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사진2007. 7. 11. 11:00

사진과 예술 - 위상의 재편성을 위하여 -

이 영준(사진평론)


오늘날 많은 한국의 사진가들이 사진을 제대로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가 없다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 또한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이 없다는 것(현재 ‘사진영상의 해’를 기하여 추진되고 있는 사진사박물관의 의의와 미래의 파급효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에 대해서도 한탄을 하며 사진도 회화나 조각같이 버젓이 미술관의 공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그 하나는 한국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이 이제는 어느 정도 스스로를 미술관이라는 제도 속으로 편입해도 좋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1990년대 말의 한국에는 내세울 만한 사진가도 많고 (이제 사진계에는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스타급의 사진가들이 일정한 층을 이루고 있다) 사진의 어법도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자신감이란 사진이 이제는 독자적인 예술로서 자리를 굳혔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두 번째 요인은 간단치가 않다. 그것은, 기존의 갤러리나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예술권력의 생산, 재생산 구조에 사진도 동참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예술의 장르들이 미술관, 큐레이터, 비평가, 딜러들의 연합적인 노력에 의하여 오늘날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듯이, 사진도 그러한 지위를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사진이 그렇게 되려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몇 가지 있다.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겠다는 의지를 가진 공간이 있다고 해서 사진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는 큐레이터가 있어야 한다. 과연 한국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반성해 보면 사진이 미술관에 들어간다는 것에 어느 정도의 용이함, 혹은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진을 전문으로 다루는 비평가가 얼마나 되는가, 있다면 그들은 사진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환영하고 있는가를 따져 봐야 한다. 또한 사진이 그저 전시만 되었다가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매매가 이루어지려면 사진전문 딜러나, 사진매매를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있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이 부정형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미술관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는 것, 나아가 사진의 예술성이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현재로서는 한국의 사진에서의 예술권력은 회화나 조각에서와 같이 제도적으로, 담론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작가들의 서열, 위계질서에 의존하고 있는 단순한 구조이다. 아직도 예술로서의 사진의 위상은 한국에서는 불안한 것이다. 그것은 사진 자체의 질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예술권력의 문제는 예술이 그 특유의 미적 담론으로 말미암아 설득력을 가지는 바로 그런 구조를 어떻게 획득하느냐의 문제인데, 사진의 미적 담론은 무엇인가, 나아가 사진을 미적, 예술적으로 규정해 줄 수 있는 별개의 담론의 체계가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담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진이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곧바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은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감추는 공간이고, 열려 있는 공간이지만 닫혀 있는 곳이며, 자유로와 보이지만 규율과 권력이 작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이제까지 미술이 감수해야 했던 그런 모든 조건들을 감수하면서 미술관에 들어갈 것인가는 깊이 따져 봐야 할 문제이다. 결국 미술관은 이미지를 다루는 다른 모든 기관들처럼 규율적 권력을 행사하는 곳인데, 예술작품이 거기 수용된다는 것은 그런 권력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하면 그런 권력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런 길들여지는 절차는 절대로 폭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무언가 진리를 뒤에 감추고서 겉으로는 허구적인 것만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또 “예술의 진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즉 예술이라는 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의 작용이다. 결국 사진이 미술관에 수용되야 한다거나 갤러리에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런 예술권력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예술권력이 새로운 대상을 받아들일 때 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학교에서의 신입생, 훈련소에서의 신병, 감옥에서의 신참을 받아들일 때 하는 일들과 비슷하다. 즉 그들의 기이함, 모남, 튀는 성질들(영어로 ‘이디오신크라시’(idiosyncracy)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깎고 다듬어서 수업 받을 수 있는 사람, 훈련받을 수 있는 사람, 교화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꾼다. 즉 사회 속에서의 규율적인 기관들은 주체를 생산하되, 규율적으로 통제하는 식‘으로만’ 주체를 생산한다. 