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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11 알렉산더 로드첸코, 현대사진의 길
  2. 2007.07.11 미술평론가 박신의 선생 인터뷰
공부/사진2007. 7. 11. 11:00

현 대 사 진 의 길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 영역: John E. Bowlt | 영문중역: 양현미



보리스 쿠쉬너(Boris Kushiner)의 “공개 편지”에 대한 답변인 이 논문은 로드첸코가 사진을 통해 시각적 사유방식을 “혁신”시킬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매우 정교하게 진술해 놓은 것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관이 지각상의 습관들과 회화형식의 관례들로 인해 어쩔 수없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뒤흔들어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줄 시각적 충격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사진이 회화로부터 물려받은 시각적 전통들은 도시화된 기술적인 세계를 묘사하는데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카메라만이 동시대의 삶을 반영할 수 있다”라고 로드첸코는 주장한다. 로드첸코는 그의 목표가 개인적인 사진예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신문사진의 변혁을 고무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광범위한 관중에게 새로운 시각적이고 지각적인 습관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쿠쉬너에게

당신은 “상향시점(from below up)과 하향시점(from above down)”에 관하여 흥미로운 문제를 지적했으며, 이러한 사진의 시점들이 나에게 “전가되어온” 만큼(만약 Sovetskoe foto지의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해도 좋다면), 이에 응수해야 한다고 느낀다.
사실 나는 다른 모든 시점들보다 이러한 시점들의 사용을 지지하는 바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모든 나라의 미술사나 회화사를 보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회화들이, 약간의 극히 작은 예외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배꼽 높이나 눈 높이에서 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화와 원시 회화들에서 외관상 받은 인상을 새의 시점으로 간주하지 말아라. 많은 인물들을 담을 수 있도록 수평선을 올려놓은 데 불과하며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눈 높이에서 제시되어 있다. 함께 보면 전체는 현실에도 새의 시점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위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각각의 인물은 정확하게 정면 시점과 측면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그들은 인물 위에 인물이 놓여있지 사실주의 회화들에서처럼 인물 뒤에 인물이 놓여있지 않다.
중국 미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그들은 한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어떤 대상의 가능한 모든 사선들(declivities)은 운동의 순간(단축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관찰의 시점은 언제나 중간 높이이다.
사진이 실린 오래된 잡지들을 살펴보라─그러면 당신은 똑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가끔 다른 관점들을 접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에 불과하다. 가끔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새로운 시점들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 잡지들을 많이 사며 사진을 모으지만, 이런 종류의 사진은 전부 합쳐서 약 36점 모았을 뿐이다.
이런 위험한 스테레오타입 뒤에는 인간의 시각적 지각을 교육시키는 편향되고 인습적인 관례, 시각적 이성의 과정을 왜곡하는 일방적인 접근방식이 놓여있다.
회화적 창안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Vereshchagin의 회화1나 Denner의 초상화들2처럼 처음에는 어떤 것을 “실물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욕망이 있었다─그들은 프레임 밖으로 막 기어 나올 것 같았으며 피부 구멍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화가들은 칭찬 받기는 커녕 “사진가” 같다고 비난받았다.
회화적 창안의 두 번째 길이 세계에 대한 개인주의적이며 심리학적인 관념의 뒤를 이었다. 정확하게 동일한 유형의 변형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벤스 등의 회화들에 묘사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사용했고, 루벤스는 자신의 아내를 사용했다.
세 번째 길은 양식화, 회화를 위한 회화였다: 반 고호, 세잔,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그리고 마지막 길은 추상, 비대상성이었다: 그때 사실상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관심은 과학적인 것이었다. 구성, 질감, 공간, 무게 등.
그러나 새로운 시점, 원근법, 그리고 단축방법을 탐색하는 길들은 전혀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회화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AKhRR3의 견해대로라면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아직 어느 누구도 시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사진─새롭고, 신속하며, 구체적인 세계의 반영체─은 반드시 세계를 모든 관점에서 보여주고 모든 방면에서 볼 수 있는 국민의 능력을 계발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사진은 이것을 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때에 “회화적 배꼽”의 심리학이 시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현대의 사진가를 꾸짖고 있다.
