표를 미리 선정하고 이에 따른 지식을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이에 반해 예술교육은 비구조적인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연성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지식 구성이 필요하다. 

문화예술을 구성하는 지식 영역들은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에 목표지향적인 교육과정이 얼마나 의미 있는 방식으로 문화예술의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존재론적 측면에서 문화예술교육은 현 시대와 역사의 지평에서 “지역 공동체와 세계와 소통하며, 개인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고 구현하는 전 과정 자체를 교육의 과정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신승환, 2007: 105). 이와 같은 삶의 역동성을 담은 문화예술교육을 몇 가지의 핵심 요소로 추출된 공식적 교육과정으로 박제화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2) 합리성의 함정


공식적 교육과정은 사실과 합리적 방식에 기초함으로 ‘권위’를 가지게 되며, 분명한 사회적, 개인적 목적을 통하여 정당화된다. 교육과정의 합리주의적 절차는 다양성과 맥락성을 상실한 교육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기능한다. 공식적 교육과정의 문제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이 합리적인 교육과정의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표지향적으로 만들어지고 제안된 교육과정과 교수학습 자료들이 전제하고 있는 합리성엔 함정이 있다. 교육과정의 패키지 속에 녹아 있는 효과성과 통제의 언어는 명백히 비판보다는 복종을 부추긴다.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 창의적 인재, 배려와 나눔의 인성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으나 이러한 인간상이 구현되는 방법이나 사회문화적 맥락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학교와 사회의 구조 속에서 예술을 통하여 가치의 문제를 고민하고자 하는 문화예술교육에서 교육과정은 만들어진다고 해도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정한 지식을 공식적 교육과정으로 조직하는 것은 중립적일 수 없다. 교육과정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지식이 가치가 있는지를 선별하고 분류하여 체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지식의 경중과 위계를 구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문화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규범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을 수립한다는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성격과 모순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정책적 노력과 담론이 확산된 배경에는 형식주의와 심미주의에 제한된 예술의 개념을 확장하고 사회ㆍ문화적 관점에서 확대하고자 한 지속적인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동연(2007)은 문화예술교육의 실천과제가 경제적, 정치적 지배 논리에 의하여 위상이 위축된 예술교육의 상황을 비판하고 예술의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이 형식주의에 머무르거나 사회 모순을 예술로 형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이 교육적 활동을 통해서 사회와 직접 소통하며 모든 사람이 예술을 통하여 자기성취를 이루도록 하는 문화교육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합리성으로 무장한 공식적 교육과정의 역할이 지식과 교육적 경험을 파편화하고 계층화하였음을 고려할 때, 문화예술교육을 공식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으로 구조화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접근되어야 한다.


3.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당위론


명제 2. 문화예술교육은 현 시대에 교육적(pedagogical) 목적을 가진 사회적 노력으로서 이를 공유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교육과정은 마땅히 수립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중앙집권적인 교육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그것이 교육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방식 혹은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교육과정의 본질적인 목적을 구현하는 데 생기는 다양한 장애와 한계점들이 교육과정 자체를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1) 도구적 차원


Eisner(2007)는 교육적 문제에 있어 완전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의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시도하면 이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적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문제에 대하여 관심과 집중을 기울여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방향이나 비전 없이 아무 것이나 즉흥적으로 해 보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교육적 지향점에 따른 비전을 세우고 이를 실체로 만들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교육과정은 그 자체로 완벽한 학문적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비전과 이념을 구체화하고 이것이 교육적으로 실천되도록 하는 도구로 보아야 한다. 또한 공공의 목적을 수행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성격과 내용을 구상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가는 과정에서 교육과정은 유용한 담론 형성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문화와 예술이 아직 내적으로 통합되지 못하였고, 예술 장르의 경계 안에서 교육과정이 다루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문화예술을 아우르는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는 문화예술교육의 인문학적 기반에 대한 사고를 심화한다.

