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2007. 12. 28. 18:00

  김석희 선생은 젊다. 밤 늦게까지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체력體力과 주력酒力도 그렇고, 젊은 사람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는 모습도 그렇다.

  얼마 전 함께 중국여행을 다녀왔던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선생이 책 한 권을 돌렸다. 존 러스킨 John Ruskin 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Unto This Last>. 전에 만났을 때부터 연말에 좋은 책이 하나 나온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책을 챙겨나오신 것이다.

  돈 주고 산 책은 종종 책꽂이에 그냥 꽂아두어도, 선물로 받은 책은 제법 열심히 읽는 습성이어서 시간 나는대로 훑어 읽었다.

 

  1860년에 근대자본주의국가를 처음으로 형성해가던 영국에서 발표된 이 글은, 데이비드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소위 주류 경제학 이론을 비판하며 러스킨 식 경제학을 주창하고 있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기술들에 대해서만 칭송하는 경제학(그 부가 만든 그늘은 무시하는)은 개인의 부는 확대시킬 수 있지만, 국가 전체의 부는 오히려 갉아먹고 있다고 비판하며, 정당한 경제학은 부의 바탕에 정직을 이 두어야 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지키고 전체의 이익을 견지하며 사람에 대한 사랑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러스킨의 주장은 가슴을 울리는 바가 없지 않지만, 현재의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대응해나가는 데는 유효하지 못한 것 같다. 19세기 중엽 자본주의화의 거친 물결 속에서 그 이면을 고찰하여 주장한 '도덕적' 자본주의랄까.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을 첨부한다.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12211635321&code=900308

 

[책@세상. 깊이읽기]‘사람’ 그 자체가 경제 목적
입력: 2007년 12월 21일 16:35:32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느린걸음


성 경 구절을 딴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예수가 천국을 비유할 때 나오는 구절(마태복음 20장)이다. 포도밭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일꾼과 나중에 합류해 조금만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품삯을 쳐주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이 불평했다. 그러자 주인이 “나는 너를 부정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화폐단위)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약속한 너의 품삯을 받아 돌아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게 거슬리느냐?”라고 대답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천국이라는 비유다. ‘합리적 이기주의자’를 가정하는 주류·비주류를 막론한 애덤 스미스 이래의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로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마르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며 산업화하는 영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지켜본 저자는 자본론보다 7년 앞서 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 달리 너무 ‘온건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아니 온건했다기보다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을 포함한 당시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외면받았다. ‘브레이크 없이’ 전진을 거듭하는 중이었던 당시 영국인들은 ‘근대 화가론’를 쓴 바 있는 저명한 예술평론가인 저자의 입을 통해 예의 그 고상한 미술론 같은 얘길 듣고싶어 했다.

저 자 스스로 이 책을 ‘부(富)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궁구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경제사상의 핵심은 ‘사랑’과 ‘정직’, 곧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뻔한 말씀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함’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묻는다. 경제학은 결국 ‘모두 다 부자가 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는 상대적이다. 내 주머니 속 1만원의 힘은 내 이웃의 주머니 속에 1만원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저자는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내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상업적 경제학이 타인의 노동에 대한 법률적 청구권이나 지배력을 개인의 수중에 축적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경제학은 단순히 유용하거나 쾌락을 줄 수 있는 사물을 가장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생산하고 보존하고 분배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건초를 베어 들이는 농부, 단단한 목재에 대못을 단단히 박는 목수, 잘 이긴 회반죽에 양질의 벽돌을 쌓아올리는 건축공… 이들이야말로 궁극적 의미에서 진정한 정치적 경제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국가의 부와 행복에 끊임없이 이바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부 그 자체보다는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는 하인이나 상인이나 예술가의 노동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힘이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대중을 다양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권위”일 뿐이다. 진짜 경제학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물건을 열망하고 그 때문에 일하도록 가르치는 학문”이다. 노동자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최고의 이익을 내는 것은 결코 강한 압력이나 높은 보수를 받을 때가 아니라, ‘최대한의 애정’이 발휘될 때라고 한다.

우 리는 근대 경제학과 함께 너무 많이 와버려 이런 얘기에 귀기울이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정직’ ‘애정’ 등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합리적 결정을 교란시키는 우발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근대 경제학은 옳은 것인가. 효율적이면 다 좋은 것인가. 우리는 이따금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석희 옮김. 1만2000원

〈손 제민기자〉
Posted by

6월 민주항쟁 20주년사업 추진위원회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대토론회 - 상상변주곡 8

**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와 사상의 변화

이진경(철학자, 서울산업대 교수)




