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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사진2007. 7. 11. 11:00
사진을 본다는 것

빅 터 버긴(Victor Burgin)| "Looking at Photographs | 번역 : 이영준



글 로 쓰여진 것을 보지 않고 하루도 살 수 없듯이, 사진을 보지 않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러저러한 제도적인 맥락─언론, 가족스냅, 광고─을 통해 사진은 환경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형성하고/ 반영하고/ 변화시킨다. 사진의 일상적인 도구성은 아주 명백한데, 그것은 팔고, 알려주고, 기록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구성이 분명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사진적 재현이 보통의 세계, 바로 그 사진적 재현이1 만들어낸 세계 속에 묻혀버리는 점에 한해서만 분명하다. 최근의 이론은 사진이 “설명할 것 없음”이라는 영역속에서 그 작동방식을 감춰버린 영역 너머까지 사진을 따라간다.

예전에는 사진을 ‘예술’에 비추어서 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교육기관의 타성을 탓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사진의 일상적인 경험이라는 더 큰 부분에 그림자를 드리워 감춰버리는 빛의 원천이었다. 가장 많이 서술되는 이야기는 카메라의 발명이 불러 일으킨 ‘미술사’의 독특한 뉘앙스인데, 그것은 일련의 ‘거장들’, ‘명품들’, ‘운동들’이라는 친숙한 테두리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사진의 사회적 사실은 대체로 건드리지 않는 부분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회화와는 정적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고, 영화와는 카메라를 공유하고 있는 사진은 이 두가지 매체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사진을 이 두가지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마주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회화와 영화는 시간과 돈을 쓰게끔 하는 자발적인 행위의 결과로만 보이지만, 사진은 화랑에서 전시되거나 책으로 팔린다고 해도 대부분은 일부러 선택하여 보는 것이 아니며, 사진을 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진은 분명히 공짜로 볼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사진은 무료로 제공된다. 회화와 영화는 비판적 시선에 대한 대상으로 제시되지만 사진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진을 소통시키는 사람들간에도 별로 언급되거나 이론이 덧붙여지는 일 없이, 무료로 친숙하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진은 언어의 속성을 공유한다. ‘사진의 언어’에 대해 느슨하게나마 얘기한 것이 오랫 동안 흔한 일이었지만, 자연언어 이외의 소통의 수단에 대해서 언어학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체계적인 조사라도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와서의 일이다. 그런 초기의 ‘기호학적’ 연구와 그 결과는 사진 이론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호학 혹은 기호론은 기호에 대한 연구인데, 그 목표는 의미가 생겨나는 체계적인 규칙을 밝히는 것이었다. ‘구조주의적’ 기호론의 초기에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의 요소들>은 프랑스에서 1964년에 처음 나왔다2) ‘자연’언어(말하기와 글쓰기 같은 현상)와 시각적 ‘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을 찾는데 관심이 모아졌다. 이 시기의 연구는 사진이 이 세계 속의 사물을 지시하는데 쓰이는 유사성의 코드, 지시된 의미가 2차적인 의미의 체계가 되는 함의의 코드, 사진 속의 요소들의 병렬과, 연속한 다른 사진들 사이에 나타나는 요소들의 병렬에 덧붙는 ‘수사적’ 코드를 다루었다.3 의미론의 연구결과는 (영어로 된 모든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영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진들이 의존하고 있는 사진의 ‘언어’, (기술적 장치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단일한 의미체계는 없으며, 사진이 끌어 올 수 있는 코드들의 이질적인 복합체가 있을 뿐임을 밝혔다. 각각의 사진은 이런 코드의 다양성에 토대를 두고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 코드의 숫자와 유형은 이미지마다 틀리다. 이중 어떤 것은 (적어도 일차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사진 특유의 것도 있으며,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신체의 몸짓, 표정 등에 관한 코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율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진의 언어’는 언어 자체의 결정요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는 설명이나 제목이 붙어있지 않은 채 사용되는 사진은 거의 볼 수 없으며, 긴 글이 딸려 있거나, 그 위에 글의 카피가 덧붙여진 사진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무런 글이 덧붙여지지 않은 사진 조차도 그것이 보는 이에 의해 ‘읽혀질’ 때는 언어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을 가진 사진은 사회적으로 어둠에 덧붙여지는 의미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우리가 기분이 안 좋은 사람을 은유적으로 ‘우울하다’고 하듯이, 사진을 해석하는 요인들은 언어적이다).