Eisner(2007: 191)는 교육과정을 “마음을 변화시키는 장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교육과정 개발은 예술교육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 지향점, 열망 등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것들을 실제화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이 정형화된 사고를 주입하는 학교 교육에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신념,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삶을 충족시킬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있다는 믿음이 실제로 그러한지 탐구하고 검증하는 도구로서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이 기능할 수 있다.


2) 실천적 차원


공식적 지식을 토대로 한 교육과정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Apple(2004: 85)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 교육과정은 저항적이고 억압당한 집단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진보적인 교육 운동이 분열되고, 교육 운동가들이 지역이나 주 단위의 차원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학교의 재정상태와 관리체제 속에서, 국가 교육과정은 이 집단들을 연합할 공통 의제가 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은 무엇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규정하는 체계가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대하여 공동의 목적을 구성해가는 의사소통을 위한 공식적 제도가 되어야 한다.

교육과정이 다양한 교육 주체들 간의 의사소통을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이론과 실제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의 개발은 현장을 수정하고 바로잡기 위한 이론적 처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론화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때 문화예술교육 교육과정은 실천을 성찰, 개선할 수 있는 기본 구조로서 기능할 수 있다.

문화예술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이론가와 실천가의 연합이 요구된다. 문화예술교육의 교육과정은 사회와 교육을 변혁하는 기제(agency)로 기능할 수 있으며, 이는 실천에 대한 반성과 함께 행위에 대한 이론화 과정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4. 나가며


문화예술교육이 가지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사회, 문화, 정치, 교육, 예술, 철학의 인문학 전반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성격일 것이다. 이는 곧 시각과 가치의 충돌과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며,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간편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희망을 생각하는 것은 문화예술교육과 그 주체들이 가진 ‘교육적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교육과정에 대한 Eisner(1983)의 책은 세 가지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어디쯤 와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문화예술교육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이와 같은 성찰이 문화예술교육의 틀을 마련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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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0.2.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에서의 인간 이해 - '인간'과 문화예술교육


!느낌과 ?물음의 과정
- 예술교육에서의 인간 이해

김성희 (서울대 교수)


1. 들어가며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삶을 표현하고 삶을 넘어서기도 하는 예술은 그 예술이 형성된 각각의 문화를 대변한다. 문화는 지속성과 상황성을 포함하며, 지역성과 시대성을 반영한다. 결국 문화는 포괄적인 인간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를 식물로 본다면, 예술은 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꽃의 총체적인 아름다움에 이 지상의 생명체들이 모두 감응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결국 모든 생명체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내포한다. 그것이 없이도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지만 단지 ‘생존’의 수준이고 더 ‘상향上向’된 개체를 생성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도태된 상태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꽃에서 ‘아름다움’은 생존을 위한, 그것도 상향된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건인 것이다.
인간의 오감을 감응시키며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은 문화의 총체적인 DNA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이 없이도 생존은 가능하다. 단지 인간 삶의 상향된 생존이 불가능할 뿐이며, 거시적으로 보면 소멸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의 각박한 삶에서 예술은 항상 경제논리에 밀려나며 여유가 있으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일 뿐이다. 그러나 식물들을 보라. 그들이 척박한 땅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않는 것을 보았는가? 기름진 땅이라면 보다 크고 화사한 꽃을 피우겠지만, 척박하다고 하여 아름다운 꽃을 생략하지는 않는다.
인류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오늘날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린 때는 역사상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풍요만큼 생존의 위협도 커지고 있다. 생존을 위한 경제성만을 적용시켜 나간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경제성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화학적 변화가 필요하고, 이러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분야가 언뜻 가장 비경제적이라고 인식되는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추구되고 있는 ‘창의성’으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술에 내포된 ‘근본적 변화’는 오감과 연결되는 ‘아름다움’의 겉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겉옷인 동시에 인류가 추구하는 방향을 지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육에서도 예술은 여타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오늘날은 더욱 비중 있게 추구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이 글에서는 예술과 예술교육의 특성을 느낌과 물음의 과정으로 집약하였다.