1. 역사적 대답, 질문의 역사


  우리는 지금 지난 20년의 지나간 역사에 대해 묻고 있다. 무엇을 묻고 있는가?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에 하나의 문턱이 되었던 87년 6월 항쟁의 의의에 대해, 그 항쟁으로 인해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 사회의 변화양상에 대해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묻고 있는가?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그 동안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확보하지 못한 것을, 혹은 다행히도 확보한 것을 문턱이 된 과거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역사적 형식의 질문으로 무언가의 ‘의의’를 묻는다는 것은 이렇게 되기 십상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역사 안에 확고한 하나의 자리를 부여하고,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 그것과 계열화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역사적 의의를 묻는 통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 경우 질문은 이미 대답을 포함한다. 질문에는 언제나 이미 반쯤은 대답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에 할당된 역사적 자리, 그것은 이미 그것과 연결되는 모든 사건들의 의미를 이미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흔히 그것에 이미 만족한다. 그것이 얻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설정된 지난 20년이란 기간은 그 사건을 통해 이미 '해석의 지평‘이 만들어진 기간이고, 그 지평을 통해 다듬어진 시간이며, 그리하여 그 안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대개는 그 중심적 사건으로 수렴하게 마련인 시간이다. 그러나 정말 그 20년이 6월 항쟁으로 귀속되는 시간이었을까? 그 20년간의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과 계열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차라리 그렇게 제공된 대답들에 대해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87년 6월 항쟁 이후 20년간의 사회·사상적 변화에 대해 논의하자는 제안에 대해 나는 그것을 질문의 역사로서 검토하자고 말하고 싶다. 운동의 관점, 아니 좀더 넓게 말해 실천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질문이란 사건과 사유가 만나는 접점이고 사회와 운동이, 사태와 실천이 만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 어떻게 사유되었나를, 아니 사유되어야 하는가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질문들이 당시에는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서 사태가 좀더 진행된 연후에야 비로소 명료하게 된 것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사회와 운동이 우리에게 던지는 무엇을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며’ 사유하기보다는, 그것을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대결하며’ 사유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 혁명적 실천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87년은 두 개의 사건에 의해 과잉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80년 광주항쟁이다. 그것은 6월 항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되는 군사정권의 행로를 처음부터 결정지은 사건이었고, 그 정권과 대결하는 운동으로 하여금 혁명적 강밀도를 가질 것을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혁명적 봉기, 군사적 폭력과의 대결, 해방구적 상황, 그리고 거대한 패배, 80년 광주항쟁 이후 운동은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어야 했다. 좋든 싫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자 하지 않고선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것은 이렇게 묻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다른 하나는 멀리 70년의 전태일 분신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노동자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는 어떠한 운동도 삶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그리하여 삶에 진지하거나 운동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노동자에 대해 노동운동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이었다. 오랜 잠행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혁명에 관해 질문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노동에 대해, 노동자와 민중들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아마도 85년 대우어패럴 노조 연대파업과 서노련·인노련의 창립은 이 두 가지 사건의 효과가 응집되며 만들어낸 사건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 그리고 군사정권의 폭력과 대결하며 존속할 수 있는 조직, 그리고 ‘부분운동’을 넘어서 ‘전체 운동’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운동. 물론 알다시피 서노련과 인노련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던진 것이든 아니든, 그들을 통해, 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삼게 된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 그것을 위한 직업적 혁명가의 조직, 아마도 이것이 그 질문을 통해 얻어낸 대답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종종 비판하기도 하듯이, 질문을 통해 사유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수입’된 대답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답이 너무 빠르고 너무 쉽게 도출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사유 없이 도입된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배우고 논문을 쓰는데 원용되는 이론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실천의 이론이 ‘사유 없이’ 도입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비록 그 사유가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음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우연이었을까? 동형적인 이론적 배치가 출현한다.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 등, 후진국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이론들에 대비하여, 노동자계급의 사상으로서 맑스주의 이론의 보편성을 계급분화 양상을 통해 논증하면서, 이론적 수용에서 ‘사상적 원칙’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 논문이 제출되면서, 다기한 이론들 사이에 배제와 선별의 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혁명적 실천을 위한 혁명적 이론, 혁명 전략을 고민하기 위한 이론적 연구가 아카데믹한 공간에서 벗어나 운동의 장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한 대답의 시도이기 이전에, 맑스-레닌주의적 지반 위에서 혁명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주체들을 하나의 대열로 결집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대답은 그토록 많이들 달랐지만, 그 모두가 질문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었던 하나의 이론적 장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87년 6월 항쟁은, 물론 그 직접적인 불씨는 고문치사사건과 호헌선언이었지만, 그것은 점점 가속화되며 진행되던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로 응축되며 폭발하게 한 하나의 계기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3. 정치의 새로운 공간


  87년 항쟁의 직접적 결과물은 정치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야당은 물론 운동권의 정치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합법적 정치공간이 만들어졌다. 합법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를 내서 공개적인 정치적 장에서 선전활동을 했던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운동단체들이 합법적인 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조합의 활동 역시 합법성의 폭이 확대되었다.