미술관도 작품에 대해 같은 일을 한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예술품들은 얼핏 보면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인 것 같지만 미술관의 제도적 테두리 안에서만 그런 것이다. (이 불의 썩는 냄새나는 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원폭투하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전시하려고 했을 때 일본인들을 원폭의 희생자로 다루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아 보라.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도시와 영상전’에서 사진 속의 성기의 이미지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상기해 보라.) 이런 사례들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개념적으로도 끝이 없다. 왜냐하면 미술관 하나 하나는 ‘이디오신크라시’를 배제하는 방법과, 철학과, 코드를 가지고 일상적으로 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라는 행사와, 거기에 따라붙는 평문, 카탈로그, 전시제목 등의 텍스트들은 큐레이터의 전문가적 권위와 더불어 사진이라는 텍스트의 의미에 제한을 가하고, 그 해석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함으로써 사진의 의미 자체에 규율을 가하고 길들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을 지냈던 존 사코우스키일 것이다. 그는 1960년대에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거울과 창>이라는 전시에서, 그리고 1965년도에 출간된 <사진가의 눈>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의 모더니즘 사진의 규칙을 명확하게 밝혀 놓았는데, 최근의 평론가들은 이 때의 사코우스키의 전시방식이 사진의 풍부한 내러티브를 협소화하고, 이미지의 자율성과 투명성을 강조하고, 사진가의 유아독존적인 주체성을 강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적 규범에 사로잡힌 큐레이터의 시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큐레이터의 권력이 한 시대의 사진의 흐름을 일정한 내러티브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프레임을 씌운다는 점이다. 사코우스키에 대한 비판에서 드러나지만,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예술”의 내용은 바로 이런 식의 배제의 규칙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 대한 고려없이 순진하게 사진도 미술관에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의미없는 진술이다.
사실 예술로서의 사진의 위상은 사진이 발명된 이래로 불안한 것이었다. 사진의 역사는, 사진이 예술의 위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사진은 그 자체의 전통의 부재로 말미암아 다른 예술 장르와의 기생적인 관계를 통해서 예술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진은 그림의 망령에 시달려 왔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실 사진은 회화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듯 회화를 아버지처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모방과 반항을 되풀이 해 왔다” 이런 모방의 좋은 예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회화주의 사진, 반항의 예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나 에드워드 웨스턴 등에 의해 이루어진 스트레이트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기에 사진은 제도적으로나(19세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미술전시의 일부로 열렸던 사진의 전시; 회화를 복사한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초기의 사진가들; 뉴욕현대미술관의 사진부 개설, 이후 사진을 모더니즘 예술의 일부로 확립해 준 중요한 전시 등), 담론적으로나(초기 초상사진의 미학, 규범, 코드, 소유형태들; 회화주의(pictorialism)같은 사조,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미술이나 문학의 한 형태로서의 사진; 그녀가 자신을 한 사람의 작가로 프로모션한 방식 등) 기생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진가들은 사진이 미술품처럼 팔리거나, 미술관에서 기존의 미술품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을 사진의 지위격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의 중요성과 특성은 여타의 다른 예술과는 다른 제도적, 담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데 있다. 사진은 회화같이 미술관의 벽면에 전시됨으로서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술관과, 다른 시각적 활동영역간의 위계(hierarchy)의 수립이다. 미술관은 인간의 시각예술의 활동이 들어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신전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미술관이 다른 제도적 장치들에 비해 높은 위계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진은 회화나 조각처럼, 하나의 물건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예술작품과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사진은 음악이나 연극처럼 수행(perform)되는 것, 나아가 그 수행의 와중에서 관객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예술로서 간주돼야 할 것이다. 즉 보도, 다큐멘타리, 대중소비, 기록, 관찰, 신분증명, 법적 증거 등의 다양한 영역에 퍼져 있는 사진들은 그것이 대상을 기계적으로 찍은 객관적 이미지라는 사실 때문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이 요구하는 아주 이질적이고 상이한 담론들(뉴스, 진실, 재미, 여가, 과학, 수사, 정찰, 행정) 속에서 사진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그 가치를 부인하는 요인들(어떤 특정한 사진을 가짜라고, 아니면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는 주장들)과 끊임없이 타협, 절충을 벌이며 나름대로의 실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진의 의미는 기호학에서 말하듯이 텍스트 안에 쓰여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가지고 수행되고 작동되는 것이다. 미술도 이런 타협을 하지만 그 공간은 대체로 미술관 안에 한정되어 있는데 반하여 사진의 작동범위는 훨씬 더 넓다.