2. !느낌의 과정


느낌은 생명체의 살아있는 감각이자 모든 창의적 가능성들과 예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의 과정은 생명체로서의 인간 삶의 과정이자 예술 실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 느낌을 갖는 인간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느낌을 가지며 살아간다. 느낌의 상태에서는 몸 감각들이 하나하나 열려 활성화되고, 통합적으로 작용하며 직관적 성향을 드러낸다. 느낌은 일차적으로 감각기관과 관련되므로 나의 외부적 환경에서 촉발되는 경우와 내적인 작용으로 스스로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모두 ‘관념성’에 매이지 않아야 만날 수 있는 세계임에는 분명하다. 즉, 느낌의 세계는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적 체험이 중요하다.

예술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 ‘느낌’에서 시작된다. 동아시아의 걸출한 화가 스타오(석도石濤, 17세기)는 감수성(感受性:받아들여 느낌)이 분별의식(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의식적 작용) 보다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창의적 사고에 대한 연구자 팀 허슨Tim Hurson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성적 성향의 창의적 사고는 비판적 사고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존의 분별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틀’ 즉, 관념성으로 느낌에 접근한다면 창의성과 결부된 진정한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물리학자인 파인만 Richard Phillips Feynman은 문제를 풀지 않고 ‘느꼈으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수단
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느낌의 시작은 나의 관념성을 거부한다. 바로 이는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추구해온 ‘무아無我’, ‘허심虛心’, ‘좌망坐忘’, ‘물아일체(物我一體:대상과 내가 하나가 됨)’의 상태와 같은 맥락이다. 나를 형성해 온 기존의 틀을 벗어나 세상 속에 나를 투
여한다. 이러한 투여는 관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관이 생생하게 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체험’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라고 인식되어온 모든 사고의 틀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상태에서 비로소 한 생명체의 특성이 온전히 발현되기 시작한다. 느낌에 진입하는 순간,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창작도 시작된다.
창의성은 과거의 기억과 함께 상상과 미래로 향한 추론을 한순간에 강력하게 통합하여 방대한 정보량을 처리하는 능력이다. 창의성 연구로 유명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ly Csikszentmihalyi는 “일반인의 상태와 달리 창의적인 사람들은 매우 예민한 감정을 느낀다”라고 언급한다. 이 예민한 감정이 느낌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은 생명체가 살아있는 생생한 실존의 감각이며, 창의력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면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지점이자 예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뇌로 느끼는 인간


일반적으로 좌뇌는 몸의 오른쪽을 통제하고 분석적 ․ 순차적 기능과 함께 논리 ․ 연산․ 시간감각 ․ 언어능력에 관련된다. 반면, 우뇌는 몸의 왼쪽을 통제하고 종합적․ 동시적 기능과 함께 감정표현 ․ 문맥 ․ 공간감각 ․ 예술적 감각 ․ 큰그림 ․ 창의성에 관련된다. 이처럼 좌뇌와 우뇌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므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양 쪽 뇌의 균형 있는 활용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뇌는 좌뇌라고 생각해 왔다. 즉, 우뇌는 메이저 뇌인 좌뇌를 보조하는 마이너 뇌로서의 역할에 불과하다고 믿어온 것이다. 이러한 좌뇌 중심적인 사고는 서구에서는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뿌리 깊다. 현재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사회적 지각변동에 힘입어, 수천년 지속되어 왔던 좌뇌 중심의 역사도 바뀌고 있다.
뇌의 역할과 중요성은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우뇌가 가장 활성화되는 영역으로는 예술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우뇌의 중요성에 대한 인지와 함께 예술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루트번스타인 Root-Bernstein 부부는 ‘느낌’과 좌․우뇌 통합적 역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창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첫째, ‘느낀다’는 것이다. 이해하려는 욕구는 반드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느낌과 한데 어우러져야 하고 지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상력 넘치는 통찰을 낳을 수 있다.