  어느 정도 시차를 두기는 하지만 그람시의 이론을 비롯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의 의의를 강조하는 이론들이 조명을 받게 되고, 그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내지 한국의 정치공간을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조건의 산물일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획득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개념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란 점에서 6월 항쟁이라는 사건의 결과물에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대답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새로이 확장된 공간에 대한 사유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사유였다. 아마도 새로운 정치적 공간에 진출하여 그것을 이용해야 했던 한,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했고, 따라가야 했던 사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합법공간에서의 정치는 합법공간이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가령 합법공간을 가장 소극적으로 규정하여 합법적인 선전의 장으로 본다고 해도, 거기서 선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을 요구할 뿐 아니라 다양한 진입장벽과 작동방식으로 인해 항상-이미 부르주아지나 보수층에 유리하게 선규정된 게임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합법적 공간을 장악한 부르주아적 매체들과 대항해서 값은 싸지만 빈약한 선전물로 대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시작하면서부터 지는 게임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합법공간에서의 선전이 취하게 될 경로는 어느 정도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해도, 그 경로에서 크게 이탈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주 적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맑스의 말을 빌어, “무엇을” 선전하는가보다 차라리 “어떻게” 선전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부르주아지와 대결하는 지점에서 “어떻게” 대결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지점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선전만이 아니라 정치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중당을 비롯한 초기의 합법적 정당활동이나 대통령 선거 참여가, 그 성과가 없었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합법적 공간에서 혁명은 그만두고라도 변혁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하기는 그 성과가 매우 적었음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합법적 정치공간은 거기에 부합하는 정치활동의 ‘방식’에 따를 것을 요구하며, 그 방식은 물질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의 기득권이 거대하다는 점을 그만두고라도 기존 정치인들이 훨씬 능숙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싸워서 그들에게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과연 혁명운동의 기회를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람시의 용어로 말한다면,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대항해 합법적 정치공간에서 벌이는 진지전이 과연 그들과 싸워 이기는데 적합한 전술형태일까? 그것은 이기기 위해선 부르주아지보다 좀더 부르주아적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난점을 안고 있는 사태는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운동을 통해 확보한 합법적 공간을 포기하고 계속 지하로 달리는 노선을 고집해야 할까? 그거야말로 ‘좌익 소아병’이라고 비판받던 사람들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합법적 공간과 합법적 활동의 관념을 바꾸지 않고는, 아니 합법과 비합법으로 정치적 공간을 사유하는 지반 자체를 바꾸지 않고는 이 난점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합법공간의 확장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근본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를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결코 근본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묵시적으로, 그리고 편의적으로 나름의 대답을 한 것 같다. 가령 합법 공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권에 들어가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민중당이나 합법정당이 아니라 기존 보수정당(심지어 한나라당!)을 선택함으로써, 합법적 공간이 요구하는 바에 충실히 따라갔다. 기존의 모든 비합법 지하조직을 합법화하고자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해소의 길을 걸었던 한노당(준비위)의 시도는 이런 난점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기는커녕 사태를 통해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합법정당을 전부라는 부르주아적 대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결정적인 와해를 야기했던 극적인 사례였다. 그렇다면 합법적 정당을 단지 지하조직의 분견대로 간주하는 것이 이러한 난점을 피할 수 있을까?

