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너를 보내는 들판은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토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외로운 견디며 살까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가슴 지키며 살까

아 저하늘에 구름이나 될까
너 있는 그 먼 땅을 찾아나설까
사람아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아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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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노래.

부른 사람도 많고, 그만큼 버전도 많고

유래에 관해서도 분분한 것 같다.


연주 연습 하기 전에, 알아봐야지..



원래 아일랜드의 런던데리 지역의 민요(Londonderry Air)인
이 곡은 가사가 3가지 정도 전해지고 있다. 원래 민요 가사인
"Londonderry Air" 란 제목으로 된 가사(시골 목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랑하는 소녀와 헤어지기 안타까워 부르는 이별 노래,

Katherine Tynan Hinkson 작사 (1894) )가 있고, 미국에선
짐 리브스, 해리 베라폰테, 엘비스 프레슬리, 에릭 크랩튼 등
많은 대중 가수들이 Danny Boy란 제목으로 다른 가사로
부르고 있는데, 1913년에 영국의 프레데릭 에드워드 웨드리가
"Danny Boy"라는 제목으로 쓴 가사로,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을
그리는 아일랜드 아버지의 비애를 노래하는 가사이다.

한국에선 현제명의 번역시에 의한  '아 목동들아' 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Londonderry Air
- John McCormack (존 맥코맥 tenor, 1884~1945),
Edwin Schneider (piano)
1935.6.28. London Abby Road Studio

Oh Mary dear,
a cruel fate has parted us
I'll hide my grief,
e'en though my heart should break;
Farewell my love,
may God be always with you
I love you so,
I'd die for your dear sake.
But you'll come back to me,
my sad heart whispers
You'll come with summer's showers
or winter's snow
And I'll be there to wait,
if God should spare me
And with the years, my love shall deeper,
greater grow.

Oh Mary dear,
the years are lone and dreary
And yet you come not back,
my soul to cheer;
My eyes grow dim,
my path of life's near ended
When death shall come,
in spirit, love, be near.
Remember then my soul's deep adoration
Shed one sad tear for all the world to see:
Breathe one short prayer,
and I shall know you love me
I'll still be waiting, Mary,
when you come to me.

오 사랑스러운 매리,
잔인한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았구나
나는 나의 슬픔을 숨길 것이다,
내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사랑이여 안녕,
하느님이 항상 그대와 함께 하기를.
내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같군요.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돌아온다면,
내 슬픈 마음은 살랑거릴 것이오.
당신은 여름 장마비와 함께 올 것이오
아니면 겨울 눈과 함께.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만약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 남겨 주신다면.
해가 갈수록 내 사랑은 더욱 깊어질 것이오,
더욱 크게 자랄 것이오.

오 사랑스러운 매리,
수년이 쓸쓸하고 따분하게 흘렀소.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내 영혼을 위로해주지 않는구료;
내 눈은 침침해져가고,
내 인생길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오.
죽음이 온다면,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가까이 머물러 주오.
그런 다음 내 영혼의 깊은 애모를 기억해주오.
온 세상이 볼 수 있게 슬픈 눈물을 한방울 흘려주오:
하나의 짧은 기도를 토로해주오,
그러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나는 여전히 기다리겠어요, 매리,
당신이 내게 돌아올 때를.


Londonderry Air

Would God I were the tender apple blossom
That floats and falls from off the twisted bough
To lie and faint within your silken bosom
Within your silken bosom as that does now.
Or would I were a little burnish'd apple
For you to pluck me, gliding by so cold
While sun and shade you robe of lawn will dapple
Your robe of lawn, and you hair's spun gold.

Yea, would to God I were among the roses
That lean to kiss you as you float between
While on the lowest branch a bud uncloses
A bud uncloses, to touch you, queen.
Nay, since you will not love, would I were growing
A happy daisy, in the garden path
That so your silver foot might press me going
Might press me going even unto death.

Katherine Tynan Hinkson 작사 (1894) : Irish Love Song




대니 보이(Danny Boy)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오 사랑하는 아들 대니야,
고적대의 소리가 널 부르는구나,
골짜기에서 산기슭 아래에도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are falling
It's you, it'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여름은 가고
장미들도 다 시드는데,
이제 너는 떠나야만 하고
우리는 여기 남아 널 기다린다

Someday may he come
when all the flowers are dying
And I am dead, as dead I will may be

꽃들이 시들어 가면
언젠가 네가 돌아오겠지.
그리고 난 싸늘히 죽어 있겠지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d I'll be there for me

네가 돌아와 내가 누워 있는 곳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할테지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But come you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
And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허나, 저 초원에 여름이 오면
네가 돌아와 줄까
계곡이 숨을 죽이고
눈으로 뒤덮일 때면 돌아 올까

Ye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

그래, 햇빛이 비추어도, 그늘이 드리워도
난 여기 있을 거야
대니 보이, 오 나의 아들 대니 보이
진정 너를 사랑한단다.


곡은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입니다.
단순히 아일랜드 민요로 알려져 있지만,
북아일랜드 민족에게는 자유와 독립을
염원하는 소망이 담긴 곡이기도 합니다.

