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쓸까 싶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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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11장 경험과 생각
1. 경험의 본질
경험의 본질은 특수하게 결부되어 있는 능동적 요수와 수동적 요소를 경험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잘 기울일 때,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다. 단순한 활동은 경험이 되지 않는다. 능동과 수동 두 가지 면의 관련이 경험의 풍요로움, 즉 가치의 척도가 된다. 활동이 그 결과의 영향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면, 즉 행동에 의해서 야기된 변화가 되돌아와서 우리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면, 단순한 유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의미가 부여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학습하는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배운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한 일과, 결과로서 우리가 사물로부터 받아서 즐기거나 고통을 받거나 한 것 사이의 앞뒤를 관련 짓는 일이다.
경험이란 원래 능동=수동적인 사항으로, 원래는 인식적인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경험의 가치 척도는 그것이 나타내게 될 관계 내지 연속성의 인식에 있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아주 나쁜 결과를 낳는다.
육체적으로 활발한 아이는 침착성이 없고 처치가 곤란하다. 반면, 활발하지 않고 이른바 꼼꼼한 아이들은 자신이 지닌 그 얼마 안되는 정력을 건설적인 계획과 실행이라는 적극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본능이나 활동적인 경향을 억압하는 소극적인 일에 소비한다.
'정신'을 써서 배워야 할 학과에 대해서도, 그 어떤 육체적 활동이 더불어 쓰여야 한다. 여러 가지 감각-특히 눈과 귀-이 책이나 지도나 칠판이나 교사가 말하는 것을 흡수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들 감각은 외계로부터 정신 속으로 정보를 도입하기 위한 일종의 불가사의한 통로로 여겨진다. 육체적 활동을 좁게 제한해서 정신으로부터-의미의 인식으로부터- 육체가 분리되도록 하는 방법은 어느 것이나 기계적이다.
감각이 지식의 통로가 되는 까닭은 외부의 여러 사실이 그 어떤 방식으로 뇌에 '전달'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는 데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단어의 뜻에 상관 없이, 받아쓰기나 읽기로 단어를 재현하기 위하여 눈으로 이들 단어 모양에 주목하는 방식이 아이들에게 요구될 때, 그 결과 생기는 단련은 단순히 고립된 감각기관이나 근육의 단련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목적에서 행동을 분리시키는 일이야말로 훈련을 기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사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뜻을 분명히 나타내도록 표정을 담고서 읽으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처음에 뜻에 주의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읽기의 감각 운동적 기술을 배운다면, 그 후 지성을 발휘해 읽는 것을 곤란하게 만드는 기계적인 습관이 형성될 것이다.”
2. 경험에서의 숙고 reflection
사고 내지 숙고는 우리가 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결과로서 일어난 것과의 관계 인식이다. 사고라는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갖는 경험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 활동과 결말을 경부시키기 위해서, 바로 거기에 개재하는 것을 알려고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의 통찰이 이와 같이 확대됨으로써 전망은 한층 정확해지고, 포괄적이 된다. 활동과 결과로서 일어나는 일과의 자세한 관련이 발견되면, 사고가 분명히 명시된다. 결국 경험의 질이 변화한다.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경험을 숙고적 경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고는 우리의 경험 안의 이지적 요소를 명백히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목적을 향하여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과 사건의 관련을 고찰하는 일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숙고는 또한 결말에 관심을 둔다는 의미도 있다.
사고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더욱이 불완전한 정황에 관련해서 일어난다. 숙고가 있는 곳에는 긴장이 있다. 사고의 목적은 결말에 이르는 것을 돕는 일이며, 이미 주어진 것에 입각해서 일어날 수 있는 종결을 계획하는 것이다.
모든 사고에는 위험이 따른다.
탐구나 사고에는 반은 알고 반은 깨닫는 중간지대가 있다.