  어쨌건 이러한 질문과 근본적으로 대결하지 않는 한, 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앞서 말했던 난점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럽이나 일본에서 사회당처럼 ‘성공’했던 경우에조차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부르주아적 정당의 하나가 되고 만다는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사실 합법적 공간의 문제는 단지 정당정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또한 합법적 공간의 딜레마를 피할 수 없었던 던 것 같다. 가령 민주노총은 이와 다른 경로로 합법화가 갖는 난점을 다른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 알다시피 1999년까지 불법단체였던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 들어 합법화을 쟁취했고, 민주노조운동은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아가 민주노총은 노사정 위원회라는 코포라티즘적 체제의 중심적 한 축이 됨에 따라 정부와 ‘사용자’의 파트너로서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합법적 공간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짐에 따라 민주노총은 앞서와 어느 정도 유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즉 합법적 공간에서의 힘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합법공간의 다른 두 축인 ‘사용자’와 ‘정부’의 협조자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라면 민주노조운동이 받아들이기 힘든 그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합법적 공간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이점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합법적 공간은 그 공간이 요구하는 게임의 규칙, 게임의 방식을 제시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민주노총이 노사정 위원회에 가입과 탈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은 명료하다곤 하기 어려워도 이러한 상황이 던지는 질문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과 대결하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 해도 말이다. 이 질문과 대결하지 않고서 당면한 딜레마를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합법적 활동의 개념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의 형태 자체, 그리고 그것의 활동방식 자체를, 아니 노동운동의 위상이나 의미 자체를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시민운동의 경우에는 이런 동요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87년 이후 시민운동의 발전은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민주정부’나 ‘참여정부’ 이후에는 시민운동이 정부의 정책이나 재벌의 활동 등에 대한 비판적 견제세력이 되었고, 비정부조직으로서 거버넌스의 한 요소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으며, 그 결과 시민운동 단체는 ‘운동권’에서 정부나 정계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총리나 장관은 물론 심지어 국정원 내부에까지 소위 ‘운동권’ 인사들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와 나란히 시민운동은 ‘공식소송’처럼 법에 근거하여 정부나 재벌의 불법행위를 따지고 비판 내지 ‘고발’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혹은 문제가 많은 법에 대해 법의 정당성을 따지고 개정하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라는 또 다른 법적 소송에 기대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 모든 과정은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고 법이 정권의 직접적 도구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되면서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거꾸로 그것은 시민운동이 법에 기초한 운동이지 그것을 전복하는 운동이기를 그쳤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시민운동가들에 의해 통상 ‘비현실적’이라는 말과 동일시되는--문제와 다른 차원에서 좀더 현실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운동이 법을 기반으로 삼고 법적 고발의 형식을 반복하게 됨에 따라, 법적 판결을 최종적 판단으로 삼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탄핵,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개폐 등이 모두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귀착되었을 뿐 아니라, 이라크 파병문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 운동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사안이 법적 판결에 의해 운동 자체가 해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양상의 가장 극적 형태는 새만금 사업에 대한 투쟁이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을 많은 사람들이 혼신을 다해 싸웠고 그 성과 또한 환경과 생태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전환시킬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운동이, 대법원의 어이없는 판결 하나로 해소되고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법이 운동의 상위에서 운동에 대해 판단하고 운동은 그것을 존중하고 그 판결에 따르는 현상, 운동 자체마저 사법화되고 있는 것이다. 법관들은 고시공부만으로 세상을 만났기에 법 바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좋든싫든 법의 경계를 침범하고 위반하는 운동들을 통해 법 바깥을 고려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운동은 역으로 법 안에 안주하게 됨에 따라 법적 통치의 게임이 현실이나 운동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법적 관점에서보아도 사태는 매우 비관적인 결과로 귀결되고 있는 것 같다. 법정 드라마가 TV시청자의 관심마저 끌게 되고, 모든 문제를 법적 소송의 문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문제로 귀착되는 미국의 상황이 이러한 사태의 멀지 않은 미래라고 하면 과장일까?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은 합법적 공간이 제공하는 대답, 즉 합법적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고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확보한다는 대답에 충실했지만, 그것이 던지는 질문을 듣지 못했고 그것이 야기하는 딜레마조차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익적 사유는 가능한가?


  운동과 사유의 지반을 가장 심층적인 층위에서 뒤흔들고 뒤바꿔버린 사건은 87년 6월 항쟁과 전혀 다른 외부에서 왔다. 90~91년의 사회주의의 붕괴가 그것이다. 단절된 운동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전국적 전위정당의 건설을 시도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그 모든 꿈과 희망을 와해시키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서도 스스로 던진 적이 없던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찾아내고 발빠르게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능성, 혹은 맑스주의적 사상의 무모성, 혹은 혁명의 꿈 자체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었을 게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저 꼴 난 사회주의보다는 나으며, 그나마 덜 나쁜 체제라는 식의 생각, 혹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사회민주주의가 그나마 적절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거기 포함된 또 다른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전에 “맑스주의와 근대성” 서론에서 개인적인 상황과 체험의 형식으로 쓴 적이 있는 것이지만, 사회주의 붕괴는 무언가를 확고하고 확신하게 해주는 대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동시에 던지는 사건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에서 혁명운동 내지 변혁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 맑스주의라는 사상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념 아닌 삶의 문제였기에, 그래서 이념도 사상도 없이 운동했기에, ‘자생성’과 ‘아마추어주의’, ‘자족성’ 등으로 비판되었던 것이 아닌가? 삶 전체를 걸게 만들었던 현실과 사태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삶을 걸고 가려던 길이 갑자기 끊어지고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난 것이다. 손쉬운 대답이나 발빠른 대안을 찾는 사람이라면 널 나쁜 길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미련하게 거기에 삶 전체를 걸었던 사람, 항상 근본적으로 사유하려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아갈 수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발빠른 변신을 시도한 사람들과 달리, ‘붕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던 길을 의연해 계속하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태에 대해 좀더 진지했었다고 믿는 것은, 흔히들 말하는 것과 반대로 이념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삶에 진지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맑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대비시키고, ‘진정한 사회주의’와 ‘잘못된 사회주의’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도 좋을까? 스탈린에 의해 폐기된 사회주의 이론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없는 노동운동으로 우회하는 것으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저 사태가 강력한 당혹의 힘으로 힘껏 던지고 있는 질문에 귀막는 것은 아니었을까?

  좋든싫든 사회주의의 붕괴는 혁명이나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사유되던 삶의 문제, 새로운 삶의 방식의 문제가 근본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사유되지 않은 채’ 혹은 ‘사유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혁명이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될 것을 요구하는 사태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혁명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한편으론 맑스주의 사상 자체에 대해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의 역사란 어떻게 말을 해도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진행되어 온 것인데도, 맑스주의는 그 붕괴한 역사의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지났다는 사회주의가 어째서 붕괴했고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대체 맑스주의는 자신의 이름과 결부된 이 역사를 어째서 이해할 수조차 없는가? 그것은 맑스주의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맑스주의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맑스주의자는 맑스주의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형적 배열을 넘어서, 역사철학적 종말/목적으로서 공산주의의 관념을 넘어서 자본주의와 다른 종류의 관계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형태로 현재로부터 분리되고 유예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맑스 말대로 현재 시제의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로서 코뮨주의를 다시 사유하는 것, 아마도 이런 과제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코뮨적 관계, 코뮨적 구성체를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라는 이전의 개념으로부터 분리하여 다시 정의하고 다시 사유하는 것.