그것은 Sovetskoe foto의 “사진-문화의 경로들”과 같은 사진잡지의 무수한 논문들을 통해 성모와 백작부인들을 그린 유화 같은 모델들을 제공하면서 그를 가르치고 있다.
만약 대천사, 그리스도, 그리고 군주들의 구성에 능한 세계의 권위자들이 제시한 사례들로 인해 시각적 이성이 방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소비에트 사진가 또는 기자를 갖게 될 것인가?
내가 회화를 버리고 사진을 시작했을 때, 나는 회화가 자신의 무거운 손으로 사진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당신은 현대 사진의 가장 흥미로운 시점들이 하향시점과 상향시점이며 배꼽 높이가 아닌 다른 것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사진가는 회화로부터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기가 힘들다. 나의 사고과정은 시각적이며, 단편적인 아이디어들만 떠오른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에 관해 쓴 적이 없었으며, 사진, 그것의 임무와 성공에 관한 논문은 하나도 없다. 모홀리 나기(Moholy-Nagy) 같은 좌파 사진가들 조차 “내가 작업하는 방식”, “나의 길” 등과 같은 개인적인 논문을 쓴다. 사진잡지의 편집자들은 화가들을 초빙해서 사진의 발전에 관해 글을 쓰게 하고 있으며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신문사진가들을 다룰 때도 아둔하고 관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문사진가들은 그들의 사진을 사진잡지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으며 사진잡지 스스로 일종의 미술계(Mir iskusstva, The World of Art)4로 변화하고 있다.
Sovetskoe foto에 실린 나에 대한 편지는 우스꽝스러운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사진에 투하된 일종의 폭탄이다. 나를 깎아내리면서, 그것은 또한 새로운 시점들을 사용하고 있는 사진가들을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다.
Mikulin이 대표로 있는 Sovetskoe foto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너희들은 “로드첸코처럼” 작업하고 있으며 따라서 너희의 사진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문화화되어 있는가 보여주기 위해, 잡지들은 현대 외국 사진가들의 사진 한 두점을 싣고 있다─미술가의 사인도 없고 출처도 명시하지 않고 말이다.
이제 본래 문제로 되돌아가자.
다층건물들로 이루어진 현대도시, 특수하게 디자인된 공장들과 설비들, 2층이나 3층 규모의 상점 창문들, 전차들, 자동차들, 조명장치가 된 표지판과 간판들, 쾌속선들과 비행기들─당신이 자신의 『서구에서의 103일(On Hundred and Three Days in the West)』5에서 그토록 멋있게 묘사했던 그 모든 것들이─시지각의 평균적인 심리학을 바꾸어놓았다(약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카메라만이 동시대의 삶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적 합리성이라는 구시대적인 법칙들은 사진을 그들과 동일한 복고적 원근법을 지닌 일종의 낮은 등급의 회화, 에칭, 또는 판화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 힘 때문에 미국에서 68층 건물 사진을 배꼽 높이에서 찍게 된다. 그러나 이 배꼽 높이는 34층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접해 있는 건물 안으로 기어올라가 34층에서 68층짜리 거인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만약 인접한 건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동일한 정면의 부분적인 광경을 얻게 된다.
길을 걸어갈 때 당신은 건물들을 위로 쳐다본다. 위층에서는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들과 보행자들을 내려다본다.
당신이 전차 창문이나 자동차에서 힐끗 바라보는 모든 것, 당신이 극장의 청중석에 앉아 내려다 볼 때 얻게 되는 광경─모든 것이 고전주의적인 “배꼽” 시점으로 변형되거나 정돈되어 버린다.
그가 맨 위층 관람석에서 『Uncle Vanya』를 내려다 볼 때, 관객은 그가 보는 것을 변형시킨다. 그의 마음 속의 중간-시점(mid-view)에 따라 『Uncle Vanya』는 실제의 삶처럼 전개된다.
내가 파리에 있으면서 에펠탑을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6 그러나 버스를 타고 매우 가까이 지나갔을 때 나는 창문을 통해 철근으로 된 저 선들이 좌우로 위로 뻗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시점은 나에게 그것의 규모와 구조에 대한 감동을 주었다. 배꼽 시점은 당신이 본 모든 엽서에 지겹게 찍혀있는 달콤한 얼룩같은 것을 제시해 줄 뿐이다.
당신 은 공장의 모든 것을 자세하게─안에서, 아래로, 위로 조사하는 대신 왜 공장을 멀리서 그리고 중간 시점에서 보려고 애쓰는가?
현실에서 원근법이 왜곡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카메라 자체가 원근법을 왜곡하지 않게 되어 있다.
만약 거리가 좁아서 옆으로 물러날 공간이 없다면, “법칙들”에 따라 당신은 아마도 렌즈가 있는 카메라 앞면을 들어올리고 뒤를 기울일 것이다 등등.
이 모든 것은 “알맞는” 투시원근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들어 비로소 일명 아마추어 카메라들에도 광각 렌즈들이 사용되게 되었다.
수백만장의 스테레오타입 사진들이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들 간의 유일한 차이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좀더 성공적이거나 어떤 것은 에칭을 모방했거나 다른 것들은 일본 판화를 그리고 나머지들은 여전히 “렘브란트” 작품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건들을 담은 사진들은 신문사진이라고 불리는 반면, 풍경, 두상, 나체여인들을 찍은 사진들은 예술사진이라고 불린다.
신문사진은 저급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응용사진, 이런 저급한 종(種)이 사진에 혁명을 일으켰다─잡지와 신문 간의 경쟁을 통해서, 사진에 필수적인 많은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종류의 빛과 모든 시점에서 어떻게 해서든 사진을 찍는 것이 필수적인 순간에 이를 수행함으로써.
이제 새로운 투쟁이 생겨났다: 순수사진과 응용사진 간에, 예술사진과 신문사진 간에.