버티용 카드 1913 <프랑스 경찰의 범죄자 관리시스템인 버티용 시스켐을 사용하는 미국 산디에고 경찰화일

따라서, 사진이 기존의 예술제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수행성에서 오는 의미들을 포기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지 따져 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우리는 예술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학의 역사에서 말하는 예술의 정의를 들이대어 사진의 예술성을 따지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을 뿐 더러,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진이 예술이라고 했을 때 그 예술은 일정한 제도적 틀 안에서 수행되는 예술이 아니라, 그런 틀의 바깥에, 혹은 그 틀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록으로서의 사진, 증거로서의 사진, 관찰의 수단으로서의 사진, 정체성의 식별이나 확인의 수단으로서의 사진을 말한다. 물론 이런 사진들이 작동하는 공간은 철저하게 비예술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의 일반적인 조건이 그러하듯이, 예술로서의 사진은 바로 그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말할 때는 우리는 예술의 정의 자체를 넓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미술관, 극장, 연주장 등 예술의 공간으로 확립된 곳에서 수행되고 보여지는 활동 뿐 아니라, 인간의 지각과 감각을 다루고, 기존의 인간의 감각과 연관된 영역들에 개입하는 활동을 말한다. 특히 전시 뿐 아니라 출판, 홍보, 조사, 기록, 관찰같은 폭넓은 인간활동에 관여하고 있는 사진은, 바로 그런 점들을 빼버리고 예술로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포괄한 예술로서 거론돼야 한다. 물론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기존의 예술에서도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이나 문학같은 장르에서의 경계의 무너짐이나 재설정과, 사진에서의 그것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조지 스펜서 <나 자신을 사진속에 넣기> 1985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술을 말하면서도 예술이 아닌 다른 활동의 영역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예술로서의 사진을 논의한다는 것은 사진을 기존의 예술의 경계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예술을 경계의 문제, 혹은 어떤 특정하게 예술품으로서 정의된 물건을 생산하는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술은 언제나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간의 경계를 허물거나 재설정하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 경계가 재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20세기의 모더니즘이 확립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따라서 경계지워진 영역으로서의 예술,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이고, 한시적이며, 공간적으로는 뉴욕이나 파리같은, 서구의 몇몇 모더니즘의 수도들이라는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사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진을 하나의 제도로서의 미술관, 담론의 장치로서의 미술관의 일부로서의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술관이 어떤 대상에 작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과정,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 작품 뿐 아니라 관객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교육, 통제, 훈련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은 자연스럽게 가치중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기구가 아니다.
사실 작가들도 위와 같은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미술관의 가치, 미술관이 부여하는 가치의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이 예술이라는 아우라에 싸여 비가시화한다는 것이다. 즉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 화상, 언론 사이에는 끊임없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전시라는 형태를 통해서 보여지는 작품에서는 그런 흔적들은 보이지 않도록 청소가 되어 있다. 미술관의 흰 벽이나, 작품의 프레임 등과 같은 장치들은 그런 흔적을 비가시화하고 가치중립적으로 만드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미술관은 가치를 분류하고 위계등급을 매기는 곳이며, 작품의 진정성은 작품이라는 물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제도적인 인정의 체계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다. 또한 미술관이라는 기관은 길들이는 곳이다. 작품이나 관객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위험한 시선, 위험한 의미를 길들이는 곳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길들이기의 수단은 미술, 예술이라는 미학적 교양이라는 코드들이다. 그런 코드에 깃들어 있는 규율적 질서는 디스플레이의 수사, 혹은 디스플레이라는 수사를 통하여 내면화된다. 