3. ?물음의 과정


예술적 실행은 흔히 일순간에 번뜩이는 영감의 소산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느낌의 세계로만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느낌들은 그 이전의 축적된 느낌들과 함께 수많은 ?물음들의 소산이기도 하다. 느낌은 오랜 축적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서의 느낌은 오랜 축적의 상태를 0(無)로 돌리는 ?물음의 과정을 겪으며 만나게 된다.


1) 성찰하는 인간


관찰은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파악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현대화가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은 “내 작업은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그 관계와 자신의 형성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일상의 당연함 속에 매몰될 것이다.
무언가를 관찰한다는 것은 우연히 마주친 사건일 수도 있고, 나의 의도가 작용하는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적 사건에서 ‘내가 주목한다’라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속에 나의 오랜 ‘추구함’이 숨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관심을 끈다는 것은 이미 내 속에 그와 연관된 씨앗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음을 던지며, 바로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과정이 없다면, 그 문맥을 연결하여 행위의 필연성을 찾을 수 없다면 진정한 창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창출이기도 하다. 지식은 무언가를 깨닫는 행위에서 창출된다. 무언가를 깨닫고 이해하는 행위와 예술행위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에릭 부스는 “나는 예술행위가 무언가를 깨닫고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했다. 예술행위는 학습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학습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지름길의 하나일 수 있다.

2009년 이후 새로운 체제의 교양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하버드대학교의 교양교육 General education 목표는 다음과 같다. “하버드 교육은 자유교육 Liberal Education 이다....... 자유교육의 목적은 추정을 뒤흔들어 놓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의 저변과 이면에 어떠한 것들이 존재하는지를 규명하고, 젊은이의 감각을 혼란시키며 그들이 스스로 방향감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자유교육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설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자기 성찰을 유발하며,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가르치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역사적 계기와 문화적
구성물들과의 만남에서 낯선 경이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미 설정한 정의들을 뒤흔들고, 낯설게 보며, 원점에서 시작하는 예민한 감각의 상태에서 ?물음을 던지며, 성찰하고, 비판적․분석적 시각을 가지며, 모든 상황성에 대해 낯선 경이감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예술행위와 예술교육이 추구해 온 인성의 방향이자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나이젤 비거 교수는 물질적 유용성과 결부된 실용주의와 공리주의를 중심에 둔 오늘날의 교육방향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과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예술과 인문학이 가져다주는 비할 바 없이 귀한 선물은 그것이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 이러한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얻는 이익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낯선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보고, 사랑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에 대해 성찰하면서 우리는 때때로 그들이 ‘좀 더’ 잘 보고, 사랑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갱신은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의 개혁 못지않게 중요하다.”
?물음의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낯설고 모호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술은 이러한 용기를 기꺼이 가질 수 있도록 실제적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2) 정체성을 가진 인간


예술을 실행하는 사람은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그 관계와 자신의 형성에 대한 ?물음과 성찰의 과정에서 예리하게 날을 세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존재론적인 측면을 내포하며, 현전 presence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인지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가장 첨예하게 표현되는 예술의 세계에서 자화상들이 수없이 제작된 것도 이를 반영하는 점이다.

자신을 ‘바로 바라보기’는 솔직한 자세와 물음, 성찰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고 그것을 표현했을 때, 자신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그 표현은 스스로 개성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로 바라보기’에 따른 표현에서는 그 결과물에 대한 ?물음 - 자신의 형성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된다. 그 형성에는 무수한 상황들이 있어왔으며, 그 상황들의 만남이 ‘지금’, ‘여기’로 집약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맥락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뜻하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형성한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찾는 관점이 열리는 것이다.