사진-보도에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역시, 바로 이런 진정한 활동 속에서도, 스테레오타입과 거짓된 리얼리즘이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놓았다. 나는 야유회를 갔다가 기자들이 춤을 각색하고 그림 같은 일군의 사람들을 언덕에 배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림 같은” 무리에 서둘러 끼여든 소녀들이 어떻게 차에 숨어서 그들의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했는지 재미있다.
“자 가서 사진을 찍읍시다!”
주제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사진가가 아니라, 카메라에 잡히는 것이 주제이다. 그리고 사진가는 회화의 법칙에 따라 올바른 자세를 그에게 제시한다.
여기에 『Die Koralle』라는 잡지에 실린 사진 몇 장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연대기, 한편의 민족지, 하나의 기록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가가 따라오기 직전까지 이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으며 자기 자리에 있었다.
사진가가 그들을 갑자기, 모르는 사이에 찍었다면 그가 포착했을 장면들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모르는 사이에 사진을 찍는 것은 어렵다. 반면에 포즈를 잡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빠르고 쉽다. 그리고 당신의 고객도 오해를 하지 않게 된다.
잡지들에서 당신은 작은 동물들과 곤충들을 실물 크기보다 더 크게 확대해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를 그들에게 가깝게 들이댄 사람은 사진가가 아니다.
카메라에 등장한 것은 그들이다.
새로운 사진의 주제들이 발견되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의 전통에 따라 찍히고 있다.
모기들은 배꼽 높이에서 레핀의 Zaporoahtsy8의 회화적 법칙에 따라 찍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는(see)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쳐다보는(look at) 관점에 따라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인 대상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플라흐(Flach)의 다리에 대해 쓰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꼽 높이에서 찍힌 것이 아니라 지표면 높이에서 찍힌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당신은 카우프만(Kaufman)과 프리드리앤드(Fridliand)의 슈코프(Shukhov) 라디오 타워 사진들이 나쁘다고, 타워들이 정말 뛰어난 구조물이라기 보다는 빵바구니를 닮았다고 쓰고 있다. 나도 정말 동의한다. 그러나..." 만약 대상이 새롭고 당신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면, 어떤 시점이라도 대상의 진정한 모습을 침해할 수 있다.
프 리들리앤드만이 여기에서 실수를 범하고 있지 카우프만은 아니다. 카우프만의 사진은 다양한 시점에서 타워를 찍은 여러 개의 프레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러한 광경들은 움직인다. 카메라가 돌고 타워 위에서 구름들이 떠다닌다.
Sovetskoe foto는 “사진-회화”가 마치 독특하고 영원한 어떤 것인 양 이야기한다.
정반대이다. 우리는 마치 주제를 포위하기라도 하듯이─열쇠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여러 개의 다른 시점에서 그리고 다른 사진에서는 다양한 위치에서 주제를 찍어야 한다. 사진-회화를 만들지 말고 기록적 (예술적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사진-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요약하면, 사람들이 새로운 시점에서 보는데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친숙한 주제들을 완전히 예기치 못한 관점에서 그리고 완전히 예기치 못한 위치에서 찍는 것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주제들은 또한 주제의 완전한 인상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찍어야 한다.
끝으로 나는 나의 주장을 예시해줄 수 있는 몇 개의 사진들을 동봉한다.
나는 일부러 같은 건물의 사진들을 골랐다.
첫 번째 것은 미국 앨범 『아메리카』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진들은 가장 스테레오타입의 방식으로 찍혀져 있다. 그들을 찍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인접한 건물들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정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모두 올바른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 미국을 이런 식으로 보도록 키워졌다.
실제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동일한 건물의 두 번째 세트의 사진들은 독일 좌파 건축가 멘델슨(Mendelsohn)9의 것이다. 그는 거리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직한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 소방수가 있다. 매우 사실적인 시점이다. 만약 당신이 창문을 내다본다면 그를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얼마나 충격적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사물들을 자주 쳐다보지만 그들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쳐다보는(look at) 것을 보지(see)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의 특이한 원근법들, 단축법들, 위치들을 보지 않는다.
평범한 것, 용인된 것을 보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은 시각의 세계를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적 논법을 혁신해야 한다.
“배꼽 시점을 제외한 모든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 전부 수용될 때까지.”
“그리고 오늘날 가장 흥미로운 시점들은 그러한 하향시점과 상향시점 그리고 그들의 대각선들이다.”