  다른 한편, 그것은 자본주의와 외연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근대’ 내지 ‘근대성’에 대해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사태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의 근대적 인간들, 근대적 통제체제, 근대적 관리체제들이 그대로, 혹은 좀 더 거대하게 확대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근대성’이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근대 사회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이 시기 맑스주의자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문제의식이 한국 사회에서 근대성의 형성과 결부된 많은 연구들과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푸코의 그것을 포함하여, 이러한 연구들은 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전통적인 사회구성체론과 다른 측면에서 ‘근대’라고 불리는 사회구성체에 대한 연구였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상관적이며 서로를 규정한다. 한편으로 사회주의가 근대적이었다면, 그것을 방향짓고 그것을 인도하던 이념인 맑스주의 역시 근대적이었을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맑스주의 안에서 근대적 요소들, 혹은 맑스주의의 근대적 지반은 대체 어떤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 근대적 지반을 넘어서는 사유는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 맑스주의의 사상적 지반이었던 노동의 인간학 내지 휴머니즘, 그것의 경제학적 형태인 노동가치론, 계산가능성의 사회적 전제로서 화폐적 형식, 그리고 생산성으로 생산력을 대체하고 그런 의미의 생산성 발전을 진보로 정의하는 공리주의적이고 개발주의적인 진보관념, 그리고 생산의 사회화를 계산능력의 사회화로 치환하고는 계산과 계획을 통해 정의되는 사회주의의 관념 등 모든 것들이 근본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다른 한편 맑스주의를 통해 근대성의 경계를 다시 사유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긍정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 근대적 삶의 방식, 근대적 주체형태를 넘어선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주체형태를 근대와의 대결지점에서 사유하고 창안하는 것이 또 하나 모색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었을까?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으로 대체되어 이해되는 ‘근대의 종언’ 내지 ‘탈근대 사회’의 도래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근대 이후 세계의 요소를 발견하고 확장하며 현재화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근대 내지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는 그것의 외부들을 창안하고 구성하려는 시도로서 코뮨주의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이러한 질문들과 대결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좌익적 사유가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아니 이러한 대결을 통해 새로운 이론적 사유를 밀고 나갈 수 있다면, 사회주의 붕괴야말로 거꾸로 진정 좌익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는다. 기성의 것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으로서 보수주의와 반대로, 사회적 상황 내지 사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확보된 안정적 요소들에 대해서조차 전복의 힘을 작용시키는 것으로서 좌익적 사유를 정의한다면 말이다. 이전의 사회주의가 결코 사유되지 않은 혁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충분히 사유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할 때, 비로소 혁명에 대해 충분하게 사유하고 혁명을 향해 전위--‘아방가르드’라는 의미에서--적인 실험과 실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5. 문화주의의 시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문화’에 관한 관심이 부상하고, 문화이론이 이전의 ‘경제이론’을 대신할 듯한 이론적 구도가 만들어진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라캉이나 푸코 등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읽히기 시작했으며, 그에 이어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이론이 널리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최소한 외환위기사태가 발생했던 1997년까지 이는 이론적 영역에서 지배적인 경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라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그 공백을 문화이론이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화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거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혹자는 긍정적으로, 혹자는 부정적 내지 냉소적으로.

  일단 현상적인 측면에서 사태가 그러했다는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긍정적인 면이 있었음 또한 사실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갖춘 통일적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에 의해 다른 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닫혀 있던 상황이 해소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이론적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대립적 지점이 있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한 사유의 개방은 자본주의 내지 근대에 대한 맑스적 사유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보드리야르나 리요타르가 프랑스 공산당을 왼쪽에서 비판하던 ‘좌파’였으며 그의 이론 역시 그런 좌익적 문제설정에서 시작된 것이었음은 잊혀진 채, 모든 ‘거대이론의 종말’이란 형태로 사소한 것에 집중하게 된 시대의 선언으로 읽히거나, 시뮬라시옹이라는 과잉실재의 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문화가 지배하게 된 시대에 대한 선언으로 읽혔던 게 아닐까? 매체나 문화의 강력한 힘에 도취된 ‘날라리’ 이론. 이는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푸코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갖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잊혀진 채, 경제를 담론이 대신하고 국가권력을 미시권력이 대신하는 문화이론으로 간주되었던 게 아닐까?