사진을 알아본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사진은 ‘사진적 담론’이라는 차원에서 쓰여져 있는 텍스트이지만 이 담론은 다른 담론들 처럼 그 너머에 있는 다른 담론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진적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 처럼 복잡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가진 영역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인 지점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 이전의 다른 텍스트들이 죽 겹쳐져 있는 것이다. 사진이 전제로 하고 있는 이런 이전의 텍스트들은 자율적이다. 그들은 실제의 텍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만 그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텍스트에 대해서는 몸을 숨기고 있으며, ‘징후적으로’만 읽혀질 뿐이다 (사실, 프로이드의 글에 나타난 꿈에서처럼, 사진 이미지는 간명하다. 사람들이 그 효과를 다듬어서 광고에 사용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기호학은 사진을 대상-텍스트로 취급하여, ‘순수하게 시각적인’ 이미지는 낙원에서나 있을 수 있는 허구일 뿐임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이에 덧붙여서, ‘이미지’의 차원에서 사진에 덧붙여질 수 있는 특수성은 이미지와 그 의미를 의도하는 사회적 행위의 특수성 속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 보도사진은 역사적 연속의 가공되지 않은 연속성을 ‘뉴스’라는 생산물로 전환하며, 가족사진은 그 특질상 가족이라는 기구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한다. 사진을 다루는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주어진 재료는(역사적 연속, 가족 생활의 실존적 경험 등) 특정한 기술적 방법을 쓰고 특정한 사회적 기구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생산물의 유형으로 전환된다. 초기의 기호학이 사진에서 찾아낸 의미있는 ‘구조’는 스스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의 독특한 유형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의 문제는 저자/독자라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구성체와 연관하여 생각되야 하는 것인데, 그 구성체는 실제로는 동시에 공존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별개의 담론들을 통해 다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심리분석은 기호학이 역사적 결정과, 의미의 생산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를 파악하는데 가장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적 단계에서 기호학은 텍스트를 의미의 체계가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서 경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는 결정적인 의미가 생산되는 객관적인 영역으로 보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구조주의적 기호학은 코드화된 메시지와, 코드 ‘바깥에’ 머물면서 그런 메시지들에 코드를 덧붙이고 그것을 해독할 줄 아는 저자/독자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 저자/독자는 도구를 간편하게 집어들거나 내려 놓듯이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보면 심각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말하는 만큼, 언어도 우리를 ‘말한다’. 모든 사회적 제도─법적 제도, 윤리, 예술, 종교, 가족 등─에 걸쳐있는 모든 의미는 차이의 그물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그물망이란 통상의 의미론적 특징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데 따라서 생겨나는 작용인데, 언어학은 이런 의미론적 특징이 언어의 근본적 특성임을 보여주었다. 사회적 행위들은 유아기부터 언어처럼 구조화되는데, ‘자라난다’는 것은 언어 자체를 포함하는, 그리고 언어에 기초한 의미있는 사회적 행위의 복합체 속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상징질서(symbolic order)는 인간이라는 작은 동물이 사회적 인간이라는 존재, 즉 ‘다른 자들’관계의 체계속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 결정되어가는 영역이다. 상징질서의 구조는 개인 주체라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구성물에 방향과 형태를 부여하는데, 상징질서라는 넓은 의미에서 언어가 우리를 말한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징질서 속에 새겨져 있는 주체는 변화하는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문화적 체계 (일, 가족, 등등)안에서 기본적인 성적 충동이 나름대로 형성된 산물이다. 즉, 이런 각각의 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복수의 주체성들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주체는 고전적인 기호학에서 생각하듯이 타고난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텍스트의 작용의 결과이며, 끊임없는 형성의 과정이다. 이런 형태의 주체는, 말하는 사람과 코드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을 거부하는 순간, 자신의 역사와 무의식을 초월하는 자율적 자아로서의 예술가라는 친숙한 모습을 내쫓아 버린다.

