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존중하는 문화예술교육정책

 

김영경

 



 

종이인간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한 채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 내 몸 위로 크게 이어 붙인 종이가 덮인다. 나는 바깥을 볼 수는 없지만, 종이는 희어서 어둡지는 않다. 종이 저편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 손들은 다리 쪽부터 내 몸을 만진다. 엉덩이, 허리, 등을 거쳐 팔과 목, 얼굴로 이어지며, 쥐고 누르고 문지른다. 그 감각은 때로는 얕고 때로는 깊숙하다. 내 몸과 종이 사이의 공간이 점차 좁아지다가, 거의 모든 종이가 내 몸에 가까이 밀착되었을 때 손길은 멈췄고, 이내 종이는 나와 분리되었다. 나는 이제 종이 바깥으로 나왔고, 내가 하고 있던 모습을 한 종이가 속이 빈 채로 그 자리에 있다.



네트워크포럼 별빛살롱 <예술가아빠강사로서 살기!> 중 종이인간 워크숍, 724,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주변에는 사람의 몸을 본 뜬,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속 빈 형체들이 존재감을 무겁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업에 동참한 사람들은 얼마 동안 종이인간 하나하나를 말없이 대면하고, 이야기를 건네고 난 후, 그 형체를 소멸시키는 작은 의식을 치른다. 우리의 몸과 손을 통해서 탄생한 형체는 잠깐의 만남 후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만, '존재'에 관한 감각과 상념을 남겼다.

 

예술교육자라는 존재

7월 말에 열린, 인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만남과 교류 자리인 네트워크포럼 별빛살롱<예술가아빠강사로서 살기!>를 주제로 체험예술공간 '꽃밭'의 대표인 이철성과 함께 창작자이자 교육자이자 가족의 일원인 ''들이 그러한 다중적 역할 속에서 각자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고, ‘종이인간은 이때 진행한 워크숍이었다. 이철성은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교육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워크숍과 공연 등 창작활동에서도 채워가고 있는, 드문 사람이다.

예술교육자라는 존재에 관한 질문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5월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 때에는 현장 예술강사가 주관하는 이야기마당이 각지에서 개최되었는데, 인천에서는 연극 분야 예술강사 신운섭이 <예술+교육=예술교육?……그게 뭔데?>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마당을 열었다. 모인 사람들은 돌아가며 예술강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 교육현장에서 겪는 어려움 등에 관해 얘기했고, 예술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나누었다. 몇몇은 그 고민 속에서 학교예술강사를 그만두고 다른 방식의 활동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예술강사 이야기마당 <예술+교육=예술교육?……그게 뭔데?>, 523,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우리는 지금 문화예술교육을 가르치는 사람을 통상적으로 '예술강사'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파견되어 정규교과나 창의적 체험활동, 동아리 활동 등의 시간에 국악, 연극, 무용, 영화, 만화애니메이션, 공예, 디자인, 사진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복지기관, 군부대, 교정시설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하기도 한다.

 

예술강사라는 일자리

지난 10년은 문화예술교육을 제도화하는 과정이었다. 2003년 당시 문화관광부와 교육인적자원부가 공동사업기획단을 구성한 이후, 문화예술교육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교육을 확대하기 위하여 예산을 확보하고, 다른 부처와의 협력을 추진하고, 학교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회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을 개발하고 운영하여 교육 수혜자를 증대하고 수혜계층을 확산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런데 예산 확보와 사업화 과정에서 일자리 창출이 지원사업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고, 현재 문화예술교육 사업은 예술교육을 담당하는 일자리인 예술강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문화예술교육 예산 중 80% 가까이가 학교예술강사 지원사업에 투여되고 있고, 역시 예술강사를 선발하여 관련 기관에 파견하는 사회분야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까지 합하면 그 비중은 더 커진다.

문화예술교육정책에서 교수자(敎授者)인 예술강사의 중요성을 따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강사라는 일자리는 무척이나 불안하다. 예술강사는 다음 해에는 어떤 학교(기관)에서 어떤 학생들을 만날지 예측할 수 없고, 몇 시간이나 교육활동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당연히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교육을 계획할 수 없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하루의 일을 찾는 일용직처럼, 예술강사는 매해 단기 계약을 하기 위해 선발 프로세스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예술강사지원사업은 문화예술교육 확대와 일자리 창출에 있어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정작 그들이 예술강사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존재 기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예술가들은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사람과 그들의 삶을 점점 존중하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점차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화예술교육사' 제도를 마련하여 추진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불안한' 예술교육자에게 '중요한' 문화예술교육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존재를 존중하는 정책 전환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 우리는 정책의 가시적인 성과지표를 달성하는 데 치중하느라 예술교육자의 존재를 살피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안한 사회적 위치를 저마다 감내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문화예술교육이 지닌 가치와 가능성은 점차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예술 체험의 깊이와 장기적인 교육 효과가 생성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고서, 이를 예술교육자 개개인의 열정을 독려하거나 역량강화를 위한 재교육만으로 얻으려 한다면, 이는 무책임한 정책이다.

예술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풀어갈 수도 없다. 관행에 떠밀려서도 안 되고, 단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서도 안 된다(어찌 보면 우리는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 상황은 제법 합리적으로 풀어왔다).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한지, 필요한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는 무엇을 하고 지역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예술교육자는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물론 예술교육에 참여하는 학습자와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매개자, 현장을 함께 보고 조언해줄 전문가의 존재에 대해서도 사유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3년 업무계획을 보면, “생애 주기별 맞춤형 문화복지 확대로 문화가 있는 삶을 실현하겠다는 주요과제에 내년에 1,300개소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예술강사를 파견하고, 2017년까지 전국 모든 학교에 예술강사를 파견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문화예술교육지원정책의 확대는 탄력을 받고 있고, 그에 따라 예술교육을 자신의 일로 삼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날 것이다. 예술 체험을 통해 감성을 풍부히 누리고 소통과 공감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여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지원정책이 유지 확대된다는 사실은 크게 반길 일이지만, 그 계획이 기존 사업의 양적 확대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은 깊이 우려스럽다.

지난 5월에 있었던, 문화예술교육의 지난 10년간의 성과와 앞으로의 10년을 전망하는 포럼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양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질적인 성장과 발전이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아직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하고 있다. 중앙은 중앙대로, 지역은 또 지역대로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모색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2013 문화예술교육포럼 <문화예술교육의 지난 10, 앞으로의 10>, 524, 한국언론진흥재단



 

金榮庚 1971년 인천 생. 제법 자유롭게 살다가, 국록(國祿)을 받고 문화예술교육 일을 한 지 조금 되었다. 덕분에 감각을 누리는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에 근무하고 있다. shal@ifac.or.kr



'요즈음 > 이 생각 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만한 일 - 1인출판 지원시스템  (0) 2010.06.16
빚쟁이 인천  (0) 2010.04.14
부패와 정의  (0) 2010.03.22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