8월 18일, 1928년



1 Vasilii Vasilievich Vereshchagin(1842~1904), 사실주의 화가이며 세부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한 전쟁 장면과 민족지적인 구성으로 유명했다.
2 Balthasar Denner(1685~1749)는 정확하기로 유명한 초상화가이자 미니어처 화가였다. 그는 살색을 묘사하기 위해 초상화에 특수한 유약을 사용했으며 이런 이유에서 “Porendenner”라는 별명이 붙었다.
3 AKhRR: The Association of Artists of Revolutionary Russia. 혁명러시아예술가연맹
4 World of Art는 1890년대에 Sergei Diaghilev와 Alexander Benois가 성페테르스부르그에서 이끌던 일군의 미술가들, 미학자들, 작가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은 장식미술에 특별한 관심을 쏟음으로써 러시아 미술의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하려고 하였다. 이 단체는 The World of Art라는 이름으로 잡지(1898~1904)를 발견했고 일련의 전시들(1899~1906)을 조직했다. 1906년에 시작된 분열을 겪은 후에, 동일한 이름을 견지해온 그룹이 1910년~24년 동안 전시 활동을 재개했다.
5 Boris Kushner는 묘사들과 일화들을 담은 이책, Stotri dnia na Zapade을 1928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했다.
6 1925년 3월 19일~6월 10일 까지 이루어졌던 로드첸코의 파리방문은 국제장식미술엑스포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럄oratifs와 같은 시기였다. 그는 소비에트관을 위해 노동자의 독서실을 디자인했다. 파리에서 보낸 그의 편지들은 Novyi lef, no.2(1927)에 실렸다.
7 Die Koralle는 베를린에서 1925년~41년에 출판된 도판이 있는 대중적인 과학잡지였다.
8 The Zaporoahtsy(1878~91)는 사실주의자 Ilia Efimovich Repin(1848~1930)이 그린 화려한 회화로서 Zaporzhe Cossacks가 터키의 Ottoman이 그의 제국과 연합하자고 청하는 것을 거절한 일화를 그린 것이다.
9 Mendelsohn에 대해서는 pp.221(출전)의 상단을 보시오.