하지만 ‘초월적인’ 주체를 거부한다고 해서 주체나 그것을 형성하는 제도가 단순한 기계론적 결정론에 빠진다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제도는, 상징질서의 산물이면서, 또한 이 질서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기호론의 초기 저작들, 특히 바르트의 글들은 우리 사회의 사진으로 찍힌 모습의 의미를 지배하는 주도적인 신화의 언어적인 구조를 밝히려고 하였다. 더욱 최근의 이론은 사진속에 ‘언급된’ 것을 이데올로기가 전유(appropriate)하는 구조에 대해서 뿐 아니라, 언급을 수행하는 와중에 끼어 들어가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검토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이런 연구는 기술적인 장치 자체 속에서 구성되는 대상/주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4 사진의 의미체계는 고전적인 회화에서 같이, 장면과 보는이의 시선, 즉 대상과 그것을 보는 주체를 동시에 묘사한다. 사진의 이차원적이고 유사적인 기호는 기본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카메라 옵스큐라의 구조를 가진 장치속에서 형성된다. (1826년에 니엡스가 최초의 사진을 찍은 카메라 옵스큐라는 렌즈에 의해 생긴 이미지를 거울을 통해 유리 스크린 위에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바로 현대의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의 방식이다.) 어떤 대상을 묘사하건 간에, 그 묘사의 방식은 독특한 ‘시점(point-of-view)’을 내포하는 기하학적 투사의 법칙을 따른다. 보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실은 카메라가 차지하고 있는 시점이다. 재현의 체계는 시점에다 프레임(이젤 회화와 벽화를 통해, 상인방 건축의 관습 속에 묻혀 있는 원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산)을 더한다. 프레임이라는 매개기구를 통해 이 세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일관성으로, 일련의 그림들, ‘결정적인 순간들’로 조직화된다.

재현의 구조─시점과 프레임─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 ‘시점’의 ‘마음의 프레임’). 어떤 텍스트의 체계보다도, 사진은 ‘거부할 수 없는 제의’로 나타난다. 사진장치의 특성은 수동적인 수용성을 능동적인 (비판적인) 읽기로 대체함으로써 사진 찍힌 대상이 사진 자체의 텍스트라는 성질을 감추도록 주체를 배치한다. “무엇일까요?”식의 퍼즐 사진(친숙한 대상을 이상한 각도에서 찍은 것)을 보면 우리는 몇 가지 가능한 대안들 중에서 골라야 한다는 것, 이미지 자체는 가지고 있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일단 사진 속의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사진은 그 순간 우리에게는 어떤 것으로 전환되어, 더 이상 밝고 어두운 톤과 불확실한 선과 애매한 모양을 지닌 혼란스러운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정체성, 즉 존재를 투여할 수 있는 어떤 ‘물건’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진에서 이러한 해독(decoding)과 투여는 즉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가 사진 속의 장면에 부여하는 전체성, 일관성, 정체성 등의 속성은 투사(projection)된 것이며, 빈곤한 현실을 거부하고 상상적인 완전함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상상적인 대상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상상적’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보여지는 것,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실재계에 유사적이고 상상적인 것을 부여(investiture)하는 것은 자아의 구성에 있어서 초기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그것은 자크 라캉이 말했던, 인간의 형성에 있어서의 ‘거울 단계’라는 계기이다.5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자신의 몸을 조각나 있고 중심이 없는 어떤 것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이상적인 자아라는 형태를 통해 자기 신체의 잠재적인 통일성을 다른 신체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다가 투사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못하며, 아이는 그저 남일 뿐이다. (자신과 남의 분리는 나중에 언어의 세계, 즉 상징질서가 열릴 때 성의 구분을 알게 될 때 일어난다) 자기 정체성의 개념에 꼭 필요한 통일된 신체라는 생각이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현실을 거부함으로써만 생겨난 것이다 (불일치성, 분리의 거부).

