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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28 존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김석희 옮김
공부2007. 12. 28. 18:00

  김석희 선생은 젊다. 밤 늦게까지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체력體力과 주력酒力도 그렇고, 젊은 사람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는 모습도 그렇다.

  얼마 전 함께 중국여행을 다녀왔던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선생이 책 한 권을 돌렸다. 존 러스킨 John Ruskin 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Unto This Last>. 전에 만났을 때부터 연말에 좋은 책이 하나 나온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책을 챙겨나오신 것이다.

  돈 주고 산 책은 종종 책꽂이에 그냥 꽂아두어도, 선물로 받은 책은 제법 열심히 읽는 습성이어서 시간 나는대로 훑어 읽었다.

 

  1860년에 근대자본주의국가를 처음으로 형성해가던 영국에서 발표된 이 글은, 데이비드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소위 주류 경제학 이론을 비판하며 러스킨 식 경제학을 주창하고 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기술들에 대해서만 칭송하는 경제학(그 부가 만든 그늘은 무시하는)은 개인의 부는 확대시킬 수 있지만, 국가 전체의 부는 오히려 갉아먹고 있다고 비판하며, 정당한 경제학은 부의 바탕에 정직을 이 두어야 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지키고 전체의 이익을 견지하며 사람에 대한 사랑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러스킨의 주장은 가슴을 울리는 바가 없지 않지만, 현재의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대응해나가는 데는 유효하지 못한 것 같다. 19세기 중엽 자본주의화의 거친 물결 속에서 그 이면을 고찰하여 주장한 '도덕적' 자본주의랄까.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을 첨부한다.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12211635321&code=900308

 

[책@세상. 깊이읽기]‘사람’ 그 자체가 경제 목적
입력: 2007년 12월 21일 16:35:32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느린걸음


성 경 구절을 딴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예수가 천국을 비유할 때 나오는 구절(마태복음 20장)이다. 포도밭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일꾼과 나중에 합류해 조금만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품삯을 쳐주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불평했다. 그러자 주인이 “나는 너를 부정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화폐단위)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약속한 너의 품삯을 받아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게 거슬리느냐?”라고 대답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천국이라는 비유다. ‘합리적 이기주의자’를 가정하는 주류·비주류를 막론한 애덤 스미스 이래의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로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마르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며 산업화하는 영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지켜본 저자는 자본론보다 7년 앞서 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 달리 너무 ‘온건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아니 온건했다기보다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을 포함한 당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외면받았다. ‘브레이크 없이’ 전진을 거듭하는 중이었던 당시 영국인들은 ‘근대 화가론’를 쓴 바 있는 저명한 예술평론가인 저자의 입을 통해 예의 그 고상한 미술론 같은 얘길 듣고싶어 했다.

저 자 스스로 이 책을 ‘부(富)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궁구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사랑’과 ‘정직’, 곧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뻔한 말씀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함’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묻는다. 경제학은 결국 ‘모두 다 부자가 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는 상대적이다. 내 주머니 속 1만원의 힘은 내 이웃의 주머니 속에 1만원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저자는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내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상업적 경제학이 타인의 노동에 대한 법률적 청구권이나 지배력을 개인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경제학은 단순히 유용하거나 쾌락을 줄 수 있는 사물을 가장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생산하고 보존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건초를 베어 들이는 농부, 단단한 목재에 대못을 단단히 박는 목수, 잘 이긴 회반죽에 양질의 벽돌을 쌓아올리는 건축공… 이들이야말로 궁극적 의미에서 진정한 정치적 경제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부와 행복에 끊임없이 이바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부 그 자체보다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는 하인이나 상인이나 예술가의 노동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힘이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대중을 다양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권위”일 뿐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가르치는 학문”이다.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이익을 내는 것은 결코 강한 압력이나 높은 보수를 받을 때가 아니라, ‘최대한의 애정’이 발휘될 때라고 한다.

우 리는 근대 경제학과 함께 너무 많이 와버려 이런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 ‘애정’ 등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합리적 결정을 교란시키는 우발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근대 경제학은 옳은 것인가. 효율적이면 다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이따금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석희 옮김. 1만2000원

〈손 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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