독립 투쟁에서 잃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경험이 노랫말,
그리고 멜로디에 담겨 있죠.\
이 곡은 'Londonderry Air(런던데리 에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보통 가사가 있을 때에는 '대니 보이',
멜로디 자체만으로는 '런던데리 에어'로 불립니다.
아일랜드 출신 테너 존 매코맥(John McCormack)이 이 곡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했고, 이후 해리 벨라폰테의 버전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 목동아'라는 제목으로 불리며, 많은 가수들이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Londonderry air라고 불리는 아일랜드 민요(멜로디)에 Frederic E. Weatherly 라는 사람이 가사를 붙인 것. danny boy(데니 보이)의 정작 작사자인 Fred weatherly는 아일랜드에 가 본 적이 없는 영국사람 이라고 합니다.



1.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B%8B%88_%EB%B3%B4%EC%9D%B4

대니 보이(Danny Boy)는 1913년에 나온 잉글랜드의 포크송이다. 그러나 가락이 북아일랜드 전통 가락이기 때문에 아일랜드 포크송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아, 목동아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잉글랜드의 변호사이며 시인인 프레드릭 웨덜리(Frederic Weatherly, 1848~1929)가 작사하였고, 가락은 북아일랜드의 전통 가락인 런던데리 에어(Londonderry Air)이다.

오해

흔히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고전 포크송으로 오해를 받고 있지만, 가락만 아일랜드, 그것도 북아일랜드 런던데리 곡이고 가사는 100% 잉글랜드 가사이다. 그러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는 관계로 미국, 일본, 대한민국에서는 마치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고전 포크송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바에즈, 에릭 클랩튼 등등이 이 곡을 불렀고, 심지어 대한민국의 아이돌 가수인 아이유[1]소녀시대[2]까지도 이 곡을 불렀다.


그러나 이 곡은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고전 포크송은커녕, 아일랜드와는 잘 어울리지조차 않는 곡이다. 아일랜드와의 연관성은 딱 두 개, 가락이 북아일랜드 가락이라는 것과, 아일랜드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린다는 것뿐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이 곡을 지은 사람은 잉글랜드인이다. 잉글랜드는 800년간 아일랜드를 지배해 왔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대니 보이는 아리랑일본인이 가사를 붙인 곡인 셈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포크 가수들은 이 대니 보이를 잘 부르지 않는다. 1960년대 포크 리바이벌 시기에는 완전히 외면받았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어느 정도 경력을 갖춘 아일랜드 포크 가수들이 이따금씩 불렀다. 더 클랜시 브라더스, 더 더블리너스 등등 대표적인 아일랜드 포크 가수들의 앨범에는 대니 보이는커녕 원곡인 런던데리 에어조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라이언스 팬시(Ryan's Fancy), 더 울프 톤스(The Wolfe Tones), 더 발리콘(The Barleycorn)의 앨범에 한 번씩 등장하긴 하며, 더 더블리너스 멤버 출신인 짐 매캔패디 레일리도 물론 불렀다. 그러나 대부분은 최근에 와서야 부른 곡들이며, 해당 가수들의 주요 곡도 아니다. 설사 아일랜드 가수들이 불렀다 하더라도 장르가 포크가 아니라 록이나 팝 음악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곡의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의 인기도는 높지 않다.[3] 대체로 아일랜드 포크 음악은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일랜드 가수들 사이에서 이 곡이 인기가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둘째로 아일랜드인들의 국민성은 사실 매우 쾌활하고 낙천적이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고전 포크송인 아이리시 로버, 홀리 그라운드, 피네건스 웨이크, 라이징 어브 더 문, 브레넌 온 더 모어, 와일드 콜로니얼 보이 등등은 굉장히 빠른 박자와 쾌활한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곡이다. 그러나 대니 보이의 원곡인 런던데리 에어(Londonderry Air)는 이러한 아일랜드인들의 국민성과는 달리 매우 차분하고 슬픈 느낌을 주는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 런던데리 에어의 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여러 패러디가 존재하고, 그 가운데 하나는 북아일랜드 국가로 쓰이기도 한다.) 대니 보이는 아일랜드인들의 정서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대니 보이의 경우는 가락뿐만 아니라 가사까지도 굉장히 애상적, 감상적이며, 하강 이미지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잉글랜드 고전 포크송에 많이 드러나는 정서이지,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가운데 이러한 정서를 가진 곡은 캐릭퍼거스(Carrickfergus) 정도로 흔하지는 않다.


더 클랜시 브라더스의 전 멤버였고 현재 더 클랜시 레거시 소속인 포크 음악가 로비 오코늘이 작사, 작곡한 <유 아 낫 아이리시>(You're not Irish)라는 곡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When first I came to the USA with my guitar in hand
I was told that I could get a job singing songs from Ireland
So I headed up to Boston, I was sure it would be alright
But the very first night I got on the stage, I was in for a big surprise
They said:
You're not Irish, you can't be Irish, you don't know "Danny Boy"
Or "Toora Loora Loora" or even "Irish Eyes"
You've got a hell of a nerve to say you came from Ireland
So cut out all the nonsense and sing "McNamara's Band"
ⓒ Robbie O'Connell

가사에 나와 있듯이 화자는(로비 오코늘 본인으로 볼 수도 있음) 미국에 와서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첫 번째 공연에서 세 가지 곡을 모른다는 이유로 아일랜드인이 아니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 가운데 한 곡이 대니 보이이다. 그 정도로 미국인들은 대니 보이가 마치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곡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정작 아일랜드인들에게 대니 보이는 인기가 없다.