  명시적으로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며, 68혁명을 이론화한 것으로 간주되는 들뢰즈/가타리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에 반하는 날라리 문화이론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 시기 이론적 지형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거기에는 이전의 맑스주의와 다른 모든 이론을 맑스주의에 반하는 이론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대답’으로 간주하려는 의지가 일종의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화이론’ 내지 ‘문화주의’란 말이 이러한 의지와 나란히 가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경제이론 내지 경제주의로 간주되었던 유물론과 대비되는 명칭이었다는 점에도 적지 않게 기인하는 듯하다.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이론 역시 이와 유사하게 어떤 근본적 질문보다는 이전의 이론을 대신할 대답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프롤레타리아트 없는 운동의 가능성, 혁명 없는 운동의 불가피성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을까?

  1997년 이른바 IMF사태가 또 하나의 변곡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도 속에서 그것은 잘나가던 ‘문화’의 화려함을 밀치고 ‘경제’가 다시 삶의 일차적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가령 1998년 “진보평론”이 적어도 그 창간의 시점에서는 ‘신/구’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나, 2003년 개최된 제1회 맑스코뮤날레가 백화점식 나열이란 비판을 들을 정도로 넓은 편폭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전의 이론적 지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맑스주의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헤게모니를 얻을 수 없었고, ‘정통’이란 이름의 분할과 배제의 이론적 메커니즘 역시 되살아날 수 없었다. ‘문화이론’이란 이름의 이론들 또한 앞선 시기와 같은 주도권을 유지할 순 없었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확보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어느 하나가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립의 강도가 완화되며 만들어진 이 거리 속에서 경제주의와 문화주의, 맑스주의와 ‘문화이론’을 가르던 경계는 와해되었고, 새로운 이론적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 이론이 대답 아닌 질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맑스주의 진영 안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비록 모두가 그랬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혁명에 대해, 혹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맑스주의 붕괴 이후의 좌익적 사유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맑스주의 안에서 새로운 분화와 분기의 지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정보가치를 둘러싸고 노동가치론 자체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하고, 맑스주의에서 노동의 인간학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제국주의를 대신한 제국의 개념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고, 레닌주의적 당조직을 대신하는 네트워크 식의 조직이, 혹은 평의회 식 사회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대신하는 사회주의적 세계화가 새로운 토론의 대상들로 떠올랐다는 것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자율주의나 아나키즘, 푸코나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단순한 거부나 지지의 방식을 넘어서 이론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문화주의’는? 잘 모르겠다.



6. 전선의 이동, 혹은 소수자의 정치학


  박정희 체제 이래 한국의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을 분할하고 결집시키던 적대의 구도는 이른바 ‘민주/반민주’의 대립이었다. 상이한 이해,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어도, 독재정권에 대해 반대하며 투쟁할 의사가 있다면, 모두가 민주/반민주를 가르는 전선에서 민주의 편에 선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는 87년 이후, 혹은 더 뒤로 잡아도 양 김씨의 집권이후에는 유효성이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정치적 대립을 전체화하는 전선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이후의 정치 전반을 규정하는 새로운 전선의 형태는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다. 분명히 정치투쟁, 혹은 계급투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래서 가령 이전에는 관제동원에 지나지 않아 거의 무의미하던 우익단체의 행동이 새로이 ‘자발적’ 운동의 형태를 취하고 기독교 단체들의 우경화가 아주 뚜렷하게 진행되는 한편, 대중운동 역시 이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로 모아주고 집약해주는 대립의 형태는 뚜렷하지 않았다. 즉 ‘민주 대 반민주’의 전선을 대체한 다른 전선의 형태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투쟁은 빈발하고 다양한 형태의 운동과 대결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전선으로 결집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세력들간의 대결과 확장되지 않는 상태, 그래서 지원과 지지의 형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세력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하나의 전선으로 응집되지는 않는 상황, 그것이 우리가 87년 이후 통과한 시기를 특징지어준다. 다양한 투쟁들은 있지만 그 투쟁들이 응축되어 하나의 전선, 하나의 ‘주요모순’으로 응축되지 않는 상황, 그래서 각각의 투쟁들은 각각의 해당지점에서 각개약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상황, 아마도 알튀세르라면 이를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물론 미군반대운동과 대통령 선거로 대중운동이 강력하게 집중되었던 2002년이나, 탄핵을 둘러싸고 국민 전체가 양분되어 대결하던 시기를 들어 응축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2002년의 사태는 대중의 흐름이 강력하게 형성되어 가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월드컵과 반미운동, 대통령 선거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투쟁, 전혀 다른 대립의 지점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응축이 수반되는 과잉결정이 아니라 응축이 없이 다양한 투쟁이 상이한 지점에서 진행되는 과소결정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거기서 하나로 결집된 것은 모순이나 전선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흐름 자체였다. 그것은 다양한 세력이나 투쟁을 응집하는 단일한 전선이 가시화된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흐름의 공간을 통해 단일한 대중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전선, 새로운 대결의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대결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대결해야 할 하나의 중심적인 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종류의 적들과 대결하는 새로운 종류의 대중을, 새로운 종류의 운동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로운 대결의 지점은 다른 곳에서, 그리고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양극화’와 결부되어 있다. 특히 IMF 사태 이후 이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이전과 다른 점은 양극화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두 계급으로의 분해가 아니라, 각각의 내부에서조차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율은 1998년 각각 6.5%와 5.2%였던 것이 2004년에는 9.4%와 4.1%로 벌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이나 일자리와 관련해서 더욱 현저하다. 1998년 중소기업이 고용한 인력은 전산업고용인구의 75.3%였고 그 사람들에게 지불된 임금은 전체임금의 76.2%였던 반면, 2003년에는 고용비중이 87%로 늘어났지만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은 전체 임금의 65.8%로 줄어들었다. 이는 중소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의 임금이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으며, 반대로 대기업 고용인력의 임금이 그만큼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 일자리 역시 상위 수준의 일자리와 하위 수준의 일자리가 모두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반면 중간수준의 일자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좀더 분명한 것은 전체 고용인구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매우 급속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4년 8월 전체 노동자의 반이 넘는 56%가 비정규직 형태의 일자리에 고용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급속하게 분화 내지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의 비율은 70%에 이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60% 정도에 머물고 있으며, 4대보험이나 퇴직금, 상여금, 유급휴가 등 다른 급여적 요소들 역시 정규직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다(고병권, “한미FTA와 한국사회의 양극화”, “한미FTA 국민보고서”, 그린비, 2006).