숙고적 경험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다섯 가지
요약
사고란, 행하여지는 일과 그 결과 사이의 관련을 정밀하게 잘 생각한 끝에 설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양자가 관련하고 있는 일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그 관련의 세부에도 주목하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결국 지식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지식의 가치는 그것이 사고에서 사용되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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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ching Artist : 예술교육가?, 교육하는 예술가
Artist-Educator
예술강사
문화예술교육사
축제로 안내하는 행복한 문화동반자 CEMEA
CEMEA 밀리땅(Militant,활동가)의 조건
CEMEA의 활동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시험이나 선발과정은 없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엄연히 자원봉사자들과 구분되며, 주로 미셀 레흐쉬씨와 같은 현직 혹은 퇴직 교사들이 많다. 스스로 활동가가 되기 위해 찾아와 CEMEA가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직접 경험하고 활동가가 되기도 하지만 평소 CEMEA의 자원봉사자 혹은 지역의 이웃들 중 활동가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CEMEA에서 먼저 제안을 하기도 한다. CEMEA 활동가는 사람들이 단순히 문화의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협업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길을 찾는 안내자들이다. 그래서 CEMEA 활동가들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문화라는 것이 만남을 이끌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즉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이다. 이런 가치와 신념을 가진 활동가들은 직접 교육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하거나 제안함으로써 실질적으로 CEMEA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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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간 소리 색체에 관한 교육학적 성찰
상상력으로 교육에 말 걸기
첫째마당 공간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공간
집이라는 공간
학교공간 건축을 둘러싼 이야기 셋
학교공간의 교육학적 조성을 위한 제안
상상력이 살아있는 학교 공간
<부록 1> 지체장애의 한계를 넘어서
<부록 2> 학교공간 건축에서 고려할 사항들
둘째마당 시간
인간, 시간적 존재
삶의 계획으로서의 시간과 희망
학교교육 현장에서 시간이라는 문제
셋째마당 소리
소리,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 내는 목소리
소리―가르침과 배움의 자리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넷째마당 색채
색채에 의한 세계 경험
색채가 존재하는 이유―괴테의 색채론과 교육적 함의
슈타이너의 색채론과 교육적 함의
색채 체험과 표현을 통한 내면의 형성
우리 색은 어디에?―교육적 물음으로서
잃어버린 진실―종교적 색채와 빛
첫째마당 공간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공간
집이라는 공간
학교공간 건축을 둘러싼 이야기 셋
- 학생들의 삶과 학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훈육으로 이해한 일제는 교육공간, 즉 교지(校地)와 교사(校舍)의 구조를 일제식 훈육에 들어맞도록 조성했다.
1669 <학교시설 설비기준령> 제정, '학교표준설계도'
1997 <고등학교이하 각급학교 설립 운영규정>
하지만, 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새로운 감각이 살아있는 건축물 공간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 일본의 자유학원
ㅁ자형 1층 : 아이들은 늘 자연 속에서 흙을 밟으며 살아야 한다.
- 리텔마이어 교수의 학교건축 연구
<학교건축을 긍정적으로 형상화하기: 학생들은 색채와 형태를 어떻게 체험하는가>(1994)
“말을 걸어오는 형상”
- 러시아의 아름다운 학교 운동
학교공간의 교육학적 조성을 위한 제안
상상력이 살아있는 학교 공간
<부록 1> 지체장애의 한계를 넘어서
<부록 2> 학교공간 건축에서 고려할 사항들
둘째마당 시간
인간, 시간적 존재
삶의 계획으로서의 시간과 희망
학교교육 현장에서 시간이라는 문제
셋째마당 소리
소리,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 내는 목소리
소리―가르침과 배움의 자리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넷째마당 색채
색채에 의한 세계 경험
색채가 존재하는 이유―괴테의 색채론과 교육적 함의
슈타이너의 색채론과 교육적 함의
색채 체험과 표현을 통한 내면의 형성
우리 색은 어디에?―교육적 물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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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존중하는 문화예술교육정책
김영경
종이인간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한 채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 내 몸 위로 크게 이어 붙인 종이가 덮인다. 나는 바깥을 볼 수는 없지만, 종이는 희어서 어둡지는 않다. 종이 저편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 손들은 다리 쪽부터 내 몸을 만진다. 엉덩이, 허리, 등을 거쳐 팔과 목, 얼굴로 이어지며, 쥐고 누르고 문지른다. 그 감각은 때로는 얕고 때로는 깊숙하다. 내 몸과 종이 사이의 공간이 점차 좁아지다가, 거의 모든 종이가 내 몸에 가까이 밀착되었을 때 손길은 멈췄고, 이내 종이는 나와 분리되었다. 나는 이제 종이 바깥으로 나왔고, 내가 하고 있던 모습을 한 종이가 속이 빈 채로 그 자리에 있다.