또한 미술관은 지식과 권력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산에 대해서나,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집단적인 기억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큐레이터의 권력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순간은 어떤 전시가 미술사의 획을 긋는 중요성을 인정받을 때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업적이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미술사라는 지식을 낳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즉 지식은 권력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관의 권위가 궁극적으로 고정되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 미술관의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다. 미술관의 규율과 경계짓기의 관습을 거부, 재검토, 재편성하는 작업들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으며, 새로운 전시의 형태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전의 이론가들은 이미 예술로서의 사진의 어떤 측면이 저항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예술로서의 사진에 따라 다니는 해로운 관념은 아직도 예술작품이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이라는 믿음이다. 벤야민의 예측과는 달리, 사진과 영화의 출현으로 인해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나아가, 현재의 예술제도는 예술품, 작가의 아우라를 강화시키는 여러 가지 전략들,수사들을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아우라는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술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수시로 그 전략과 모습을 바꾸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기술복제수단으로서의 사진이 아우라의 붕괴를 가져 왔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형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사진과 영화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예술에 아우라, 즉 복제 불가능한 일회적 현존성이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품이란 것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박물관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즉 진품이라는 개념은 가짜라는 개념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제도적 장치 없이 그런 개념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에까지 진품이라는 개념, 혹은 진짜의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확장될 때 예술로서의 사진도 두터운 아우라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 아우라의 두께는 회화나 음악 등 다른 더 오래 된 예술의 장르 못지 않다. 사진가들은 작가의 명성과 권위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사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진품으로 추앙 받는다. 그들은 또한 진품성의 유지를 위해 네거티브 필름을 파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우라에 대한 이의제기와, 그것의 유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문화정치적인 갈등이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옳게도, 미술관이 아우라를 회복하려는 시도 그 자체를 미술관의 위기로 보았다. 그는 예술사진의 승리도 그런 위기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다. (크림프,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진”, 더글러스 크림프, 『현대미술의 지형도』 이영철 엮음, 시각과 언어)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사실은 예술로서의 사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사진은 확실치 않은 예술이다. 예술가가 대상에 투사하는 힘, 혹은 그 결정체로서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무질서하고 우연적이며, 혼돈에 가득 찬 것이라는 점에서 사진은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예술이 아니다. 다른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겠으나 사진의 경우 이미지와 대상의 물리적인 밀착성에서 오는 객관성의 외양과 확실성의 외양 때문에 그 불확실성은 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불확실한 사진에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요인은 텍스트의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작가라고 하는 관념이다. 그것은 예술사진에 깃들어 있는 독창성이라는 망령과도 연관되어 있다. 사실, 이미지의 뒤에 있는 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재현에 의해 시작된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한에 있어서, 원본은 항상 연기된다. 재현은 원본의 부재 속에서만 일어난다. “사진은 노출이 이루어지기 전에 전부 구상되어야 한다”는 웨스턴의 말은 재현의 뒤에 뭔가 선험적인 것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그런 선험적인 어떤 것은 그의 마음속에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그것은 세계 속에 있으며 웨스턴은 그것을 복사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글러스 크림프, 위의 글, p.319) 사진이 가지고 있는 외관상의 진실성이 여러 가지 장치(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공모관계 속에 일치시키는 재현의 장치,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러티브, 수사학, 이데올로기 등, 사진을 분류, 정리하는 체계로서의 아카이브, 규율적 제도로서의 미술관)에 의존하고 있음을 은폐, 혹은 비가시화 하는 한에 있어서 사진의 객관성과 진실성이 사진의 예술성의 토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거짓의 생산에 동참하는 것이다.