 

**출처: 포럼a 4호

   http://www.foruma.co.kr/__v2/faForumA/view.asp?fNum=51&showPublishNo=4&page=1&whichPage=1&writer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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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웹진 땡땡

          http://www.arte.ne.kr/webzine/webzine_view.asp?idx=46

 

 

미술평론가 박신의 선생님

정리 : 신정수
(웹진 콘텐츠팀, yamchegong@naver.com)





전효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계신데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이름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기억하기로는 작년에 문예진흥원 심사 이후에 약간의 ‘시비’가 있었고,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분류했던 것에 대해 나는 ‘다모 폐인’이다 이런 식으로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지요. 선생님 개인을 정의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박신의: 어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벨기에 현대만화전을 위해 내한한 벨기에 만화작가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제 명함만 보고는 어떻게 만화 자리에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저보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일단 그들에게 저는 만화를 예술로서 접근한다고 했고, 그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 비디오아트,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영역까지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모든 예술적 성과를 함께 나눠 갖기 위해 효율적인 예술제도와 매개장치를 연구하고, 문화정책을 고민한다고 하였더니 금방 이해하더군요. 문제는 장르나 전공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문화적 관심의 확장과 사회적 연속성을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다면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전문성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고 봅니다. 지난 해 문예진흥원 지원 심사를 할 때 어떤 분이 저를 80년대 방식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로 구분하면서 색깔론 비슷하게 몰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저는 ‘다모폐인이다’라고 대답했어요. 당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으로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문화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 아니겠어요? 저는 직업상으로는 대학에서 미술사와 예술경영을 가르치고 미술평론과 전시 기획을 하고, 문화정책과 문화기획 전반을 다루는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미술평론가’라는 지위를 택하고 싶어요. 미술의 확장과 문화적 힘을 믿는 사람, 늘 당대적 담론에 반응하며 현장감을 가지고 문화적 실천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의 ‘미술평론가’ 말입니다. 또 겸손하고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직함이기도 하잖아요?

전효관: 미술평론가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사회적으로 개입하고 계시잖아요? 그것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신 건가요?

박신의 : 물론 미술평론이라는 활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저로서는 평론 작업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의식과 쟁점을 풍부하게 살려주는 작업이라고 봐요. 그리고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사회적 지위, 그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실천력을 살려주고, 이를 많은 사람들이 나눠갖도록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러니 미술평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예술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되고, 또 사회적 실천도 고민하게 되죠. 그런 과정이 결국 예술작품을 매개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살피는 일이 되면서 사회적 개입이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요.