어린이의 발달에 있어서 거울단계와 연관하여 두 가지 사실이 최근의 기호학 이론의 관심을 특히 끌었다. 우선, 심리학이 관찰한 바와 같은, 정체성의 형성과 이미지의 형성간의 상호관계는 (이 나이에 어린이의 시각은 신체적 행동의 능력을 앞선다.) 라캉을 주체성의 형성에 있어서 ‘상상적’ 기능에 대한 논의로 이끌었다. 둘째로, 어린이가 ‘상상적 질서’ 속에서 안정된 일관성에 입각하여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은 오해(misrecognition)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에 대하여 눈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렇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맥락에서, ‘시선’ 자체는 최근에 이론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자엠스 자셰가 1941년에 찍은 <자기 정원사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웨이블 장군>을 예로 들어보자. 이 35년 된 사진 속에 새겨져 있고 사진설명 (장군이 자기의 정원사를 지켜본다)속에 고정되어 있는 부계적(父系的) 제국주의의 즉각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오늘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 대상-텍스트를 1차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이루고 있는 대립하는 함의들이 드러날 것이다.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서양/동양이라는 대립 속에서 후자는 근본적인 ‘타자성’의 흔적을 감싼다. 혹은, 두 사람은 자본/노동의 대립관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명백함이 들어서는데, 이 장면의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그런 분석을 지나친 반응으로 치부해버려 그 효과를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잉여의 생산은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힘은 바로 그 순진함에 있다. 즉, 우리가 사진에서 어떤 것이던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확신은 보는 행위 자체에 있어서 우리가 끌려 들어가는 공모관계(complicity)를 은폐한다. 최근의 영화이론의 성과를 따라서,6 그리고 그 용어들을 받아들여, 우리는 사진 속의 네가지 기본적인 시선의 유형을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사진 찍을 만한’ 사건을 사진 찍는 카메라의 시선, 사진을 보는 이의 시선, 사진 속의 사람들(배우들)이 교환하는 이미지 텍스트 내부의 시선 (그리고 대상을 향한 배우들의 시선), 카메라를 향한 배우의 시선이 그것이다.


리 프리드렌더, 힐크레스크, 뉴욕 1970


자 셰의 사진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장군은 정원사를 바라보며, 정원사는 마치 이에 복종하듯이 자신의 응시를 땅으로 향한 채 장군의 시선을 받아들인다. 이미지를 더욱 더 읽어보면, 장군의 시선은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듯이, 즉 사진을 보는 주체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재현은 카메라의 시선을 주체의 시점과 동일시한다). 직업적인 모델이 아닌 사람들이면 누구나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이 정면의 응시는 우리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볼 때 흔히 보게 되는 응시이며, 우리는 그에 대해 나르시시즘적 동일시가 담긴 응시로 응수하게 된다 (사진 이미지에 있어서 그런 동일시에 대한 주요한 반대는 관음증이다). 장군의 시선은 우리의 시선과 일직선으로 맞서고 있으며, 정원사의 시선은 이 선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림자 속에 숨겨진 정원사의 얼굴은 (노동자는 여기서 문자그대로 아무 개성이 없다) 이미지를 보는 주체로부터 장군(상상적 동일시 속에서의 우리 자신의 힘과 권위)을 차단해버린다. 이런 움직임의 느낌은─절단하는 도구인─잔디 깎는 도구에 의해 더욱 확대되는데, 이 도구는 낫에 대한 연상, 그리고 그 위치로 말미암아 (사진은 우연의 일치 위에 지어진 텍스트이다) 남근(상호관계: 흑인의 성에 대한 백인의 공포/ 거세공포) 에 대한 연상을 응축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과도한 읽기에서 물러서서 이미지의 있는 그대로의 내용으로 주의를 돌려도 (실제로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같은 형상을 만나게 된다. 노동자는 장군과 그의 정원 ‘사이에 끼어 들며,’ 흑인은 문자 그대로 훼방을 놓는다. 여기서는 대략적으로만 시사될 뿐인 그런 중층적 결정은, 경험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대상-텍스트의 함의들과 더불어, 정원사를 이단적인 것으로, 하나의 위협으로, 자기 자신의 땅에 대한 침입자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고려는 이데올로기의 중층결정에 있어서의 경험적인 것을 넘어선다.