조 스펜서<나 자신을 사진 속에 넣기> 198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에비게일 솔로몬-고도가 자신이 옹호하는 작가들에 대해 말하면서, “예술사진이 정확히 모더니즘적인 예술형식으로서의 그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때 보여 주었던 경건함과 예의바름에 직접적으로 도전했던 방식들 때문”에 그들을 옹호한다고 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단순히 그들 예술가들(빅터 버긴, 새라 찰스워드, 바바라 크루거, 셰리 레빈, 신디 셔먼 등)의 태도 자체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대항하고 있던 사진의 권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즉 다시 솔로몬 고도의 말을 빌자면, “사진이 완전히 아우라적이고 주관화된 자율적 순수예술로서 제도적으로 강화되고 정당화되는 것과 같은 병적인 징후”는 20세기 후반 고급예술로서의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모습이다. 그 권력이란 미술관 권력, 작가권력, 작품권력, 비평권력 등인데, 이 모든 권력은 고도의 전문지식, 기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고 있고, 그것들을 다시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는 생산적인 권력이다. 즉, 사람을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특정한 형태로 태어나게 하는 권력이다. 예술로서의 사진 속에는 그런 권력이 삼투해 있다.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사진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를, ‘이러이러하게 하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필요충분조건을 밝히는 것은, 그 조건이 설사 아무리 논리적으로 명확한 것이라 해도, 경계의 논리를 다시금 되살린다는 점에서 별 의미가 없다. 단지, 그것은 사진이 제도적인 틀 속에서 보여지는 방식과, 그 속에서 소통되는 의미에 대한 재구성과 재검토를 포함하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만약 예술이라는 것을 경계의 문제가 아니고, 거꾸로 개입의 문제로 본다면 사진이 어떤 영역에 개입해야 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즉, 미술관에 대해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고 그 밖에서 미술관의 작동방식에 개입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또한 보다 더 큰 테두리, 즉 출판, 보도, 증명, 기록, 감시, 관찰 등의 영역에서 사진이 보여지는 방식들이야말로 사진이 개입해야 하는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런데 그 보여지는 방식이란 것이 간단치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사진에 어떤 코드가 작용하고 있는가 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선은, 사진적 재현의 구조 전체가 문제인 것이다. 즉, 우리가 사진을 본다는 것은 이미지 속의 시선, 혹은 카메라의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의 일치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런 관계를 빅터 버긴은 두 시선간의 공모관계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공모관계에서 이데올로기적 작용이 일어난다. 사진이 전달하는 내용 속에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사진 속의 시선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시선의 역사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며, 사진을 보는 주체도 그런 시선의 역사와 더불어 구축된 것이라는 사실이 사진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큐멘타리나 보도, 증명사진에서 사진의 존립근거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는 사진의 진실성(facticity)과 증거능력을 가능케 하는 부분도 개입의 영역이다. 이는 푸코가 말한 진리의 체제(regime of truth)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진의 진실성이 사진이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진리(truth)를 생산하는 담론적인 체제 전반의 문제이다. 즉 사진의 규격에서부터 사진을 찍는 방식, 태도, 어법에 대해 부여되는 코드, 그 코드가 통용되는 제도적 실천이 사진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혹은 진실성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체제에 의해 확증되고, 진리의 담론 속에서 실천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 대한 검토 없이 사진을 진실 되게 찍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다큐멘타리적 사고방식은 아주 소박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진들의 구체적인 실천, 기능방식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진이 감시카메라, 정찰, 주민등록체제 등을 통해 감시와 관리의 기능을 하는 것, 그리고 사진이 그런 경우에 증거로서 작용하는 체제는 일상속에서의 사진의 의미의 아주 큰 부분이다.
또 다른 개입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문제들과도 연관되는 영역인데, 사진과 정체성의 문제이다. 즉 어떤 종류의 사진적 표상(representation)과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의 규정을 따라, 정체성이란 ‘외적인 이미지를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진, 건축, 자연환경, 의복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문화적 표상들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표상에 자신을 맞출(align) 것인가 하는 전략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정체성의 전략, 혹은 정체성의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이미지는 항상 고도의 선택적인 판단의 결과이며,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게끔 만드는 그 구조는 바로 성적,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과 밀접히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요인들에 대한 고려 없이 ‘사진은 만국 공통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이다. 모든 사진이 모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체성에 따라 다르게 어필하며, 거기에는 자신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정체성의 전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조 스펜서<나 자신을 사진속에 넣기> 1985