전효관: 제가 책이나 글로 보면서 아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관심 영역과 관심의 확장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신의: 정말 그래요. 저는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여러 영역의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치지요. 경희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학과를 맡다보니, 또 제가 경영대학원 소속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된 것도 있어요. 최근 저는 문화예술기반시설에서의 인력문제를 다룬 연구를 하면서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하신 분들과 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노동의 문제와 경영의 문제에서 문화 영역을 덧붙여 냈지요. 또 도시계획 연구자들이 새로운 도시계획 개념으로 문화기획(Cultural Planning)을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쟁점이 드러나게 되면서 제가 그 부분에 합류하게 된 것도 같은 경우지요. 이런 식으로 문화예술 외부의 영역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제가 여러 일을 하는 것이 된 셈인데, 사실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문화부분이 고려되지 않다가 이제야 문화가 들어오는 시점이 된 것이라는 변화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미술사를 통해 그런 간학문적인(interdisciplinary) 측면을 훈련받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저는 미술사를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입장인데, 예술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적 구조를 보고, 욕망을 읽으며, 모순을 관찰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겐 미술사가 단순히 지식체계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사유 모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을 해석하고 해체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전효관: 미술의 위기, 이에 관한 대응들과 관련된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박신의: 요즘에는 ‘미술’이 너무 위축되어, 미술교과모임의 미술 선생님들도 미술이라는 이름 대신 ‘시각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시각문화’는 저 역시 80년대 말부터 미술이 시시각각 변하는 시각문화 혹은 영상문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하게 제안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미술을 대체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시각문화 관점에서 ‘새로운 미술교육’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만일 미술의 위기를 말한다면, 저는 미술교육을 실행하는 ‘제도의 위기’이지 그 자체의 위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술이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보수적인 제도적 틀에 안주하는 것 역시 미술제도의 위기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지요. 저는 미술을 제대로 교육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틀로 미술을 갱신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판단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전효관: 선생님께서 미술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시대 환경 변화에서 미술의 대응이 약했다고 봅니다. 한국, 외국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미술은 쇠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역별로 넓혀가려는 자체 노력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박신의: 지난 해 11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문화정책회의에 참석하면서, 저는 프랑스 미술대학 교육 프로그램 혁신을 주제로 미술학교 방문을 신청해서 간 적이 있어요. 이미 프랑스에서는 변화하는 매체 현상에 대응하면서 미술교육을 시각문화 중심으로 바꿔가고 있었어요. 5년 기간의 미술학교 기간 중 1학년과 2학년의 기초과정을 마치면 3년 차부터는 사진과 비디오, 3-D 디자인 및 영상, 음향작업 등을 배울 수 있게 해요. 다시 말하면 그리고, 만들고, 표현한다는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바탕으로 기술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미술교육의 범주로 포괄한다는 것이지요. 이에 비하면 한국의 미술교육은 여전히 낡은 미술개념을 고수하는 입장이지요. 저로서는 새로운 세대들이 게임과 디지털 카메라에 익숙한데, 이들에게 여전히 그리고 만드는 작업만을 교육한다면, 미술교육 자체가 억압이 된다고 봐요. 게다가 뉴미디어라는 것이 여전히 예술적 표현과 생각의 기록과 질문을 던지기 위한 ‘도구’인 한, 결코 미술을 대체하는 요소가 아니겠지요. 오히려 뉴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교육적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전효관: 미술사에서 그런 선례가 있을까요?