가사

가수들마다 조금씩 가사가 다르다. 작가가 1929년에 죽었기 때문에 퍼블릭 도메인이다.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falling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But come y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Ti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

And if you come, when all the flowers are dying
And I am dead, as dead I well may be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And I shall hear, tho' soft you tread above me
And all my grave will warmer, sweeter be
For you will bend and tell me that you love me
And I shall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I'll simply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And I shall rest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4]

버전

다음과 같은 가수들이 불렀는데, 이름 옆에 어느 나라 사람인지와 전문 포크 가수인지 여부가 표시되어 있다.


1.

출처 :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5&page=8&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desc&no=166&PHPSESSID=01132bbd9026ced2df57ddf6cb9474ba


Danny Boy는 같은 멜로디로 만들어진 100여곡의 노래들 가운데 하나이다. 


작곡가는 엔터테이너이자 작곡가이고 변호사인 아일랜드의 웨덜리(Frederic Edward Weatherly, 1848-1929)이다. 1910년, Danny Boy의 가사와 곡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1912년에 미국에 사는 그의 며느리가 Londonderry Air라는 표제가 붙어있는 악보를 보냈다. Londonderry Air라는 노래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웨덜리는 그 노래가 기가 막히게도 자기가 쓴 Danny Boy와 꼭 같은 노래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1913년에 개정된 악보를 출판했다. 물론 웨덜리는 단 한번도 아일랜드를 벗어나 본 일이 없었다.  

데니 보이의 다른 이름인 Londonderry Air는 아마도 정치적 의미를 고려한 것으로 보아진다. Londonderry Air라는 단어는 17세기초에 잉글랜드(England)에 의해서 점령당한 아픈 역사가 있는 북부 아일랜드와 브리튼(Britain) 지역의 단합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용어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일랜드 애국주의자들은 Derry라는 용어 쓰기를 좋아했다. 그 말은 아일랜드 북부 도시와 그 일대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Air, 즉 '하늘'이라는 말도 그 지역에서 즐겨 사용되는 용어였다.

Londonderry Air가 처음으로 출판된 것은 1855년으로 아일랜드 고(古)민요 수집가 조지 페트리(George Petrie, 1789-1866)가 그 일을 했다. 페트리는 런던데리 지역인 리마바디(Limavady)에 살면서 꽤 많은 북아일랜드의 옛민요를 수집해서 지니고 있었던 제인 로스 양(Miss Jane Ross, 1810 - 1879)에게서 곡명이 없는 이 노래의 악보를 전달받고 그 곡에 Londonderry Air라는 표제
를 붙여서 출판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노래 제목의 효시인 것이다. 제인 로스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단지 "아주 오래된" 노래라고만 이야기했다고 한다.
민요 수집가인 샘 헨리(Sam Henry)의 주장에 다르면, 제인 로스가 수집한 이 노래는 실제로 리마바디에서 활약하던 현악기 연주가 지미 맥커리(Blind Jimmy McCurry)에게서 취득한 것이라고 한다. 지미는 이 노래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다고 제인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노래가 점점 사람들 사이에 번져 나가서 널리 불려지게되자 제인 로스의 주장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보다 구체적인 리서치를 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노래는 다른 아일랜드의 민요들과는 구조적으로 상이한 부분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한 노래와 가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예를 들면, 가사에 등장하는 피리 부는 사람(the piper)의 이름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노래를 제인이 작곡한 작품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만일 그랬다면 제인은 엄청난 저작료를 포기한 셈인데--).

제롬 콜번(Jerome Colburn)의 주장에 따르면 19세기말에 시카고에서 아일랜드-아메리카 커뮤니티를 조직했던 프란시스 오닐(Francis O'Neill)의 컬렉션에서 이 노래와 꼭 같은 Londonderry Love Song이라는 노래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인 로스가 제공한 Londonderry Air, 웨덜리의 Danny Boy, 오닐이 지녔던 Londonderry Love Song 사이의 관계를 짚어보는 일이 남았다. 2박자 계통의 리듬, 첫 부분의 중간 종지부 형식, 둘째 부분의 높은 음정 등등 모두가 같거나 유사하니 이 일이 예사로운 게 아니다.

1934년, 앤 지드즈 질크리스트(Anne Geddes Gilchrist)는 'Londonderry Air를 새롭게 조명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어떤 사람이 연주회장에서 그 노래를 채보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잘못 채보된 부분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아일랜드의 민요를 가져와서 아주 비슷하게 재구성한 노래라고 주장했다.

1979년, "1766-1803년의 옛노래를 위한 새로운 자료들'이라는 논문이 더블린 트리니티 칼레지 출판부가 발표한 저널에 실렸다. 저자인 휴 실즈(Hugh Shields)는 이 논문에서 에드워드 번팅(Edward Bunting)이 1796년에 출판한 "젊은이의 꿈"이라는 표지의 아일랜드 옛음악 총람에 이 노래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노래는 질크리스트의 악보와 가장 가깝다고 밝혔다.

번팅(1773-1843)은 벨파스트 하프 페스티발에서 사보를 담당한 경력이 있는 하프 음악 수집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일랜드식 하프를 연주하는 유명한 연주자 데니스 햄슨(Denis Hempson, 1697-1807)으로부터 아일랜드 전승 하프음악의 악보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햄슨이 활동했던 지역이 제인이 살았던 리마바디 지역이라는 것이다.