네트워크포럼 별빛살롱 <예술가아빠강사로서 살기!> 중 종이인간 워크숍, 7월 24일,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주변에는 사람의 몸을 본 뜬,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속 빈 형체들이 존재감을 무겁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업에 동참한 사람들은 얼마 동안 종이인간 하나하나를 말없이 대면하고, 이야기를 건네고 난 후, 그 형체를 소멸시키는 작은 의식을 치른다. 우리의 몸과 손을 통해서 탄생한 형체는 잠깐의 만남 후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만, '존재'에 관한 감각과 상념을 남겼다.
예술교육자라는 존재
7월 말에 열린, 인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만남과 교류 자리인 ‘네트워크포럼 별빛살롱’은 <예술가아빠강사로서 살기!>를 주제로 체험예술공간 '꽃밭'의 대표인 이철성과 함께 창작자이자 교육자이자 가족의 일원인 '나'들이 그러한 다중적 역할 속에서 각자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고, ‘종이인간’은 이때 진행한 워크숍이었다. 이철성은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교육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워크숍과 공연 등 창작활동에서도 채워가고 있는, 드문 사람이다.
예술교육자라는 존재에 관한 질문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5월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 때에는 현장 예술강사가 주관하는 이야기마당이 각지에서 개최되었는데, 인천에서는 연극 분야 예술강사 신운섭이 <예술+교육=예술교육?……그게 뭔데?>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마당을 열었다. 모인 사람들은 돌아가며 예술강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 교육현장에서 겪는 어려움 등에 관해 얘기했고, 예술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나누었다. 몇몇은 그 고민 속에서 학교예술강사를 그만두고 다른 방식의 활동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예술강사 이야기마당 <예술+교육=예술교육?……그게 뭔데?>, 5월 23일,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우리는 지금 문화예술교육을 가르치는 사람을 통상적으로 '예술강사'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파견되어 정규교과나 창의적 체험활동, 동아리 활동 등의 시간에 국악, 연극, 무용, 영화, 만화․애니메이션, 공예, 디자인, 사진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복지기관, 군부대, 교정시설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하기도 한다.
예술강사라는 일자리
지난 10년은 문화예술교육을 제도화하는 과정이었다. 2003년 당시 문화관광부와 교육인적자원부가 공동사업기획단을 구성한 이후, 문화예술교육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교육을 확대하기 위하여 예산을 확보하고, 다른 부처와의 협력을 추진하고, 학교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회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을 개발하고 운영하여 교육 수혜자를 증대하고 수혜계층을 확산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런데 예산 확보와 사업화 과정에서 일자리 창출이 지원사업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고, 현재 문화예술교육 사업은 예술교육을 담당하는 일자리인 예술강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문화예술교육 예산 중 80% 가까이가 학교예술강사 지원사업에 투여되고 있고, 역시 예술강사를 선발하여 관련 기관에 파견하는 사회분야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까지 합하면 그 비중은 더 커진다.
문화예술교육정책에서 교수자(敎授者)인 예술강사의 중요성을 따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강사라는 일자리는 무척이나 불안하다. 예술강사는 다음 해에는 어떤 학교(기관)에서 어떤 학생들을 만날지 예측할 수 없고, 몇 시간이나 교육활동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당연히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교육을 계획할 수 없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하루의 일을 찾는 일용직처럼, 예술강사는 매해 단기 계약을 하기 위해 선발 프로세스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예술강사지원사업은 문화예술교육 확대와 일자리 창출에 있어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정작 그들이 예술강사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존재 기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예술가들은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사람과 그들의 삶을 점점 존중하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점차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화예술교육사' 제도를 마련하여 추진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불안한' 예술교육자에게 '중요한' 문화예술교육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존재를 존중하는 정책 전환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 우리는 정책의 가시적인 성과지표를 달성하는 데 치중하느라 예술교육자의 존재를 살피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안한 사회적 위치를 저마다 감내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문화예술교육이 지닌 가치와 가능성은 점차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예술 체험의 깊이와 장기적인 교육 효과가 생성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고서, 이를 예술교육자 개개인의 열정을 독려하거나 역량강화를 위한 재교육만으로 얻으려 한다면, 이는 무책임한 정책이다.