3) 더불어 사는 인간


우리의 근대 이후는 자신을 솔직하게 ‘바로 바라보기’보다는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타자 바라보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솔직히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타자 바라보기’에서는 자신도, 타자도 진정한 이해와 인정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느끼고, 자신이 속한 문화의 유일무이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타자와 타자가 속한 문화의 유일무이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이러한 조화로운 화합을 위한 삶의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근대기 냉혹한 무력의 세계를 몸소 체험한 가운데 김구 선생이 마침내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이었고, 우리 민족이 이러한 문화의 힘을 스스로 창출하는 민족이 되어 세계의 진정한 화합에 기여하기를 추구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예술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해 나이젤 비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술과 인문학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 낯선 세계를 잘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 겸손함과 부드러움, 관용을
가지고 낯선 개념들과 관행들을 만날 수 있게 하고, 낯선 세계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먼저 그쪽으로 다가서게 한다. 그
것들은 ‘타자’를 잠재적인 예언자로, 즉 무엇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지에 관해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사람으로 존중하는, 정직 한 대화를 실천하게 된다.”
예술을 통해 자신을 만나는 과정은 타자를 만나는 과정으로 연계되며,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그 범위가 확대되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 이는 결국 나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생태적 삶의 공간을 돌아보게 하므로, 근본적으로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한다. 예술의 통로를 통해 우리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나와 전혀 다른 별개의 개체들이 아니라 나와 끊임 없이 교류하고 있고, 나를 형성하는 세계이며, 근원적으로 인간이 돌아가야 할 세계임을 체험하며 !느끼는 과정에 들 수 있다.

4. 열린 마음과 창의적 표현의 인간


!느낌을 갖는 단계에서 이미 자신은 열려있게 된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긴밀한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물음을 갖는 단계에서는 설정된 규정들이 혼란스럽게 흐트러지며 무화 無化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비판적 성향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과 긍정이 함께 작용하며 이마저도 ?표 속에 넣어둔다. 예술은 느낌을 열어주고, 모호함의 세계 속에서 그 느낌을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실행해 보게 한다.
이러한 실행의 과정들 속에서 하나의 개체와 그 개체의 관계망을 인지하게 되고,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력이 형성된다. 즉, !느낌에서 ?물음의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은 하나의 개체가 전체를 향해 원심력과 같이 열려나가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감각이 열릴 뿐만 아니라,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열린 마음의 세계에서는 정체되거나 축소된 상태와 달리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물론, 예술을 체험하면 당연히 지고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을 표현하는 가운데 보다 자
유롭고 자연스러우며, 충만한 상태로 조금씩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은 이러한 표현들을 자유롭고 즐겁게 시도해 보게 한다. 학습해야 할 ‘숙제’나 정답을 맞추어야 할 ‘문제’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내밀한 ‘일기’에 가깝다. 거기에는 규정된 답이 없다. 모든 답은 자신에게 있음을 느낀다. 진솔하게 다가갈수록 모호함의 세계에서 언뜻 드러나는 한줄기 길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개성과 창의성, 조화와 소통능력 등은 바로 이러한 열린 마음과 표현의 상태에서 발현되는 하나의 측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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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10.10.2.

문화예술교육 콜로퀴엄 : 미래사회와 문화예술교육

예술교육에서의 인간 이해 - '인간'과 문화예술교육


미학적 인간과 의미론적 인간

_신승환(가톨릭대학교)


1. 머리말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약 2,500년 전쯤 '이해 체계'라는 커다른 전환이 있었다. 세계와 자연, 인간과 다른 인간, 역사화 문화, 사회와 삶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행위. 이것은 지식이나 진리란 이름으로, 때로는 앎과 직관으로, 또는 믿음의 체계와 신념으로 형상화 되었다. 인간이 지닌 앎과 이해의 과정, 스스로의 지성과 스스로에서 이 모두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생물학적 인간을 문화적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지성적 노력 일반을 우리는 철학이라 이름한다. 철학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자기이해 self-understanding 의 과정이다.

철학이 말하는 최종 근거와 근원은 결국 진선미가 일치하는 데 자리하며, 이것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이루어가는 인간의 자기이해 과정이 곧 인간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철학과 윤리, 예술은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본질적 이해 노력의 과정에서 일치하며, 그에 대한 재현의 방식에서 차이를 지닌다.

철학과 예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기이해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만 철학은 이 과정에서 어떤 지서적 능력으로 문제의 역사를 추적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과 구별된다. 또한 근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관점에서 객체적 지식을 말하는 과학과 다르지만, 근원에 대한 체험과 재현이란 관점에서는 예술과 같은 지평에서 만나게 된다.