가락 : 북아일랜드의 전통 가락인 런던데리 에어(Londonderry Air)

런던데리의 노래(Londonderry Air)는 북아일랜드의 국가로, 아일랜드 이민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노래로 알려져 있으며, 영연방 경기대회에서 북아일랜드의 국가로 사용된다. 단 북아일랜드 축구대표팀은 이 곡을 사용하지 않고 영국 국가를 사용한다.


음악 듣기

Harry Belafonte

http://www.youtube.com/watch?v=rgo8NDSI-HQ&feature=player_detailpage


악보




악보링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odboyhalo&logNo=100173810837&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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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키 [ bouzouki ]

부주키(헬라어: bouzouki)는 만돌린 형태의 라운드 백 몸체와 긴 네크를 가진 겹줄 3~4 코스의 현악기이다. 통은 만돌린처럼 서양배 모양으로 생겼지만 뒷부분이 만돌린과는 조금 다르며, 크기도 훨씬 크다. 손가락판이 밴조처럼 길다. 튜닝은 기타의 1~4번 줄을 한 음 낮게 한 것으로 5도 조현(5度調鉉)의 만돌린과는 다르다.

부주키는 그리스가 기나긴 터키의 지배에서 독립할 때, 이민으로 유입된 터키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만든 악기(터키나 시리아, 이라크 북부의 현악기인 bozoq가 부주키의 유래)로 백라마(baglama) 라는 작은 부주키 모양의 현악기와 함께 연주된다. 그리스 음악에 널리 사용되며 특히 가요 렌베티카에는 빼놓을 수 없다.

아일랜드로 들어가 아이리시 부주키(Irish bouzouki)로 변형되어 아일랜드 음악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1950년대 더 클랜시 브라더스가 주도한 아일랜드 포크 음악 리바이벌과, 1960년대 더 코리스가 주도한 스코틀랜드 포크 음악 리바이벌의 영향으로, 현재는 정통 부주키와 아이리시 부주키가 셀틱 포크 음악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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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샀다. 근 20년 만인가?
중고등학교때 교본 보고 박자 맞추는 느낌으로 어설프게 쳤었는데, 조금 배워보기로 했다.
배우는 건 배우는 대로 따라가겠지만,
난 '김민기'를 찾아가며 불러보려고 한다.

김민기.
이 다채로운 능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이 글은 최모의 블로그 http://kiiiiid.tistory.com/136 에서 보았고,
원출처는 바람구두의 문화망명지 http://windshoes.new21.org 로 되어있다.

*****

제 는 가수라기보다는 한국적인 뮤지컬의 창시자, 혹은 연극 연출가, 기획가로 더 익숙해진 김민기. 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아직 동아리란 말보다는 서클이란 말이 더 익숙했던 그 시절에 나는 가톨릭학생회란 서클에 가입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가본 MT에서 우리는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선생님과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노래들을 배웠다. 그때 배운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였다. 선생님이 한 잔씩 나눠주던 맥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우리들은 처음 들어보고 배워보는 그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에 젖어 밤하늘의 별들이 빗방울에 젖어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 계곡에서의 MT. 나는 지금도 그날 밤의 별과 모닥불, 그리고 저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그날밤 세상에 조금도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만이 김광규 시인의 싯구처럼 그 해 세밑을 달궜다. 그리고 이듬해 87년 우리들 중 많은 친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 학생, 청년들 중 하나가 되었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들은 더 이상 불리워지지 않았다. 우리들의 노래는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에서 <농민가>, <타는 목마름으로>으로 그리고 다시 좀더 격렬한 운동가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당시 사회과학 서적의 커리큘럼이 백산서당의 책으로 시작해서 몰래 구해 읽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이어지듯 우리들은 김민기의 노래로 시작해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솔직히 나보다 조금 윗 세대의 사람들에게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김민기의 노래는 온전히 김민기의 것이거나 아니면 이제 막 목울대가 굵어가던 청소년기의 우리들의 노래로 기억된다.  솔직히 그 점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순수의 시대에서 안정의 시대로

  1968년. 전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청년 문화는 1970년에 접어들면서 차갑게 식어 버렸다. 60년대를 정의했던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밥 딜런은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나왔고, 존 바에즈만이 고독하게 자리를 지켰고, 청춘의 광폭한 질주를 노래했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드스탁은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히피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에 대한 낭만적 열정은 시들어 버렸고, 버려진 청년 혁명가들은 산 속으로, 혹은 도시의 곳곳에서 고립된 채 폐기되고 있었다. 1960년대가 '순수의 시대'이자 '광기의 시대', '혁명의 시대'였다면 1970년은 그 벽두부터 그런 혁명과 순수, 광기의 불꽃이 한 줄기 비에 사그라들 듯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영향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새마을 운동의 근면, 협동, 자조의 깃발 아래 대중문화는 그야말로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시들어 사라질 지경이었다.