재현(이데올로기적 의미의 생산에 있어서 주체를 공모관계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의 효과는 재현되는 단계(대상-텍스트로서의 사진이라는 단계)가 재현하는 단계(보는 주체의 단계)와 ‘매끈하게 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결합은 자셰의 사진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안에 쓰여진 이데올로기는 토대7가 되는 중심성이라는 주체의 위치로부터 읽혀진다. 리 프리들랜더가 찍은 <힐크레스트, 뉴욕> (1970)에서는 바로 이런 위치 자체가 공격받고 있다. 공격은 두가지 주요한 지점에서 비롯되고 있다. 첫째, 주체를 불러들여 스스로를 완성하는 원근법은 애매한 인물/배경 관계에 의해 부분적으로 흐트러져 있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의식적인 노력을 동원해야만 일관되고 단일한 위치/(모습)로 구성될 수 있다. 둘째, 이미지의 가운데에 있는 거울이라는 장치는 근본적인 애매함을 불러 일으킨다. 잘라진 머리와 어깨가 프레임의 밑바닥-중간에서 올라온다. 재현의 체계는 우리의 시점을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시키도록, 즉 거울에 비친 정면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훈련시켜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사진가의 모습이 비친 것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비친 모습─1/4로 쪼개진 인물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상적) 자기’/‘타자’의 상태 속에 있다─을 보고 있는지 확증해줄 아무 증거가 없다. 프리들랜더의 사진에서는 사진의 기술적인 장치와 현실 속의8 현상적인 흐름이 카메라의 주체적인 효과─통일되고 확실한 주체의 통일된 응시에 기초한 일관성─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거의, 그러나 아직 미치지 못하는─이미지는 (따라서 주체는) “잘 구성되어” 있다 (약간 다르기는 해도 자셰의 사진과 비슷하게). 우리는 ‘좋은’ 구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미술학교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알고 있다─왜 그것이 좋은 구성인지는 모른다. 이미지의 구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기껏해야 (형태심리학에서와 같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 것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사진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처음에 시작할 때 말한, 우리 나름의 사진의 사용이라는 주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진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오래 바라보면 우리는 낙심하게 된다. 처음 봤을 때 즐거움을 주던 사진이 점차로 하나의 장막이 되어,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보고자 열망하게 된다. 사람들이 사진을 너무 오래 동안 들여다 보지 않도록 배치하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장면(보여진 것)에 대한 우리의 통제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사진을 사용한다 (스톱워치를 가지고 방문객을 따라다녀 본 국립박물관의 관리는 한 사람이 하나의 그림 앞에서 평균 10초 동안 서 있는 다는 것을 알아냈다─그것은 할리우드 영화에서의 한 장면의 평균 길이와 비슷한 시간이다). 하나의 이미지 앞에서 오래 동안 있으면 시선에 대한 상상적 통제를 잃을 위험이 커지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원래 그 시선이 소속된, 이미지에는 나타나지 않는 타자─즉 카메라─에게 놓치게 된다. 그러면 이미지는 더 이상 토대가 되는 중심성을 확증해 주는 우리의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며, 우리의 응시를 피하면서, 이미지와 타자와의 연대관계를 확증한다. 우리가 이미지에 사로 잡혀 있는 그 틈새에 소외가 침투해 들어올 때, 우리는 응시를9 피하거나 페이지를 넘김으로써 우리의 시선에 다시금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 (‘지배하고자 하는 충동’은 바라보는 것에 대해 성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현상인 절시증(scopophilia)의 한 요인이다.)
 
사진을 너무 오래 동안 보는데서 오는 어색함은 체계적인 속임수인 원근법적 재현의 체계에 대한 의식에서 생겨난다. 렌즈는 실제의 공간과의 상상적 관계 속에서 한 장면의 기하학적 원점으로서의 주체를 설정하는 투사의 법칙에 따라 모든 정보를 배치하지만, 사실이 침투해 들어 와서 최초의 반응을 해체한다. 눈(나)은 이미지에 나타난 공간 속에서 움직일 수 없으며, 눈은 단지 프레임이 있는 곳까지만, 공간 위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눈이 프레임의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을 막아 주는 ‘구성상의’ 장치를 포함한 여러 가지의 전략은 주체가 어쩔 수 없이 프레임의 규칙을 알아차리는 것을 지연시킨다. 따라서 ‘좋은 구성’은 시점에 대한 상상적 통제, 즉 우리의 자기-내세움(assertion)을 연장해 주는 도구일 뿐이다. 즉 그것은 프레임의 자율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이며, 프레임이 상징하는 타자의 권위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구성’은 (그리고 구성에 대한 지겨운 담론들--형식주의적 비평들) 상상적 힘, 사진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진정한 힘을 연장하는 수단이며, 구성이 시각 예술 전반에서 가치의 기준으로, 여러 가지 합리화를 거치면서 오래 동안 살아남은 것도 이런 이유10에서일 것이다. 최근의 어떤 이론은11 영화를 ‘소망을 충족해 주는 기계’에 대한 작업의 정점으로 치기도 하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사진은 이 작업에 있어서 한 역사적인 순간일 뿐이다. 극장의 어두움은 관객을 인위적으로 ‘퇴보’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치부되었으며, 영화는 최면술과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욕망이 그 자신을 위해 만들어 낸 장치가 국제상황주의자(Situationists)들이 구경거리(spectacle)라는 이름을 붙인 서구사회의 모든 측면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구경거리란 역사주의적 진보 속에서의 상호 고립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상호 교환 속에서 통합되어 있는 시각적 장을 이루는 국면들을 말한다. 욕망은 상상적인 충족을 위한 물질적인 어두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백일몽도 최면술과 같은 면을 지니고 있다.