예술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풀어갈 수도 없다. 관행에 떠밀려서도 안 되고, 단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서도 안 된다(어찌 보면 우리는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 상황은 제법 합리적으로 풀어왔다).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한지, 필요한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는 무엇을 하고 지역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예술교육자는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물론 예술교육에 참여하는 학습자와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매개자, 현장을 함께 보고 조언해줄 전문가의 존재에 대해서도 사유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3년 업무계획을 보면, “생애 주기별 맞춤형 문화복지 확대로 ‘문화가 있는 삶’을 실현”하겠다는 주요과제에 내년에 1,300개소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예술강사를 파견하고, 2017년까지 전국 모든 학교에 예술강사를 파견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문화예술교육지원정책의 확대는 탄력을 받고 있고, 그에 따라 예술교육을 자신의 일로 삼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날 것이다. 예술 체험을 통해 감성을 풍부히 누리고 소통과 공감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여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지원정책이 유지 확대된다는 사실은 크게 반길 일이지만, 그 계획이 기존 사업의 양적 확대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은 깊이 우려스럽다.
지난 5월에 있었던, 문화예술교육의 지난 10년간의 성과와 앞으로의 10년을 전망하는 포럼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양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질적인 성장과 발전이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아직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하고 있다. 중앙은 중앙대로, 지역은 또 지역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모색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2013 문화예술교육포럼 <문화예술교육의 지난 10년, 앞으로의 10년>, 5월 24일, 한국언론진흥재단
金榮庚 1971년 인천 생. 제법 자유롭게 살다가, 국록(國祿)을 받고 문화예술교육 일을 한 지 조금 되었다. 덕분에 감각을 누리는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에 근무하고 있다. shal@if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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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이 비정규직이어도 살아갈 수 있는 최소조건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고용 여부에 의해 생존의 최소조건마저 흔들리고 와해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용 여부와 무관하게 생존의 최소비용을 '기본소득'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못난 좌파'는 가라!…이제 '기본소득'으로 뭉칠 때!"
[99%를 위한 기본소득] 기본소득과 진보의 진화
곽노완 기본소득네트워크 학술위원장·서울시립대 교수
2012.1.18.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118081619
가이 스탠딩이 2011년에 <프레카리아트(The Precariat)>에서 말했듯이, 모든 사회성원 각자에게 돌아갈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은 연합지성을 갖춘 99%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과 진보좌파의 재구성을 위한 비전이다
젊은 세대가 등록금과 빚, 전망도 희박한 취직 준비로 자기의 소질과 가능성을 소진하는 대신에, 무상급식ㆍ무상교육ㆍ기본소득을 누리게 된다면 자본에 종속된 임금노동자가 되기 위해 목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수많은 일자리와 활동들을 스스로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세금 걷어,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99%를 위한 기본소득]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와 기본소득
권정임 서울시립대 연구교수·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
2012.1.2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126140441
기본소득의 실시는 경제발전, 나아가 생태 친화적 ‧ 질적인 경제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결과 생태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지속가능한 생태사회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귀족 아빠', '평민 아빠'…초딩도 안다
[99%를 위한 기본소득]'비정규직'·'여성'이 기본소득 실현의 적극적 주체 되어야
박이은실 한신대 연구교수·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
2012.1.3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131101905
새롭게 도래한 신분체계가 봉건제적 신분과 엄밀히 따져 다른 것이 꼭 하나 있다면 그것은 봉건제적 신분이 공식적으로는 엄격히
생물학적 계보를 핵심으로 한 것이었던 반면 새로운 신분제도는 자본가가 정해주는 관계를 핵심으로 한 것이라는 점이다.
[녹색평론] 131 (2013년 7-8월)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강남훈 한신대 교수, 경제학, 기본소득네트워크 한국 대표
곽노완 서울시립대 교수, 경제철학, 기본소득네트워크 학술위원장
김종철 평론가, <녹색평론> 발행인
곽노완
저는 가처분 GDP 중 50%까지는 모두에게 똑같이 돌아가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강남훈
급진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정책, 기본소득
김종철
<녹색평론>을 만들면서 두 가지를 알았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는 지역통화(local currency), 또 하나가 기본소득. 알고 보니 앙드레 고르나 에릭 프롬도 벌써 수십 년 전부터 기본소득을 언급했더군요.
강남훈
마틴 루터 깅이 죽기 직전에 계획했던 운동이 '빈자들의 행진'이었는데, 이 운동의 핵심 요구사항은 흑인을 포함해서 백인까지 모든 미국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기본소득의 논리
곽노완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생계에 필요한 돈이나 현물급여를 조건 없이 지급하라는 요청이고, 원칙입니다.