싸 르트르가 죽었을 때 누군가 그랬단다. "이제 프랑스도 조금 외롭겠다고"고. 우리에게 1970년대의 김민기가 없었다면, 그 시기의 대중문화는 우리 문화사에서 단 한 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라고. 솔직히 나의 세대가 김민기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세대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침이슬>에서 시작되어 다른 노래들로 건너갔듯이 한동안 그의 모호한 태도(이 말은 순전히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다. 김민기 자신이 특별히 어떤 입장을 밝힌 적은 없기 때문에.)로 인해 그를 용도 폐기하는 분위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김민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광석도, 안치환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꽃다지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를 잘 알 수 없는 세대라는 편리한 이유로 이 글들은 인터 넷사이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 와 김창남 교수의 책의 많은 도움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김민기 - 곡절 많은 역사의 유복자

  김민기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직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고, 김민기는 유복자로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을 다녔고,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 내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동하다 제적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증을 땄다. 귀국 후 남부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이리의 병원에서 김민기의 부친과 만나 결혼하여, 10남매를 낳았다. 김민기는 그중 막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김민기에게 활동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한다.

  그는 서너살 때부터 어머니와 형, 누나들이 각기 직장과 학교로 나간 후, 늘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텅빈 집에서 하루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글자를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체험은 다분히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을 동반한 채 아직도 그의 뇌리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혼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다가 듣게 되던 방공훈련의 사이렌 소리, 거의 매일 밤 되풀이되던 등화관제의 칠흑같은 어둠, 그 어둠속에서 간간히 들리던 개 짖는 소리, 검은 깃을 씌운 전등 아래서 듣던 괘종 시계 소리, 지붕 밑 홈통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 그의 감수성 속에 최초로 자리잡은 음악은 바로 그런 소리들이었다.

  1963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의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웃 활동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물론 공부는 뒷전이었다. 당시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가 그를 음악의 세계로 이끈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는 피아노 밑에서 누나의 연주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음악적 감각은 거기서 크게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누나의 연주에서 틀린 대목을 정확히 꼬집어 내는 '훌륭한 귀'를 가지게 된다. 그 당시 그가 다룰수 있었던 유일한 악기는 소년단실에 있는 우크렐레였다. 캠핑 때마다 우크렐레로 노래를 반주하는 일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1966년, 경기고등학교 입학하여서의 생활도 중학교때와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에게 그 자신의 악기가 생긴 것이다. 셋째 누나가 입학을 기념하여 선물한 클래식 기타는 그가 최초로 소유한 악기였다. 그는 혼자서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이용해 기타를 익혀나갔고, 얼마 안가 학교 내의 소문난 기타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누나가 선물한 기타는 그후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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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음악으로 -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한 그는 더욱 그림에 몰두했고, 1학년때 이미 개인전을 열 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대학교과과정의 미술수업은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았다. 따라서 학교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되었고, 결국 그는 1년 낙제를 하게 된다. 그가 학교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에 몰두하고 있을 때 고교시절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던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자기와 함께 듀엣을 만들어 노래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그림 그릴 물감값이 아쉬어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1만원 가량의 빚까지 지고 있었던 김민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둘은 함께 기타를 치며 다방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라는 의미)'였다. 그가 낙제를 하고 두번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동창이던 임문일(그는 70년대초 한때 DJ로 인기를 누렸었다.)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나게 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그에게 노래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을 비롯,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YWCA에 이른바 통기타 붐의 시발점이 되었던 '청개구리홀'이라는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이곳에서 자유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어울리곤 했다. 김민기도 자주 이곳에 들러 노래를 부르곤 했는 데, 이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였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이 그의 재질을 높이 사 레코드 출반을 주선해 주었다.

  1971년 그는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이 되다시피한 자신의 레코드(LP)를 취입하게 된다(이 LP는 계속 판매금지에 묶여 있다가 1987에 가서야 재발매가 되었지만, 아직 CD 버전은 발매된 적이 없다). 이 레코드는 발매된 지 얼마안가 압수조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1972년 봄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부르기를 지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불러준 노래는 '우리 승리하리라(Pete Seeger의 We shall overcome의 번안곡)',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등 세 곡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있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피우는 아이'가 그의 노래중 처음으로 방송금지되었다. 이것이 그가 그후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행로의 시작이었다.

김민기와 김지하의 만남 그리고 노동자

   그가 가수 및 작곡가로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1971년 무렵, 시인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던 한 시인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대단히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당시 김지하 등을 중심으로 유수한 시인, 학자, 화가, 음악인, 영화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문화의 방향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임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폰트라(PONTRA : Poem ON TRAsh, 즉 "잿더미위에 시를"이란 뜻)였는 데, 김민기도 이 모임에 참가하여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김민기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술반 동기이며 함께 서울대학에 다니고 있던 친구 이도성 등과 함께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노동자와의 야유회에서 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가지 체험을 이때 하게 된다. 마산 수출공단의 노동자들과 해변으로 야유회를 갔을 때였다. 막 석양이 지는 바닷가로 하나씩 둘씩 돌아오는 고깃배들을 바라보다 그가 무심코 "야, 참 멋있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 옆에 같이 있던 여공 한 사람이 쏘아 붙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예요. 뭐가 멋있다는 거지요?" 그 때 그는 뒷통수를 철퇴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난 아직 멀었구나'싶었다. 이 조그만 체험이 그 자신의 감성적 기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겪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가져온 소위 '지식인적'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대해 뼈저린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그의 삶의 커다란 지주의 하나였던 그림에도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화면을 수정하기 위해 칼로 긁어 내다가 캔버스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뚫린 구멍 사이로 방금 그가 그리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도데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의 방식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해 겨울 무렵을 기해 그는 완전히 서양화 붓을 놓아 버렸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아끼던 기타는 후배 누군가에게 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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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의 예수' 공연과 김민기

   1973년 무렵,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카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이 공연에는 김민기 외에 많은 연극패 탈패들이 참가했던 바, 이를 계기로 김민기는 연극패, 탈패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노래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이곳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첫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에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이 달려있었다)'는 첫 공연지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작곡되었다.