  이러한 양극화는 맑스주의자라면 자본주의 사회 어디서나 발견하던 것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지금 진행되는 양극화는 고전적인 맑스주의 계급이론에서 말하는 양극화와 크게 다르다. 고전적인 계급이론에서 그것은 중간계급인 쁘띠 뿌르주아지가 일부 소수는 부르주아계급으로, 대다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 분해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 지금의 양극화는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간의 실질적인 격차를 만들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그것과 다르다. 중간계급만 분해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 계급 자신도 두 층으로 분할--아직은 분해라고 해야 할지, 분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나 중간층 역시 유사하게 양극화되고 있다는 점이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할은 단지 경제적이고 객관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2000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의 배타적인 태도로 아주 유명하다. 이는 현대자동차 등의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해 보여준 배타적인 태도와 더불어 2000년대 노동운동의 지형을 규정하는 아주 근본적인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노동운동 자체도 경제적 양극화의 선을 따라 분할되며 양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간부나 민주노총 간부의 ‘비리’ 사건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이 이젠 이익을 확보하고 따로 챙기는 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노동자 내부에서 정규적인 일자리를 갖고 높은 임금을 받아 안정적인 생활을 확보한 주류적인(major) 노동자와 비정규적이고 낮은 임금, 불안정한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소수적인(minor) 노동자로의 분할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소수적인 노동자의 문제는 단지 노동자 내부에서의 분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힘들고 위험한데 임금마저 낮아 한국인들이 피하는 최하위층 일자리를 담당하는, 이미 40만을 넘어서 이주노동자들 역시 한국에서 소수적인 노동자층의 핵심적인 요소다. 여기에 태생적으로 시장에 취약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해야 하는 농민들, 남성들에 비해 어디서나 2차적이고 저급한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여성 등등의 수많은 소수적인 층, 소수적인 집단들이 여러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수가 많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확보한 이권이나 이득이 많다는 의미에서 ‘다수적인(major)' 층과, 수는 많지만 이권이나 이득이 적다는 의미에서 ’소수적인‘ 층의 대립이 점점더 많은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그 대립의 양상 역시 본격화되고 있다.

  이상의 사태를 요약하면, 여러 영역에서 다수자(이른바 ‘주류’)와 소수자간의 분할과 대립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결국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이 현재 한국 사회를 양분하는 주요모순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반민주의 전선’이 ‘다수자/소수자의 전선’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아직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대립이 하나의 전선으로 응축되는 과잉결정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는 이러한 상황을 빠르게 가속화하게 되지 않을까? IMF 이후의 구조조정이 비정규직이나 소수자를 급격하게 양산하기 시작했음을 안다면, 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수반될 한미FTA가 이러한 사태를 매우 강하게 밀어붙이며 다양한 소수자들을 하나로 응집시키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 노무현 정권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이유를 이러한 전선의 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투쟁을 통해 집권했을 뿐 아니라 탄핵사태라는 위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노무현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어떤 개혁도 이루어낸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은 ‘진보’라고 믿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유효하게 실행된 정책은 모두 진보진영에 반하는 ‘보수적’ 정책 일색이었다. 새만금이나 천성산 문제처럼 자신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도 모두 뒤집었고, 언론개혁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하지 못했으며, 국가보안법처럼 거의 다 죽은 악법조차 의회에 과반수를 갖고서도 폐지하지 못했다. 그린벨트를 과감하게 풀어 개발주의를 가속화했고, 스스로 공언하던 아파트 원가공개조차 포기했고 거꾸로 부동산 가격을 이전 어느 정권보다 급속하게 올려놓았다. 미국과 거리를 두던 초기의 입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미군기지의 확장을 비롯한 미군의 새로운 세계전략에 파트너가 되어주었고, 진보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몇 안되는 이라크 파병국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모든 진보진영이 일치하여 반대하는 한미 FTA를 미친 ‘곤조’ 하나로 밀어붙였고, 덕분에 견원지간이던 보수언론이나 보수정치인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믿음 자체는 거짓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왜 노무현은 자신이 선택한 정책이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이 진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서 있는 곳은 예전과 같은 곳 그대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재정권과 투쟁하던 민주진영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싸우던 곳에 그대로 서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도덕적 정당성’은 단지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이러한 전선 상의 위치에 대한 자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그가 민주진영의 사람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을 만큼 훌륭한 일원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해도(그게 사실인지도 지금은 의문이지만) 사회적 대결의 양상을 규정하는, 즉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전선이 이동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인사라는 것이 ‘진보적’이라고 말할 어떤 이유도 제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양김씨 주변에 있었기에 자동으로 ‘반독재’ 진영에 속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대개 보수파임이 분명해졌으며, 거꾸로 과거 운동권에 속했던 사람들이 보수파 정객이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전선이 이동하는 경우, 민주/반민주의 이편에 있다고 해도, 다수자에 속하는 경우 전선의 저편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한국통신 노조처럼 민주노동운동의 중요한 일부였지만, 소수자들의 적대세력이 된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 의도적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기에,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많은 노조들, 특히 대기업노조들이 그러하듯이.