상상적인 것, 즉 이데올로기에 필수적으로 따라 다니는 오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사진이 차지하는 실제 역할 때문에, 상상계에 묶여 있는 사진을 회복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진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19세기의 미학, 그리고 사진에 대한 대부분의 저술들에 맞서서, 기호학은 사진이 ‘순수한 형식’으로 축소될 수도 없으며, ‘세계로 향한 거울’도 아니고, 작가의 존재로 향하는 통로도 아님을 밝혀냈다.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진이 작업의 장소이며, 독자가 알고 있는 코드를 동원하고, 코드에 의하여 동원 당하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구조화되고 구조화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의미체계들이 표면상의 ‘내용들’을 서로 ‘소통’하는 바로 그 와중에서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 속의 여러 가지 의미의 체계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진 이론이 주체 생산의 복합적인 결정과정 전체가 사진을 통하여 조율되고 규제되는 와중에서의 주체의 생산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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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자주: 여기서의 재현(representation)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반영한다는 식의 재현이 아니다. 사실 재현이라는 말도 부적절한데, 우리말에는 아직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버긴이 말하는 재현이란 이미 있는 대상을 반영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구성되는 이미지이다. 사진이 어떤 것의 재현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진이 어떤 물건의 모습을 그대로 찍어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사진기라는 특수한 기계를 통해, 인간의 시선이라는 역사적인 구성물이 사진이라는 특수한 관습을 통해야만 알아 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새로운 재현의 개념에는 최근 시각문화이론에서 다루는 모든 쟁점들이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코드, 주체의 형성, 의미의 제도와 그 담론 등 비교적 새로운 주제들을 압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재현은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가 어떤 문화, 역사, 사회, 정치적 맥락을 통해 구성되었는가하는 문제이다. 나아가, 재현의 개념에 있어서는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지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로지 재현을 통해서만 현실을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현실은 재현을 통해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구성의 산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시각적 재현 뿐 아니라 언어적 재현, 청각적 재현, 촉각적 재현, 관습적 재현 등 아주 넓고 다양한 재현의 영역은 현실이 재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만질 때의 촉감은 단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손의 감각이라는 문화, 역사적 구성물에 의해 결정되는 재현의 일부분이다. 시각적인 것에 있어서도, 우리의 시선은 역사,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재현은 이러한 신체라는 장치를 통해서 가동되는 구성물이다.
2: 영어로는 Jonathan Caper가 1967년에 출간했다.
3:이런 연구들이 사진에 적용된 것에 대해 알려면 Victor Burgin, “Photographic Practice and Art Theory” Studio International, July/August 1975를 볼 것.
4:Jean-Louis Baudry “Ideological Effects of the Basic Cinematographic Apparatus,” Film Quaterly [Winter 1974], p.75.
5 :“The Mirror-Phas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New Left Review, 51, [September/October 1968].
6;최근의 영화이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언급이 그것에 얼마나 덕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을 다루는 영어로 된 잡지로는 Screen이 있다(특히 Laura Mulvey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Screen, v.16, no.3, [Autumn, 1975]을 볼 것).
7 :여기서 토대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재현을 가능케 해주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역자주)
8 :역자주: 원어는 날 것을 의미하는 raw이지만 여기서는 ‘가공되지 않은 현실 그대로의’라는 의미로 본역하였다.
9 :이제까지 시선은 look의 번역어였는데, 응시는 gaze의 번역어이다. 이는 자크 라캉의 regard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개념적인 분화이다.
10 :Guy Debord를 포함한 일군의 학자들. 자본주의 사회를 구경거리의 사회라고 비판했다.
11: Jean Louis Baudry, “Apparatus,“ Camera Obscura [Fall 1976].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70&page=1&showPublish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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