  김민기가 국악에 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당시 미대에 함께 다니던 김구한을 통해서였다. 김구한은 1966년에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하였으나 형편상 입학을 포기했다가, 1969년에 미대에 입학, 조소과에 다니고 있었다. 김구한에게서 단소를 배우면서 전통음악에 접하기 시작한 김민기가 보다 본격적으로 국악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작곡과 출신의 이종구와 김영동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첫 작업은 음대의 동아리인 '20세기 음악연구회'의 발표회 무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경림의 시에 이종구가 곡을 붙인 작품이 국악과 기타반주로 무대에 올려졌다. 기타부분의 편곡과 연주는 물론 김민기가 맡았다. 1973년 말, 김민기는 경음악 평론가 최동욱의 주선으로 지구레코드사와 미국으 RCA와 함께 라이센스 음반을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때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준비한 것이 1974년 4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이종구 작곡발표 무대였다.

  이 작곡발표회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 데, 제 1부에서는 이종구가 작곡한 작품들을 김민기가 노래불렀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빈 산', '서울길'을 비롯, '백제관음', '하나이었다더라'등 여러 노래들이 국악반주로 발표되었다. 제 2부에서는 한·일관계의 문제를 특히 기생관광에 초점을 맞추어 풍자한 소리굿 '아구'가 공연되었다. 소리굿 '아구'의 대본은 남사당 덧뵈기중의 먹중과장의 기본골격을 원용하여 김민기가 정리한 것이었고, 이종구가 작곡을 맡았으며,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이애주 등이 참여했다. 이 국립극장 공연은 TV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녹화도중 중단되었고, 레코드 출반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그 노래들이 공연 윤리위원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연자체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어 입장료가 200원인 데 암표가 무려 3000원씩에 거래될 정도였다. 전통 탈춤양식이 오늘의 문제를 담는데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를 보여준 이 소리굿 '아구'는 이후 1970년대 전반을 통해 크게 일어나 마당극 운동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어준 것이었다.

  1974년 10월, 군에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카츄사 중의 카츄사로 불리는 AFKN 방송국이었다. 그가 비교적 편한 군대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은 소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꿇고 있었다. 카톨릭권을 중심으로 국민투표 보이코트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고, 투표당일에 명동성당에서 하루종일 투표를 반대하는 집회와 공연을 벌이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 모임의 계획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다. 소위 '운동권 가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지만 이 일로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소환되었고, 곧 이어 최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전방으로 배치되어 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2월 혹한 속의 차디찬 사단 영창이었다. 내복도 못입은 채 15일간의 독방 영창생활을 마친 후 그 곳에서 그는 나머지 군생활을 보냈다.

  군에서 재대했을 때,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는 자신이 입대하기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는 '위험인물'로 단단히 낙인찍혀 있었고,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여전히 그의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었지만, 그를 인기가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가에서 불리우는 노래 가운데에는 그의 노래외에 작자미상의 구전가요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도 김민기의 노래일 것이라고 지레 단정짓곤 했다. 그는 본의아니게 대단한 투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제대하고 얼마후, 그는 가까스로 부평근처의 어느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생산직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의식화 교육'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밤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학이 아닌 조학인 셈이었다. 이 때, 그와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그는 '상록수'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기도 했다. 그의 현장생활에 관해서는 소설가 조세희가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이라는 작품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그는 당시 서울미대 학장의 배려로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중등교사 자격증도 함께였다. 대학에 입학한 지 9년만의 졸업이었다. 더 이상의 공장근무가 곤란해지자 그는 퇴사했다. 그후 한동안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숙하며 노무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로서는 몹시도 춥고 외로운 시기였다.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과 노래굿 '공장의 불빛'

   양희은이 노래한 이 디스크는 그가 군대시절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 그리고 제대후에 만든 '밤배놀이', '상록수(앨범에서는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 제목이다)'등, 그의 작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어느 한곡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다(앨범의 작사작곡자는 김아영으로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래가 문제가 아니라 작곡자의 이름이 문제였으니 심의 기준치고는 기가 막힌 심의기준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이름을 빌어 낸 이 앨범은 그나마도 얼마안가 일부가 삭제되었고, 곧 다시 판금되어야 했다. 말썽이 된 것은 '늙은 군인의 노래' 때문이었다(이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이 노래는 약간의 가사를 바꾸어 나중에 군대에서도 부르게 되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공장의 불빛>은 1970년대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굿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낸 것이었다.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테이프에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비로소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공장의 불빛'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그는 당연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백원담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이 때 김민기는 아현동의 어느 무용교습실을 빌려 한국의 마당굿을 토대로 하여 공장의 노동작업을 형상화한 기계춤을 그가 직접 지도하며 공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1979년의 초봄 무렵 김민기는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공연장에서 <공장의 불빛>을 공연했다. <공장의 불빛>은 그가 시쳇말로 '빵에 갈 각오'를 하고 만든 것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구속되지 않고 곧 풀려나왔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이제 더욱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아무데도 갈곳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부친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익산의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머슴살이 조차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주인집은 정기적으로 그에 관해 경찰에 보고를 해야 했다. 10·26이 터진 후 그는 김제로 옮겨 소작농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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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와 농사꾼으로 변모한 김민기