왜 줘야 하느냐? 자연자원이나 자연생태계와 똑같이 사회적 혹은 역사적인 자원도 지속적으로 누구나 같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강남훈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사회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골라내서 필요한 것들을 최소한으로 제공하는 형태의 복지, 즉 선별복지방식엔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선별복지로 인해서 사실상 소득이 역전되는 불공정한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하나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행정비용입니다.
모든 노인에게 소득에 관계없이 20만원씩 준다는 공약은 노인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곽노완
부자에게도 줄 때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받게 됩니다. 모두에게 복지혜택을 주면 내는 것과 받는 것을 계산할 때 받는 게 더 많은 사람들이 아무래도 다수가 됩니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즉 실패하더라도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 아이들 교육시키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거도 보장된다는 믿음이 있으면 삶의 태도가 용감해지고 창의성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발산하게 되겠죠. 기본소득의 철학은 돈이 없고 생활이 불안정해서 사람들이 재주나 잠재력 혹은 '끼'를 발휘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서 더 풍요롭게 인류의 능력을 향유하자는 겁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당연히 부자들에게도 주는 게 맞죠.
김종철
내 자식도 기본소득 받고 내 자식의 자식도 기본소득 받는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산다면, 상속 같은 거 전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살 수 있잖아요.
: 탈성장시대와 기본소득
곽노완
독일의 해적당, 그리스의 '시리자', 이탈리아의 베페 그릴로가 이끄는 오성운동 그룹. 기본소득은 최근에는 빠른 속도로 재미를 보는 어젠다가 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남훈
시장만능주의가 1980년대부터 한 30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의 지배적인 정책 사상이 되었는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붕괴하면서 금융위기가 닥치고, 실업률이 높아지고 유럽 여러 나라에 재정위기가 닥치는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적인 모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정책이나 제도로는 안되니까 기본소득같은 새로운 제도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이 필요없어지고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건 진짜 거짓말입니다. 고용이 줄어드는 시대에 기본소득은 아중 중요한 대인인 것 같습니다.
산업혁명 당시에 비하면 평균 노동시간이 16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고용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의 흐름입니다. (그후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곽노완
(국회의원들은) 대체로 재원이 막대하게 든다, 잘못하면 허황된 공약이라고 오해를 방아서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식이었어요. 진보정당이나 소수정당도. 지금 좌파나 진보적 정당은 오히려 보수진영보다 자기혁신을 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세력으로 외부에 인식되고 있습니다.
김종철
사실 지금은 좌파든 우파든 보수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하다고 할 수 있어요. 기본소득을 선뜻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그 보수적인 낡은 공식, 즉 일을 안했는데 어떻게 돈을 주느냐 하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의 소득만 생각하는 거죠.
시대는 변해서 고도의 경제성장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던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는데도 그 성장시대에 가능했고, 또 그때 지배적이었던 논리를 가지고 사회변혁을 꿈꾸는 게 문제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협동조합운동이 본격화되는 분위기 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중요한 우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고 전면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기본소득이 실현되어야 할 것 같아요.
: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
김종철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돈을 준다는 아이디어를 사람들이 쉽게 답득할까. 이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독일 사람들이 만든 <뭄ㄴ화충동으로서의 기본소득>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인터넷에서 봤는데 재미있더군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일을 계속할 거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80%가 넘습니다.
강남훈
1970년대 전후, 미국은 민주당, 공화당 구분 없이 기본소득 보장을 추진했던 것이죠. 닉슨의 법안(마이너스 소득세)은 의회에서 두 번 논의되었는데, 두 번 다 하원에선 통과되고 상원에서 부결되었어요.(민주당의 좌파들이 이거 너무 약하다고 반대한 거예요. 공화당은 너무 세다고 반대했고요.)
그후 미국에서 네 군데, 캐나다에서 한 군데를 정해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면 사람들이 과연 일을 안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3년동안이요. 실험이 끝날 때쯤 되니까 시장만능주의 시대가 시작되었거든요. 실험결과는 다 묻혔습니다. 노동시간이 줄긴 줄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줄었어요. 일을 하다가 안한 사람은 한 명도 억었고요. 다만 일하는 시간이 줄었어요. 특히 어린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노동시간을 많이 줄였어요.
김종철
일정한 기간 동안의 실험이라면 그것은 원래 기본소득의 취지에서 조금 벗어난 게 아닌가 싶어요.