따라서 개입의 영역들은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이들 모두에 공통되는 개입의 전략이나 방법, 코드가 있을 수는 없다. 각기 다른 영역에 다른 전략이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개입이 없이는 더 이상 예술이라는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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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참고로 삼았거나 논의한 사진 이론의 갈래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문헌목록과 함께 정리했으므로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이론의 중요한 갈래를 든다면 그 초기적인 형태로서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성에 대한 해석과 문화산업비판과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론으로부터 세례를 많이 받았으면서 이들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는 존 버거와 수잔 손탁을 들 수 있다. 두 사람 다 벤야민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버거는 어떻게 하여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킨 체험의 단절과 파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사진적 실천은 무엇인가에 대해, 손탁은 벤야민과 바르트를 절충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문헌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지음, 반성완 옮김, 민음사
『시각과 언어1--산업사회와 미술』 최민, 성완경 옮김 열화당
『이미지와 글쓰기--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롤랑 바르트 지음, 김인식 편역, 세계사
『신화론』 롤랑 바르트 지음, 정현 옮김, 현대미학사
『텍 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동문선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존 버거 지음, 편집부 옮김, 동문선
『말 하기의 다른 방법』 존 버거, 장 모르 지음, 이희재 옮김, 눈빛
『사진이야기』수잔 손탁 지음, 유경선 옮김, 해뜸


한 편, 사진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는 심리학, 해체주의, 담론이론 등으로부터의 영향을 통해 좀 더 넓은 상호텍스트성의 바다로 나아간다. 이제 사진은 단순히 읽어야 할 기호나 사회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문화적 표상이며, 철학, 역사학, 비평이론 등 인문학의 폭넓은 주제들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또한 오늘날 보여지는 바와 같은, 사진에 대한 관심이 단지 매체에 대한 지식의 양이 순차적으로 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와서, 장르 간의 경계의 해체, 심지어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의 해체, 기계적인 이미지 생산방식에 대한 새로운 반성, 매체와 설치 등을 중시하는 작가들의 경향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 여기서는 신체라든가 감시, 욕망, 시선 등 이전의 이론에서는 다루지 않던 주제들이 논쟁의 핵심이 된다. 다음의 저술들은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현대미술의 지형도--비평, 매체, 제도분석』 이영철 엮음, 정성철 외 옮김, 시각과 언어
『문화연구이론』 정재철 편저, 한나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존 스토리 지음, 박모 옮김, 현실문화연구
『프 로이트의 문학예술이론』 허창운 외 지음, 민음사
『알기 쉬운 자끄 라깡』 마단 사럽 지음, 김해수 옮김, 백의
『라깡의 욕망이론』자크 라깡 지음, 권택영 옮김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유종완 외 옮김, 민음사
『포 스트모더니즘론』 정정호, 강내희 편, 문화과학
『포스트모던 문화--현대이론서설』 스티븐 코너 지음, 김성곤, 정정호 옮김, 한신문화사
『데리다와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마단 사럽 외 지음, 임현규 편역, 인간사랑
『권력과 지식--푸코와의 대담』 콜린 고든 지음, 홍성민 옮김, 나남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나남
『담 론의 질서』 미셸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샛길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미셸 푸코 외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
『육 체의 문화사』 스티븐 컨 지음, 이성동 옮김, 의암출판


이런 모든 논의의 갈래들을 포괄하면서, 사진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서구에서 일어나는 가장 집약적인 논의는 다음과 같은 이론모음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빅터 버긴이 편집한 Thinking Photography (London: MacMillan, 1982)는 이런 경향의 책으로는 교과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기호학, 심리분석, 마르크스주의, 권력이론 등 서구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지적인 흐름들이 사진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고 있다. 사진이론에 대해 알아보자면 다음의 책들은 필수적인 것들이다.
Bolton, Richard. [ed.]. The Contest of Meaning: Critical Histories of Photography. Cambridge,
Mass.: MIT Press, 1989.
Squires, Carol. [ed.] The Critical Image--Essays on Contemporary Photography. Seattle: Bay Press, 1990.
Petro, Patrice. [ed.] Fugitive Images--From Photography to Video.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Evans, Jessica. [ed.] The Camerawork Essays--Context and Meanign in Photography. London: Rivers Oram Press, 1997.
Spence, Jo and Patricia Holland. [eds]. Family Snaps: The Meanings of Domestic Photography. London: Virago, 1991.
Wallis, Brian. [ed.]. Art After Modernism: Rethinking
Representation. New York: Godine,1984.
Doane, Mary Ann, Patricia Mellencamp and Linda Williams. Re-Vision: Essays, in Feminist
Film Criticism. Frederick, MD : University Publications of America, 1984.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69&showPublishNo=4&page=1&whichPage=1&writer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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