박신의: 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 구성주의와 생산주의 예술, 그리고 그 흐름을 서구의 바우하우스에서 받아들인 라즐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의 예술 개념을 모델로 두고 있어요. 생소하실지 모르겠는데, 모홀리-나기는 우리가 잘 아는 파카 만년필을 디자인 한 사람이에요. 그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 바우하우스를 운영하는 데 보탰다고 하지요. 그는 회화에서 조각, 사진, 영화, 건축, 디자인 분야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이어서 오늘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컴퓨터를 가지고 많은 작업을 했을 겁니다. 또한 독일 바우하우스와 미국의 바우하우스를 이끌기도 한 훌륭한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요. 그는 바우하우스 총서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1924년에 발표한 사진과 영화 등의 미디어에 대한 예술적 사고는 차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로 남고 있답니다. 제가 이 예술가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큰 의미를 두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다면적 능력을 믿는다는 점이고, 또 예술이 한 사회의 문화생산에 기여함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미디어 발달에 대해 능동적인 대응을 보여준 태도에 있구요. 저는 예술이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까운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미디어 역시 그런 생체리듬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전효관: 이제 문화예술교육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죠.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박신의: 문화예술교육이 왜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의 생체리듬을 일깨워주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답하고 싶어요. 다시 말하면 생체리듬이란 열려진 것이어서, 이를 통해 인간은 다면적인 활동과 복합적인 자기 개발이 충분히 가능한데, 오히려 학교교육이 그 가능성을 닫아버렸다고 보는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최근 문화예술교육의 실행을 위한 연구작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수혜 개념에 한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실제로 어떤 문화예술이고, 어떤 교육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 부분이 아쉽더군요. 저는 예술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편이고, 또 그래서 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갖고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발견’이라는 교육 효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생체리듬을 찾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는 전 과정을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예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에서 우월함이 있다고 봐요.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나 계량적인 방식으로 따져보면, 월드컵과 촛불시위로 모인 사람들의 엄청난 공감대와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생체리듬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게 마련이지요. 엄청난 상상력이 수반된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계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아마 그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는 인간에 대한 신뢰의 기초를 예술가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란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가 없이도 사회가 돌아갈 법도 한데, 왜 그 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갖는 걸까요. 그리고 왜 그 결과물을 나눠 갖자고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그럴까요. 그것은 세계를 바꿔갈 수 있는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일 저보고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라면, 제 모델은 바로 이런 구조를 갖습니다.

전효 관: 선생님 말씀에 재미있는 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인간의 이성 능력을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내 휴머니즘은 어떤 에너지에 대한 신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박신의: 사회는 설득력 있는 ‘공감대’로 인해 바뀌지, 측량 가능한 ‘수치’로 바뀌지는 않거든요. 아시잖아요. 아주 소수라도 내용의 핵심과 설득력을 가지면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된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앞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어요. 선생이 말하는 에너지를 믿는 휴머니즘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래서라도 문화예술교육의 경우도 어떤 예술인가, 어떤 교육인가를 먼저 논의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예술교육을 단순히 예술 향유의 기회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 일테면 국립현대미술관을 무료로 입장하도록 한다거나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어린이 그림대회를 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기회 확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에너지를 찾아가도록 하는 교육말입니다.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말하는 ‘예술과 삶의 결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술가라는 전문집단만의 예술을 거부하는 의미이거든요. 그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찾는다는 행동도 일반 대중의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다는 의미이구요. 저는 예술가와 아마추어의 생체리듬을 찾는 공동의 프로젝트 속에서 문화예술교육이 행해지길 바라고, 그런 가운데 진정한 에너지가 사회의 힘으로 쌓이는 과정을 보고 싶은 겁니다.

전효관: 어떤 과정과 사례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부연해서 설명해주세요.

박신의: 새로운 예술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네요. 흔히 새로운 예술하면 형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지만, 저로서는 작품 제작의 방법, 작품 감상의 방법, 작품이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법, 작품이 소통하는 경로의 문제에서 새로운 접근을 갖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현대미술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을 감상한다는 개념은 매우 약화되었지요. 현대미술의 혁명은 개념 예술, 즉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예술이 등장하면서 주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어요. 예술가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주고 대중들이 참여하면서 작품을 같이 만들어 가는 개념이 가능하지요. 현재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만날 수 있는 개념미술의 한 사례를 들어볼께요. 공원에 가면 헤드폰이 걸려있고, 누구나 헤드폰을 끼면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와 공원을 산책하도록 가이드를 합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실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헤드폰에서 동일한 바람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립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무심코 지나는 바람소리를 의식적으로 듣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목소리는 오른편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 멈춰 왼편 아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따라하면 그 아래에서 자그마한 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죠. 이렇듯 예술가는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어떤 ‘주의력’을 제공합니다. 그 주의력이 사회의 모순을 읽는 주의력이 되고, 휴머니즘을 헤아리는 주의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가끔 예술가들을 정의할 때, ‘주의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주의력이 왜 중요한지, 왜 그것을 존중해야 하는지, 한번 같이 생각해 볼까요?