강남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성서에서 말했을 때, 그 일이라는 건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가사노동도 일이고, 사회봉사도 일이고, 예술도 다 일이니까 기본소득을 지급받으면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못하던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곽노완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생각은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일을 안할 것이고, 따라서 기본소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재원이 줄면 그 정도의 기본소득 가지고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시 자본주의적 노동이건 그렇지 않은 노동이건 경제적 부를 생산하는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GDP가 증가하고 기본소득의 재원도 늘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역동적인 균형이 이루어질 거라는 것이죠. 기본소득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의 50%가 될지, 30%가 혹은 60%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국 역동적 균형을 찾아가게 되기 때문에, 얼른 봐서 유토피아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 같아도 적어도 경제논리로 본다면 가장 지속성이 높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철
우리가 노동이라고 하면 임금이 지불되는 일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노인을 돌본다든지 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임금이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일로 대접도 못 받고, GDP에도 계산되지 않죠. 기본소득을 실시하면 상황이 달라지겠죠.
에릭 프롬도 그 점을 강조했지만, 기본소득이 있으면 사람들이 일을 하기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은 지금까지의 임금노동이라는 것이 대체로 비인간적이고 소모적인 노역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남훈
가사노동이나 친환경 농업뿐만 아니라, 시간강사, 예술가, 정치가들도 기본소득으로 더욱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김종철
만약 기본소득이 실현된다면 시골사람들에게 생존의 여유가 생기니까 핵발전소나 유해 시설물들이 간단히 들어설 수는 없을 거란 말입니다.
교육문제는 결국은 일류 대학을 나와야 번듯한 직장도 얻고 사람 노릇 제대로 하면서 살 수 있다는 풍토가 조장하는 극심한 입시경쟁 때문인데, 이런 풍토에서는 대학입시 전형방법을 약간 수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죠. 대학에 가든 안 가든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만 된다면 이 모든 게 하루아침에 해소될 수 있겠죠.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이다” 원래 인간은 저마다 독특한 예술가적 소질을 갖고 태어났지만, 생활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타고난 자질과 재능을 망각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기본소득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기본소득, 노예노동의 종식
곽노완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힘, 자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돈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할 힘을 주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살리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가장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안사회를 훨씬 더 용감하게 설계하고 기획해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줍니다.
과반수가 일하지 않고 있는데, 일하는 사람이 다 갖겠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이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동시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김종철
시간문제일 뿐 결국은 실현될 프로그램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뒷북치지 말고, 약자들이 더 희생당하기 전에, 사회가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떨어지기 전에 슬기롭게 채택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기본소득의 의의를 여러 측면에서 얘기해왔지만, 핵심은 역시 기본소득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노동력의 탈상품화에 가여하는 프로젝트라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노동력이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데, 인간을 상품화한다는 점에 자본주의의 극악한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남훈
기본소득은 임노동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정책입니다. 노동을 판매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요. 즉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을 약화시키는 정책이지요.
곽노완
기본소득이 소유관계는 건드리지 않는 것 아닌가, 분배만 건드리려 하고, 자본의 독점적 소유라든가 토지의 독점적 소유는 건드리지 않는 거 아닌가 하는 비판이 좌파 쪽에서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재원은 처음에는 투기소득, 불로소득을 환수해서 마련하지만, 투기나 불로소득은 기본소득제도가 계속되면 점차 줄어들 거예요. 그러면 어디서 재원이 나오느냐. 기업을 공유화해서 기업의 수익을 사회적 기금, 사회적 공유로 만들어서 그중의 일부는 노동자들에게 일한 것에 따라 주고 나머지 일부를 모아서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자는 거죠. 소유관계의 변화까지 포괄하는 기본소득을 제안해야 맞는 거예요.
: 기본소득 재원 - 정치적 의지의 문제
강남훈
우리나라처럼 석유 같은 천연자원이 없는 곳에서는 결국 조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3년 국민총생산이 1.300조원 정도 될 것 같은데, 총 조세부담률은 25%를 조금 넘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의 국민부담률은 47.8%까지 됩니다. 우리가 25% 정도 세금을 올릴 수 있다고 가정하면, 300조 원이 넘습니다. 그 돈을 5,000만 명에게 나누어 주면, 1인당 1년에 600만원이 나옵니다.