   10.26직후, 한국사회는 새로 맞을 봄의 기대로 잔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민기가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야학의 후배 강학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여성 해고 노동자들에게 보모교육을 시켜 유아원을 설립하고자 한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10.26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유아원 기금마련 자선공연이 김민기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은 한줄도 비치지 않았지만 소문을 듣고 문화체육관에 몰려든 젊은이들이 김민기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쏟았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계속되는 앵콜 요청으로 다섯곡이나 더 불러야 했다. 이 공연에서 마련된 자금으로 '해송 아기둥지'라는 이름의 유아원이 설립되었다.

   1980년 봄, 광주지역 대학출신의 문화패들이 극단 '광대'를 조직, 창립공연으로 마당극 '돼지풀이'를 공연했다. 이 창립무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축사를 했고, 김민기가 기획, 양희은 등이 찬조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김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라도 지역의 문화패를 비롯,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모내기철이나 추수때면 각지의 친구, 후배들이 모여들어 일을 도와 주었고 그의 집은 마치 장터처럼 떠들썩하기 마련이었다. 이 때 김제·전주지방의 젊은 연극패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었는 데, 그는 이들을 규합,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창작했고, 1981년, 전주에서 소규모 위크샾 형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1년, 김민기는 전곡으로 옮겨 작은 아버지와 함께 소작을 시작했다. 그 때 그는 영농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내내 해태 양식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전곡에서 농사를 짓던중 그는 농민의 현실을 더욱 깊이 절감하는 계기가 된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해 그는 약 5000평 규모의 참깨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회사에서 그 일대를 맡아 액체비료를 살포했는 데, 나중에 보니 싹이 몽땅 타 죽어 있었다. 김민기는 혼자서 원인조사에 나섰고 결국 비료회사에서 정량의 5배 이상이나 과다살포한 탓임을 밝혀낸다. 그때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각지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으나 도움받을 길이 없었고, 그는 혼자서 비료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 등에 관해 거의 완벽한 데이터를 작성해 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인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새마을 운동' 이후 마치 투기꾼처럼 변해 버린 농민의 모습과, 속으로 더욱 피폐해 질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1981년 겨울, 전곡의 민통선 북방지역에 5000평 규모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다. 단, 논옆에 있는 흉가 하나를 매입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겨울, 김민기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원을 벌었고, 그것으로 흉가를 매입, 그 곳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규합, 청년회를 조직했고, 그것을 통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 그곳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매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다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측과 소비자측에게 각기 250만원 정도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청년회는 이 이익금을 기금으로 쓸 수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마을 공동 목욕탕 건립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다. 이 일로 한때 엉뚱하게도 '쌀장수'로 소문이 났고, 시인 황명걸은 '쌀장수 김민기'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문예중앙, 198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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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뮤지컬의 탄생, <지하철 1호선>

   1983년, 극단 연우무대는 2년전 김민기가 전주에서 만들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의 대본을 손질하여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 본선에 올랐다. 이 연극은 김민기의 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는 데, 당시 제목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였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 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김민기의 명성에 힘입어 대학생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이래 최대의 관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 가 전곡에서 농사꾼으로 일하고 있던 1983년 겨울, 그가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가지고 있던 책까지도 몽땅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만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새로 집을 지어줄테니 계속 머물러 달라고 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석만이 돌아왔다. 김민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김민기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마침내 김민기는 농촌생활을 일단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받아 시작한 이 기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창작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 내용상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작품임에도 그것이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윤심의를 위한 접수가 거부되어 심의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레코드사로부터 받아낸 계약금만 고스란히 빚으로 떠넘겨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낸다는 것은 그 내용을 불문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새로운 각오로 추진한 모처럼의 시도는 또 한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그 작업을 계기로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뮤지컬 출반계획을 추진하던 사무실에 상근하며 그의 작업을 도왔던 이미영이었다.

  1985년 8월 31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른다섯의 노총각 김민기는 결혼식을 올렸다.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이 있던 서울미술관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그들은 불광동의 두칸짜리 전세방에서 새살림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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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빚지고 있는 이름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원제는 Line 1-das Musical)는 김민기가 만든 <지하철 1호선>이 원작의 감동을 뛰어넘는 한국적 뮤지컬로 변모한 사실에 감탐하며 서울에서의 1,000회 공연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에서 직접 맥주 5통을 가지고 와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김민기는 지금도 일요일이면 집 앞의 작은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봄이 오면 땅을 갈고 돌을 고르고, 싹이 나면 솎아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저녁에는 그 밭에서 자란 푸성귀를 뜯어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먹는다고 한다.