  여기서 정말 웃기는 코메디는 전선이 이동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어도 보수파가 될 일군의 사람들이, 이제는 진보를 그만두고 보수가 되겠다고 전선 저편 멀리 훌쩍 이동한 것이다. 그들은 새로이 보수파가 되려는 의도를 갖고 이동했기에 자신이 ‘뉴 라이트’이라고 믿지만, 그들이 옮겨간 곳은 민주/반민주 전선의 저편, 즉 ‘올드 라이트’가 서 있던 곳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그들이 제시하는 역사해석 등이 한결같이 낡은 올드 라이트의 그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에서 ‘뉴 라이트’는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 진보라고 믿으면서 그 자리에 선채 전선의 저편으로 이동한 사람들, 노무현이나 주류층이 된 노동조합이다.

  여기서 진보적이 되기 위해 ‘소수자’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너무 쉽게 대답을 구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새로이 던지고 있는 질문을 듣지 못하고, 그것을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 대답은 상황이 조금 달라지면 또 금방 잘못된 대답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보기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두 계급으로의 분해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신이 다수자와 소수자로 분할되고 있다면, 그리하여 전투적인 역사를 갖는 민주노조조차 가던 길을 그대로 가는 한 다수자가 되고 만다면, 노동운동이 진보적이기 위해선, 즉 노동운동이 ‘소수적’(이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민주/반민주가 정권이라는 근대적 총체성의 담지장치를 통해 작동하기에 반독재 세력의 결집과 응집이 자연스럽고 용이했지만, 소수화는 여러 영역으로 분할되어 진행될 뿐 아니라 시장의 힘이라는 분산적 권력에 의해 진행되기에 응집과 결집이 어렵다면,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투쟁은 언제나 과소결정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전통적 의미에서 권력의 전복을 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연대나 동맹의 관념이 이제는 계급이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로질러 작동해야 하는 것일까? 등등.

  그렇다면 6월 항쟁이라는 미완의 혁명, 미완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방식으로는 혁명적이기는 물론 진보적이기도 어렵다는 것을 굳이 따로 지적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20주년 기념’의 형식으로 현재를 어떤 식으로 6월 항쟁과 연속적인 지점에 두고 연결하기보다는, 차라리 6월 항쟁과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과 변환을 포착하는 것이 정작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것이 6월 항쟁의 정신에 더 충실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이 사람2007. 12. 24. 22:28

  며칠 전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요즘 너무 공부를 안한다고 하자

  이현식 박사가 그랬다.

  "나는 언제 공부를 해봤는지 기억도 안난다"고.

  그때는 그냥 우스개소리로 그냥 지나쳐 들었는데, 이는 공부쟁이들의 투정일 뿐이다.

  이 박사는 지난 여름에는 문학평론집 <곤혹한 비평>을 냈고, (이 책은 2007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년에는 연구논문집인 <제도사로서의 한국근대문학>과 <일제 파시즘 체제 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을 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민예총 문고로 <왜, 지역문화인가>를 냈다.

  '안'공부쟁이로서의 투정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이현식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부드러운 사람이다.

  술술 읽힐 수 있게 쉽게 쓴 이 책은,

  영문학을 공부하는 학부생이었던 그가 한국 근대문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는지

  그리고,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지역과 지역문화에 발을 들여놓게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지역'과 '문화', 그리고 '지역문화'에 대한 폭넓고도 간결한 생각을 전달한다.

 

  너무 빨리 읽어버린 건 아닌가, 조금 우려하면서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키워드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와 실천 가능한 대안 모색이다.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간간이 뒤적여보게 될 것 같다.


'이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0) 2017.07.22
박찬국, 점점 궁금해.  (0) 2011.06.20
Posted by