토지세는 훌륭한 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신용'도 상당한 재원이 될 수 있습니다. 금융국유화는 그리스의 '시리자'나 이탈리아의 그릴로가 공통적으로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는 생태세를 가지고 기본소득을 시작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곽노완
재원을 조세만으로 하면 수혜자는 과반수 이상 되겠지만 전체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의 비율이 높게 나오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어요. 조세가 아닌 재원이 3분의 1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기왕에 사회보장용으로 걷은 돈을 재조정해서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키자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들에는 어르신들께 드리는 기초노령연금, 아동들에게 주는 수당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보장 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합쳐도 우리나라의 경우엔 3분의 1까지는 안됩니다. 그리고 기존의 연금(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놔둘 것인가 하는 것은 논란이 될 수 있어요.
국공유지에 주택이나 상가건물을 지어서 정당한 임대료를 받으면 그것도 수익이 딜 수 있고, 화폐주조 차익도 있지 않습니까?
김종철
토지보유세를 현실화해야 합니다. 원래 토지라는 것은 공유자산이니까요. 기본적으로 토지라는 것은 소유권은 인정하지 말고 사용권만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토지의 공유화는 절실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도 공립은행(public bank) 설립운동이 시작돼야 하는 게 아닐까요? 왜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금융공공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강남훈
긍융은 토지보다 복잡하고, 화폐공급 구조도 이해하기 쉽지 안지요. 또 박정희 시절 관치금융의 폐해도 영향을 주었죠.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종부세 정책 실패(정권 재창출 실패)로 인해서 정치인들이 세금 인상에 더 겁을 먹게 된 것 같습니다.
: 재벌이라는 장벽, 관건은 민주주의
곽노완
금융공공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공공화'와 제가 사용한 '공유'라는 표현은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공공화라고 하면 영어로 'public' 개념이고, 공유라고 하는 것은 'share'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일부러 공공화라는 용어를 피한 것인데요.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복지국가란 것은 국가의 범위, 외연을 크게 하고 역할도 크게 하는 것인데, 이걸 누가 관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공유는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관리자인 최고통치자도 그 이상의 몫을 주장하지는 못해요. 공공화가 극단적으로 갈 경우 1인 내지 1가족 중심의 실질적인 사유화로 귀결될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겁니다. 기본소득의 논리는 공유화(share)에 가깝다는 거죠.
기본소득에 대한 권리는 모든 국민이 n분의 1로 갖기 때문에 어떤 통치자가 들어서도 건드릴 수 없는 형태로 되어야죠. 또 기본소득은 정치적으로는 직접민주주의의 최대한의 확대와 연동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남훈
미국의 무역적자가 매년 6,000억 달러 정도라고 하면, 미국은 그것을 달러를 찍어서 메우고 있습니다. 미국이 그만큼 공짜로 이득을 보는 겁니다. 6,000억 달러를 60억 인구로 나누면 1인당 100달러가 되지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1인당 연간 100달러의 기본소득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곽노완
재벌들이 차지하는 환차익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거기에 세금을 부과하기보다 아예 법률적 제도적으로 환차익을 공유한다는 원칙을 세우면 어떨까요?
환율정책에 정부랑 은행이 상당부분 개입하고 있습니다. 시장논리로만 한다면 대충 1달러에 700~800원밖에 안돼야 하는데, 지금 1,100원이라면 모든 국민들이 30% 이상을 뺏기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국민의 손해를 담보로 수출기업이 이익을 보는 구조입니다.
강남훈
2040년경에 국민연금기금이 4,000조 원으로 피크에 도달하고, 그 이후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해서 200년경부터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추계가 있어요. 현재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1,300조 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2040년이 되면 국민연금이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모든 주식을 다 사고도 남는다는 얘기죠.
곽노완
현재 축적된 국민연금 자산은 400조 원쯤 되는 것 같습니다. 실ㅈㄹ적으로 주식시장의 과반수 이상을 지금도 사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죠.
강남훈
2012년 대선에서 후보들은 노인기본소득, 아동기본소득과 유사한 공약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공약들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주요 요인들이었습니다.
김종철
오늘 충분히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나는 기존 진보진영에서 얘기하고 있는 보편적인 복지시스템과 기본소득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점에서 차별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콜로지와의 관계입니다.
기본소득이 하나의 제도로서 확립도ㅚ면 경제성장에 대한 압력이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합니다. 경제성장을 계속해야 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고용문제 때문인데,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의 필요성 자체가 줄어들 테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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