  얼마전 <지하철 1호선>은 중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중국 공연을 준비하느라 노심초사하는 김민기에게 백원담 교수는 "어떻게 되겠지요."라고 그를 위안하는 말을 생각없이 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민기는 몹시 화를 내며 "세상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제 청년 김민기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할 만한 기성 세대가 된 훌륭한 전범으로서의 김민기를 갖게 되었다. 김민기는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얼굴 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상품 교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해가는 작업을 <지하철 1호선>을 통해 해나가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사에서 김민기란 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몹시 쓸쓸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에도 김민기라는 한 개인에게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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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Talk to Het 그녀에게>를 보다가 <Cucurrucucu Paloma 꾸꾸루꾸꾸 팔로마>를 들었다.

어느 집 앞마당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장면인데, 콘트라베이스와 첼로 그리고 기타반주로 중년의 남성이 조금은 느리게 노래를 한다.

애잔하면서 호소력 있게.

영화 속의 청중뿐 아니라 나도 쏘옥 빠져들었다.

얼마 전 원인재에서 직접 들은 장사익이 겹쳐졌다.

 

나는 <끼싸쓰 끼싸쓰 끼싸쓰>니 <베싸메 무초>니 하는 노래를 참 맛스럽게 부르기로는,

Trio Los Pancho가 최고라고 생각해왔다.

푸줏간 주인처럼 생긴 세 아저씨는 기타와 간단한 긁힘소리를 내는 악기소리에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를 얹는다.

그들이 부른 <Quizas, Quizas, Quizas 끼싸쓰 끼싸스 끼싸스>를 듣고 노랫말을 찾아보았던 것처럼,

이제 <꾸꾸루꾸꾸 팔로마>를 찾는다.

 

찾아보니, 좌르르 나온다.

사람들은 그리 다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관심을 드러냈다.

브라질 국민가수 Caetano Veloso 란다.

 

 

 

Cucurrucucu Paloma

 

Dicen que por las noches
Nomas se le iba en puro llorar,
Dicen que no comia,
Nomas se le iba en puro tomar,
Juran que el mismo cielo
Se estremecia al oir su llanto;
Como sufrio por ella,
Que hasta en su muerte la fue llamando

Ay, ay, ay, ay, ay,... cantaba,
Ay, ay, ay, ay, ay,... gemia,
Ay, ay, ay, ay, ay,... cantaba,
De pasion mortal... moria

Que una paloma triste
Muy de manana le va a cantar,
A la casita sola,
Con sus puertitas de par en par,
Juran que esa paloma
No es otra cosa mas que su alma,
Que todavia la espera
A que regrese la desdichada

Cucurrucucu... paloma,
Cucurrucucu... no llores,
Las piedras jamas, paloma
¡Que van a saber de amores!
Cucurrucucu... cucurrucucu...
Cucurrucucu... paloma, ya no llores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다고 하네

그의 눈물에 담아낸 아픔은 하늘을 울렸고
마지막 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녀만을 불렀네

 

노래도 불러보았고 웃음도 지어봤지만
뜨거운 그의 열정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네

어느날 슬픈 표정의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쓸쓸한 그의 빈집을 찾아와 노래했다네

 

그 비둘기는 바로 그의 애달픈 영혼
비련의 여인을 기다린 그 아픈 영혼이라네 

 

**

사람들은 말하네. 밤이 되면 그는 단지 울기만 한다고

먹지도 않는다고 말하네, 그저 잔을 들이키기만 한다고

사람들은 맹세하며 말하네, 하늘까지도 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전율한다고

그녀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는 죽으면서도 그녀를 불렀다네.

아, 노래하네

아, 신음하네

아, 노래하네

치명적인 열병에 걸려, 죽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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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관한 이야기는 월드뮤직에 대한 글에서도 나온다.

  심영보가 쓴 <월드뮤직 -세계로 열린 창>의 첫 단락은 "항구는 노래를 만든다"인데, 거기에 파두에 대한 소개가 실려있다. 그리고 15세기, 해양제국 포르투갈 이야기도.

 

  "파두의 음악적 뿌리는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15세기의 해양진출시기에 맞닿아 있다.

포르투갈의 해양진출은 이제껏 그 어느 민족도 경험하지 못한 이질적인 문화에 광범위하게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의 최종 목표는 포르투갈과 식민지 문화의 완전한 융합에 있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 리스본의 알파마 거리에는 아프리카인들과 브라질에서 건너온 혼혈인들이 자연스럽게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해있지만, 피레네 산맥에 의해 나뉘어 있는 스페인과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민족성에는 우울과 고독, 향수와 같은 정서가 내면에 깊이 존재하고 있는 반면,

스페인 사람들의 핏속에는 억제할 수 없는 뜨거운 본능이 흐르고 있다."

 

  파두 Fado라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하는 라틴어 fatum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파두에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운명관과 정서가 깊이 배어있다. 운명의 노리갯감에 불과한 인간이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끊임없이 어떤 대상을 열망하는 극단의 모순과 긴장.

  음악적으로는 1800년 전후에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던 도시풍이면서도 감상적인 노래 모디냐 modinha와 경쾌한 춤노래 룬두 lundú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5세기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융성했던 제국 포르투갈과 19세기 문화융합으로 발생한 파두. 그 연결고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 번 들어봐야지.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Amalia Rodrigues의 Barco Negro 검은 돛배와 Maldicao 어두운 숙명을 들을 수 있다.

  http://blog.naver.com/woori0903?Redirect=Log&logNo=150023458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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