전효관: 현실적인 딜레마가 있을 수 있지요.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버린 공간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해야 하고, 그런 교육을 해줄 예술가의 결합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특히 문화예술교육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말이죠.




박신의: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은 문화예술교육의 개념과 철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방안은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리라 봅니다. 학교 교육이 바뀌면서 가능할테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예회관, 문화의 집 등의 문화기반 시설을 통한 교육, 공공성을 살린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등이 모두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에는 기획자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봐요. 최근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인력풀을 만든다고 하던데, 인력풀을 직접적인 교육자로서 예술가에 집중하지 말고, 매개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자가 포함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전효관: 문화교육, 예술교육 명명법이 다르고, 그 명명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요. 관객 개발의 입장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부터 교육개혁의 맥락에서 보는 문화예술교육도 있지요.

박신의: 저는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을 나누는 입장에는 전적으로 반대입니다. 전문인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고, 대중을 위한 예술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은 예술 개념을 전통적인, 혹은 모더니즘적 구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예술인을 위한 교육도 매우 중요하지요. 그것은 한 사회의 경쟁력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문인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교육 자체로 전제된다는 것은, 교육 개념에서 대중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이 문제를 새로운 예술에서 풀었지만, 실제로 삶의 공간에서 만나는 문화예술교육, 즉 대중을 새로운 예술행동의 주체로 유도하면서 도시문화를 바꾸는 것, 문화환경을 바꾸는 것도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또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강의식 개념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제 수업은 일종의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고 봐요. 다시 말하면 프로젝트는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협업으로 생각을 바꿔가고 현실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해 가는 것이지요. 문화예술교육의 프로그램을 고민할 때에도 ‘프로젝트’ 모델을 고민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에 대해서라면, 뭔가 모험을 하려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육의 효과가 엄청난 것임에도, 그것을 통해 전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발상을 감히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예 이번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위험한’ 일을 저질러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생체리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말이에요.

전효관: 현실적으로 사회적 사실로는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를 접근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언젠가 선생님과 같은 토론회에서도 문화의 민주주의, 예술의 질 문제 이런 것이 쟁점이 되었지요.

박신의: ‘문화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프랑스 문화정책에 기조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도 전문 예술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온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술이 바탕이 되고, 예술이 사회화되는 것이 문화이며, 그 문화가 사회적, 제도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문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만일 이것이 편의적으로 해석되면 예술의 힘을 배제할 수 있다고 봐요. 직업적으로, 제도적으로 전문가와 아닌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갖는 예술적 잠재력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화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여야 한다고 봅니다.

전효관: 사회 참여를 통해서, 정책 개입을 통해서 느끼시는 점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박신의 : 저는 정책평가위원회에서 정부 업무와 정책에 접하면서 궁극에는 모든 사회문제가 ‘문화적으로’ 밖에는 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카드대란이나 유해식품, 청소년 범죄와 모든 사회문제들이 언제까지 형사처벌 강화로만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외교력과 통일의 문제도 문화적 접근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난 주말에 KBS TV를 통해 일본의 한류 열풍을 르포르타주한 프로를 아주 인상깊게 보았는데, 그런 실질적인 문화현상과 교류가 노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만난 현실 정치적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화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회의 치유를 이루어보자고 하기에는 아직 우리의 인식 수준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저는 문화는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기득권자들, 혹은 진정한 좌절감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에게 문화는 여전히 향유할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라도 대중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문화가 마음에 닿아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기대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효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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