근원에 대한 체험과 그에 대한 존재의 의미론적 재현이란 관점에서 철학과 예술은 같으면서 다르다.(동일성과 차이) 서구의 전통은 철학과 예술의 동일성과 차이를 진리 이해와 인간의 지성적 특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객체적 진리와 존재론적 진리, 이성과 감성의 구별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미美의 현상, '아름다운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구한 미학  Aesthetics은 “감성적 인식의 학문”을 가리킨다. 진선미에 관계하는 인간의 이해체계를 지성과 감성, 의지의 세 분야로 구분하여 다룬 전통은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것처럼 논리학(이성), 윤리학(의지와 행위), 미학(감성의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아름다운 것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미학은 그리스어 아이스테시스, 즉 감성, 감각적인 직관, 그 현상에 관한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학은 지각 aisthesis, 즉 감성적 지각에 관한 학문이다. 

예술교육은 예술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예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 존재에의 이해와 해석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2. 인간의 자기 이해


1)

그 시대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표상은 언제나 그 시대정신과 관련하여 거듭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금 주어진다. 새로운 이해와 사유의 패러다임이 제시될 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인간상을 표상하고, 그로써 그 시대정신을 재현하는 것이다. 시대란 시간이 그때마다 '현재'(지금-여기)로 재현된 모습이다.

현재란 지평에서 형성된 인간의 자기이해, 그 안에는 보편적 인간이해와 함께 현재의 지평에서 다르게 이해되는 인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2)

인간은 일차적으로 '사이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 사이, 출발과 완성 사이에, 공간적으로 우주와 이곳 사이, 육체적으로 욕망과 이상 사이, 감성과 이성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그의 정신과 의식은 생명의 첫 시작에 근거하면서도 또한 신적인 영성을 향해가는, 그 사이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모순된 존재이다. 하늘을 바라보지만 땅 위에 자리한 존재, 욕망에 매여 있지만 그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졸재, 이성의 원리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감성의 움직임에 마음을 기울이는 존재이기에 그는 근원적으로 모순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주어지는 근원적인 중간자적 상황과 모순성을 내적으로 매듭짓고 자신 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이를 넘어서려는 과정에서 자신을 이루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영원히 교육받는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 paideia 개념은 어떤 주어진 원리와 객체적 지식을 주입하고, 외적 목표를 향해가는 훈육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이루어가는 양성으로서의 교육을 의미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지평은 주어진 조건과 역사적 경험이며, 미래를 향하는 초월성인 것이다. 주어진 역사적 경험, 초월성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시간은 '지금, 여기' hiter nunc란 시간적 지평으로서 현재이기에, 인간의 자기이해는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이해와 해석의 행위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그를 위한 존재론적 성찰을 의미한다.


3)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과 한계, 근원적 모순성에 의해 실존적으로 불안하고 허무한 존재이면서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며 이를 구현하는 충만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근원적 의미 추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의미론적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타자, 우주와 역사에 의해 관계지어져 있는 존재이다. 관계 안에서 인간은 타자에 연결되어 자신을 이해하며, 타자의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인간은 궁극적으로 책임의 존재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계와 책임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윤리 ethics라 이름한다. 윤리란 한 사회의 관례적 측면 Ethos과 개인의 실존적 열정 Pathos을 조화시키면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에 있다.


4)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정신을 채현하는 보편적이고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의 인간 이해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자신이 지닌 능력, 특히 이성과 계몽된 정신으로 세계와 자연에 맞서는 진보적 인간상으로 재현되었다. 근대를 극본하고 이를 넘어서 새로움을 향해 가려는 시대적 요구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은 어떻게 재현되는 것일까.


3. 미학적 존재


1)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진리와 선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와 함께 인간은 진선미에 관한 질문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면서,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결정해 간다. 인간의 자신의 이해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결정되는 존재이기에인간은 이해하며 해석하는 존재이다. 생물학적 층위를 넘어 인간을 이해한다면, 그는 이러한 존재론적 의미 지평에 자리한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이러한 존재론은 인간이 지닌 지성적 능력, 이성 logos-nous, rationality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이 근대에 이르러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을 얻는 인식 이성으로 규정됨으로써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은 이성을 넘어서는 존재성이란 사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성과 감성은 물론, 인간이 지닌 초월적 지평에 관계하는 영성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미학적 이성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학적 이성에 의한 인간의 존재성은 심미적 이해를 자신의 존재에서 이끌어내는 존재,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특성, 미학적 존재 homo aestheticus라 이름할 수 있는 특성일 것이다.


3)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독특한 심성이다. 예술은 다만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 의해 표현되고 재현된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예술적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근원에 흐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과 그에 대한 재현, 그 안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같은 근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인간이 그것을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이해하고 재현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아름다움에의 체험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존재 이해이며, 작품은 그것이 재현된 결과이며 형상인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은 다만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 영역, 역사의 경험과 세계와 자연에 대한 이해, 자신의 존재와 초월적이거나 성스러운 것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재현하는 존재이다.

인간을 미학적 존재라 정의하는 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란 의미를 넘어서 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의미체험과 의미구현의 존재성을 재현하는 존재이다. 미학적 존재란 말은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의미성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은 물론,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재현하는 존재란 의미이다.


4. 구원과 해방의 예술


1)

예술은 다만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통해 재현하는 인간의 의미 체험과 의미 구현, 존재성의 재현이란 층위를 넘어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듯이 예술은 스스로 자신을 이루어가는 포이에시스 poiesis적 행위에서 이해된다. 창작 행위를 뜻하는 테크네 techne는 포이에시스적 행위가 인간의 산출적 행위로 구체화된 한 가지 형태이다. 테크네는 자연을 변형하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행위이기도 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감추어져 있다. 진리는 기꺼이 자신을 감춘다. 테크네로서 예술은 이러한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그러한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술은 무의미함과 허무함, 헷갈림과 혼돈을 넘어 의미의 세계를 재현하는 행위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은 그러한 죽음을 예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죽음을 현재화하고 죽음을 내재화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행위가 예술로 드러난다. 예술은 인간의 실존성을 떠나 주어지지 않는다. 예술은 자신의 한계와 모순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예술이 아름다움에 대한 이론이 될 때 미적 체험과 표현은 사라지게 되고, 인간의 실존성은 재현되지 않는다. 이때 예술은 종말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되고,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으로 자리하게 될 때, 예술은 종말에 처해지게 된다.


2)

후기 산업사회를 사는 현대의 위기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예술이 종말에 처해졌다는 데 자리한다. 예술의 근원적 체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만 기술행위만이 흘러넘치게 된다. 예술이 다만 자본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에 충실할 때, 그러한 예술은 죽은 예술이 될 것이다. 인간의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진리 추구와 의미 세계, 초월성을 망각할 때, 그를 채현하는 예술은 위기로 함몰되는 것이다.

존재의 위기가 극대화된 근대의 시대정신은 예술을 다만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서만 이해하려 한다. 그와 함께 예술은 순수 예술로,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로 규정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럴 때 예술의 철학은 미학으로 규정되거나, 예술 감상이나 비평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시대는 예술의 삶의 자리를 상실하고 순수예술, 전문가를 위한 예술로 자리한 시대와 일치한다.

미학은 인간의 예술행위를 단순히 미의식의 표현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현재의 위기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진리 추구와 의미 세계, 초월적 지평을 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존재의 위기는 예술과 철학의 위기를 의미한다. 단순히 테크네를 현대 기계문명의 테크닉으로 이해하며, 참된 가치를 상실하고 단지 물질과 기계 문명으로 이 모든 것을 대치시킬 때, 인간과 그의 세계는 본질적인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때 인간의 존재론적 지평은 위에 처해지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구원과 해방은 예술을 떠나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구원과 해방의 예술로 자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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